역사 이야기

양산보의 생애와 소쇄원

강나루터 2021. 8. 20. 07:44

양산보의 생애와 소쇄원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1. 양산보의 생애

 

1) 출생과 혼인

 

  양산보(梁山甫)는 아버지 양사원(梁泗源)과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 사이에서 5남 가운데 장남으로 1503년(연산군9)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할아버지 양윤신(梁允信)이 평안도 영변으로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나주 복룡동(伏龍洞)에서 외가로 추정되는 광주 동각면(東角面) 창교촌(滄橋村)으로 이사를 가 그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다시 처가와 가까운 창평(昌平) 내남면(內南面) 창암촌(蒼巖村)으로 옮겨오는 바람에 그는 드디어 창평 사람이 되었다.

 

  자(字)가 언진(彦鎭)이고, 소쇄정을 짓고 스스로 호(號)를 소쇄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쇄공(瀟灑公)이나 소쇄옹(瀟灑翁)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지냈다 하여 소쇄처사(瀟灑處士) 또는 처사공(處士公)이라고도 하였다. 깨끗하다는 소쇄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 처사가 그의 뒤를 수식어처럼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김후(金珝)의 장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 ?~1527)와 결혼하였다. 소쇄원 바로 아래 광주 석저촌(石底村) 출신인 김후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호조좌랑 · 현감을 역임하였고, 11남매나 되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11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인 김윤제(金允悌 1501~72)는 문과 급제 후 나주 목사를 지냈으며 소쇄원 맞은편에 있는 환벽당(環碧堂)의 주인인데, 나이가 비슷한 양산보와 김윤제는 각별한 관계의 처남매부 사이였다 한다. 광산 김씨는 3남 1녀를 낳고 소쇄공의 나이 25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산보는 고경명(高敬命)이 ‘十年淹臥病 悠然一夕去’라고 한 것으로 보아 10여 년간 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557년(명종 12) 봄에 갑자기 그의 병이 악화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김인후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쾌유를 비는 시를 보냈으나, 소용도 없이 3월 20일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자 고경명이 제문(祭文)을 짓고, 김인후(金麟厚) · 송순(宋純) · 임억령(林億齡) · 유사(柳泗) · 양응정(梁應鼎) · 기대승(奇大升) · 고경명(高敬命) 등 명사들이 만장(挽章)을 지어 그의 가는 길을 애도하였다.

 

  그가 죽은 후 120년이 지난 뒤에야, 묘갈명(墓碣銘)을 박세채(朴世采)가 1682년(숙종 8)에, 행장(行狀)을 이민서(李敏敍)와 송시열(宋時烈)이 1678년(숙종 4)과 1684년(숙종 10)에 각각 지었다. 그가 죽은 지 300여 년 만에 그를 배향하는 사우(祠宇)인 도장사(道藏祠)가 1825년(순조 25)에 창평 사림들에 의해 소쇄원 아래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원림 뒤에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양산보 외에 이 지역 출신인 오희도(吳希道), 고부천(高傅川), 정한(鄭漢), 오이규(吳以奎), 고두강(高斗綱), 오이정(吳以井), 오대경(吳大經) 등이 배향되었지만, 1868(고종 5) 서원 훼철령(書院毁撤令) 때에 사라졌다. 그 후 재건되지 않고 유허비(遺墟碑)만 명옥헌 뒤에 서 있다.

 

 

2) 조광조 문하 입문

 

  양산보가 살았던 시기는 사림(士林)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림세력의 등장은 훈구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선비들이 대거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를 불러 일으켰다. 사화가 일어난 후에는 새로운 사회를 가로 막는 척신세력(戚臣勢力)들이 사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면 사림들은 또 다시 척신을 물리치고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복귀하였다. 사림과 훈척간의 권력 주고받기가 계속되면서 사화(크게 4회)는 그칠 줄 몰랐다. 따라서 양산보는 사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격정기’에 일생을 산 것이다.

 

  양산보가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힘쓰자, 그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한다. 그의 아버지 양사원은 그가 15살 되던 해(1517)에 그를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에게 데리고 가서 그 밑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때에 나중에 저명한 사림파가 된 성수침(成守琛) · 수종(守琮) 형제도 같이 들어와 함께 공부하며 우의를 다졌다. 이 외에 기준(奇遵 기대승의 숙부), 박소(朴紹 박세채의 고조), 정황(丁煌) · 환(煥) 형제, 이충건(李忠楗) · 문건(文楗) 형제 등 모두 29명이 조광조의 제자였다. 이들은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소쇄원가(家)’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한 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써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개혁정치를 주도하다 실패한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사상은 16세기 도학(道學)사상가들에 의해 계승 · 발전되어 나갔다. 그는 1510년(중종 5)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1515년에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라는 기관의 사지(司紙)에 임명되어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다. 그해 가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전적 · 감찰 ·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때 그는 국왕(中宗)의 신임을 받으며 왕도정치 구현을 주창하였다.

 

  또 그는 ‘신비 복위 상소(申妣復位上疏)’사건 때에는 상소를 올린 박상(朴詳) · 김정(金淨) 등의 처벌하려는 이행(李荇)을 공격하여 사직케 하였다. 1517년(중종12)에는 언관직에 있으며 향촌의 상부상조를 위해 향약을 전국에 실시하게 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때에 양산보가 조광조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 서울을 가본 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양사원이 어떤 인연으로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조광조에게 아들의 장래를 부탁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양사원의 6촌으로 능주 출신인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주목된다. 양팽손은 1510년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그와 도의(道義)로 사귀고 있던 인물이다. 아마 양사원은 양팽손을 통해 아들 양산보를 조광조에게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사원의 부탁을 받은 조광조는 흔쾌히 승낙하고 양산보에게 『小學』책을 주면서 그것부터 공부하도록 하였다 한다. 『소학』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가 어린이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저술한 책으로, 가족관계나 행동규범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리학과 함께 14세기 고려 말에 전래된 『소학』은 15세기 후반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과 함께 그 중요성이 더해졌다. 특히 조광조를 포함한 16세기 기묘사림들이 적극적으로 보급하면서 『소학』은 성리학적 이념을 확산하고 사풍(士風)을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서적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조광조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양산보에게 『소학』공부에 힘쓰도록 당부하였을 것이다. 양산보는 스승의 분부대로 『소학』공부에 힘썼고, 그것을 보고 조광조는 기뻐하였다. 양산보의 행장에 소개된 이 내용은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조광조는 양산보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입학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을 동료 선비들이 부러워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7세가 되는 1519년(중종14, 기묘년)은 그에게 희망과 좌절이 겹쳤던 한 해였다. 그것은 그의 행장(行狀)

 

  기묘년에 중종이 조광조 제자들 중에서 합격자를 뽑으려 할 때 선고관(選考官)이 이미 뽑은 급제자가 많으니 오히려 삭제해야겠다고 하여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그만 공의 이름이 삭제당하고 말았다. 중종이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며 불러 보시고 위로의 말씀을 하시면서 종이를 하사하셨다. 그 해 겨울에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 하여 그 분을 비롯하여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고 한 그대로다. 즉, 그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갈 기회를 접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않았을 뿐더러, 뒤이은 기묘사화로 아예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소쇄원사실』에 수록된 「실기(實記)」에 보다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그가 17세에 현량과에 합격했는데, 국왕이 합격자 수가 많다는 이유로 양산보를 제외하면서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종이 30권을 주니, 그는 받고 돌아와 그 종이로『주역』을 인쇄했다는 것이다. 그 『주역』책은「실기」찬술 당시 집안에 전해오고 있었다 한다.

 

  또  『제주양씨족보』에 의하면, 기묘년(1519) 봄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수가 너무 많아 탈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묘갈명』에 따르면, 친시(親試)에서「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합격했으나 대관들이 수가 많다고 삭감을 청하여 국왕이 따랐다 한다.

 

  이상의 문중 자료를 통해서 양산보가 1519년에 현량과의 합격 대상이었으나 최종 탈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실록』이나 동료들의 『문집』등 다른 자료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문중 관련 자료에만 전하는 이러한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울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자.

 

  조광조는 개혁정치 추진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인재를 정계에 등용시키기 위해 기존의 과거를 배제하고 새로운 천거제(薦擧制)를 실시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처음에는 효렴과(孝廉科)라는 것을 실시하려 하였지만, 재상층(宰相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에 새로운 방안으로 내놓은 것이 현량과다. 현량과에 대해서도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국왕이 동의하여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1518년(중종 13) 6월부터 천거가 실시되어 그해 12월까지 예조(禮曹)에 천거된 인물이 12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인원이 예조에서 걸러져 40인 정도만 의정부에 보고되었고, 의정부서 다시 걸러져 최종적으로 28인이 이듬해 4월에 선발되었다. 28인 가운데 12인은 이미 관직에 나가 있는 사람이고, 나머지 16인만이 생원 · 진사 · 유학으로 관직 진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광조의 일당이었으며, 그의 후원아래 절반가량이 홍문관(弘文館)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현량과 급제자 가운데 나이를 알 수 없는 1인을 제외한 27인을 분석해 보면, 50대가 1명, 40대가 6명, 30대가 11명으로 30대 이상이 18명이나 된다. 그리고 20대는 9명으로 그 가운데 최연소자가 25세였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35.3세나 되었다.

 

  따라서 당시 17세에 불과한 데다 관직에 진출한 적도 없었을 뿐더러, 진사 · 생원 · 성균 유생도 아닌 양산보가 아무리 조광조의 제자라 할지라도 현량과에 합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광조가 현량과를 실시한 목적이 미래의 인재를 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급제와 동시에 개혁정책을 추진할 지위에 내보낼 사람을 뽑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러므로 문중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종합해 보면, 양산보가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한 것은 사실로 보이고, 그로 인해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량과의 선발 대상으로 추천되었던 것 같다. 추천은, 13 · 15 · 17 ·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간이나 최종 단계에서 그는 적격자가 아니어 탈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조에서 1차로 천거한 120명 가운데 114명의 인명을 남긴 기록, 그리고 최종 합격자 명부 그 어디에도 양산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양산보와 현량과에 대한 문중 기록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나, 1519년 봄에 현량과에 합격했다는 일부 기록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양산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상경하여 15세에 당대 최고 개혁 정치가인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조광조 문하에서 사림파의 이념적 좌표인 도학사상(道學思想)과 절의사상(節義思想)을 배웠고, 그로 인해 17세에 현량과에 추천되어 합격 문턱까지 이르렀으나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되었다. 상경하여 당대 최고 인사로부터 수학한 후 과거를 거쳐 관직에 진출하려던 그의 꿈이 사화라는 광풍에 날아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3) 기묘사화와 낙향

 

10대 어린 나이의 양산보가 개혁세력의 일원으로 부상하여 현량과의 천거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에게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 영광도 잠시에 불과했다. 그 해 11월에 ‘己卯士禍’가 발생하여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간 후 사약을 받아 죽고, 그의 동지들마저 줄줄이 쫓겨나고 반대파들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량과 실시는 ‘위훈삭제(僞勳削除)’와 함께 조광조의 몰락을 재촉한 ‘정치적 강수’였기 때문에, 양산보 자신의 마음의 상처도 더더욱 컸을 것이다.

 

  1506년에 있었던 ‘中宗反正’이후 두각을 내던 사림파는 반정 3대신(성희안, 박원종, 유순정)들의 사망으로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1515년(중종 10)에 중용되고, 그 해에 발생한 ‘신비 복위 상소’사건 때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파는 일군의 정치세력으로 다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세력으로 재결집한 그들은 국초이래의 통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에 박차를 가했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14) 4월에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현량과라는 특별과거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을 요직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그 해 10월 25일에 이른바 ‘위훈 삭제’라 하여 ‘중종 반정’ 공신인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 연산군의 사랑을 받은 신하들이 많으므로 전면 개정하여 그들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조광조를 따르는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 · 승정원 관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정국공신 개정이 추진되는 가운데, 11월 15일에 훈구대신인 남곤(南袞) · 심정(沈貞)들의 사주에 의해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국왕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를 전라도 능성(綾城, 나중에 능주로 개명)으로 유배 보냈다가 12월에 사사시켰고, 그를 따르던 인사들을 줄줄이 유배 · 파직 · 사형시켰다.

 

  조광조 사사 이후에도 많은 인사들이 사화에 연루되어 처벌되었다. 김식(金湜)의 망명 사건과 안처겸(安處謙)의 옥사가 잇달아 발생하여 차츰 수그러들고 있던 처벌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광조 세력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도 그 입지가 극도로 좁혀지게 되었다. 개혁은 후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의 뜻을 함께하여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己卯士林 또는 己卯名賢이라 한다. 기묘사림의 숫자에 대한 기록은 사서(史書)에 따라 다양하다. 『기묘당적』에서는 93인, 『기묘보유록』에서는 129명, 『기묘제현전』에서는 220명을 각각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학포집』의 「기묘당금록」에는 131명, 『전고대방』에는 160명이 수록되어 있고,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95인 정도라는 연구도 있다.

 

  기묘사림과 이름과 행적을 열거한 이들 자료 가운데 양산보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기묘당금록」과 『전고대방』이 현재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아마 어린 나이인데다 사화 직후 낙향하여 별다른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만 그의 지인들이나 후대인들은 그를 기묘사림으로 추켜세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분명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다.

 

  기묘사림 가운데 사형이나 유배를 면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전국 각지로 낙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이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고려 말 이후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 엘리트들은 걸핏하면 벼슬을 버리고 본향(本鄕) · 처향(妻鄕) · 의향(義鄕)으로 낙향하기 일쑤였다. 그 경향은 15세기 후반 이후 구세력인 훈구파와 신세력인 사림파가 대립하여 사화가 발생하면서 더 심해졌다.  

 

  그들은 낙향하면 향리나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邑內보다는 멀리 떨어진 外村을 대부분 선택하였다. 이는 곧 그 동안 소외되어 왔던 오지벽지의 개발을 가져와 조선사회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었다. 양사원이 와서 창암촌 이라는 마을을 새로 열고, 김문발(金文發)이 석저촌에 정착하여 명성을 일군 것도 모두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재기할 내일을 기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문에 정진하고 문우들과 교류하는 안식처로 삼기 위해 풍치 좋은 곳에 별서(別墅)를 건립하였다. 별서는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본채과 약간 떨어진 곳에 몇 가지 부속시설과 조경을 갖추고 있었다. 낙향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활동공간을 일부러 조성하였던 것이다.

 

  기묘사림들도 낙향하여 별서를 건립하였지만, 그 경향이 이전보다 더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에 토대를 둔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인 도의정치(왕도정치)를 주장하다 좌절당한 그들이, 도의와 거리가 먼 훈척들이 집권하여 이권이나 챙기는 비틀린 행태를 벌리고 있는 세상을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앞을 다투어 낙향한 후 별서를 건립하여 내일을 기약하였던 것이다.

 

  기묘사림 가운데 누가 어디에 별서를 조성했는가를 『己卯錄補遺』를 통해 찾아보면 확인된다. 김안국(金安國)의 은일재(恩逸齋), 김정국(金正國)의 은휴정(恩休亭), 이자(李耔)의 과정 등이 그것이다. 『기묘록보유』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집에 별서 건립 상황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다. 기령, 학포 양팽손이 향리 능성으로 낙향한 후 학포당(學圃堂)을 지었던 것이 그것이다.

 

  기묘사화 이후 양팽손, 박상, 고운(高雲), 유성춘(柳成春), 임억령 등 호남 출신 인사들도 낙향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남 출신은 경상도나 경기도에 비해 수적으로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신진사류들이 중심을 이루며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었다. 특히 湖南士林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 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양산보도 낙향한다. 조광조가 능성현으로 유배되자 양산보는 남평(南平) 출신 이두(李杜)와 함께 스승을 모시고 남하(南下)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은 전거로 인용한 『學圃集』연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두라는 사람이 남평 출신인지 조광조 제자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양산보의 당숙뻘 되는 양팽손이 조광조와 더불어 능성으로 내려와 지내다, 사사된 조광조 시신을 수습하여 이듬해 봄에 그의 고향 용인으로 운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문인 · 자제와 함께 조광조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지냈다.

 

  따라서 양산보도 기묘사화 직후 유배지로 가는 스승을 모시고 서울을 떠나 능성으로 내려와 양팽손과 함께 받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行狀

 

  이때 선생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에 불과한 때인데 이러한 일을 당하고 보니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나 들어가서 살아야겠구나 결심하고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두문불출하며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호도 瀟灑翁이라 하였다.

 

  고 하였듯이, 고향인 지석동 창암촌으로 되돌아와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기 위해 경치 좋은 곳에 작은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스승의 사사와 동지들의 희생을 목격한 후 원통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더 이상 서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낙향과 은둔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은거를 재촉한 것은 기묘사화 이후 척신(戚臣)들의 집권이었다. 양산보는 그들을 간악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일삼는 무리들로 규정하였다. 사악한 무리란 중종 ~ 명종 대에 척신정치를 이끌었던 김안로(金安老), 문정왕후(文定王后), 이량(李樑)을 일컫는 것 같다. 이로 인해 그는 처음 가졌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행여나 벼슬 같은 것에는 꿈에도 두지 않았다 한다.

 

  기묘사화 연루자들에 대한 소통(사면 복권) 문제가 사건 직후부터 거론되었지만, 척신세력들의 반발에 부딪혀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에 권력가 김안로(1481~1537)가 실각하면서 조광조 개열의 기묘사림들이 다시 관직에 임용되기 시작하였고, 그와 더불어 조광조가 주장했던 정치이념과 시책을 부활하자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1542년에 이조판서 이언적(李彦迪)이 천거제의 부활과 기묘년 현량과 출신의 서용을 청하였고, 그 이듬해에 검토관 김인후가 경연에서 기묘사류의 신원과 함께 소학 · 향학의 장려를 주장하였던 사실이 조광조계열의 부활을 암시한 것이다.

 

  바로 이 무렵에 양산보에 대한 천거도 시도되었던 것 같다. 『묘갈명』에 따르면, 중종 말기에 임금이 인사를 추천하라는 교서를 전국에 내리니, 모든 사림들이 소쇄공을 遺逸로 천거하였다 한다. 그 가운데 창평 현령 이수(李洙)가 예부터 그를 존경하여 임금의 명령에 따르라고 권하였으니 그는 끝내 사양하였다. 이때가 1540년(중종 35)인 것 같은데, 이수는 직접 소쇄원을 방문하여 양산보에게 시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1552년(명종 7)에 양산보는 다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이때에 문정왕후 · 윤원형(尹元衡)이라는 외척세력이 권세를 누리어 척신정치가 하늘을 찌르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그가 조정에서 부른다고 관직에 나갈 리가 만무하였다.

 

  이처럼 양산보는 중종 ~ 명종 대에 여러 번 천거를 받았으나 번번이 사양하였다. “조정에서 소쇄공을 찾아가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해왔으나 세상의 폐단을 바로잡고 덕을 세우는 데에 힘쓰며 끝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았다.”는 행장 내용 그대로다. 낙향한 인사 중에는 조정의 부름에 못 이기고 다시 관직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지만, 양산보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은사(隱士)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그의 후배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인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72)이 지은 만장에서 밖으로는 하나 안으로는 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양산보는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온 후 은둔하였다. 조정에서 그에게 중종 대 말기와 명종대 초기에 관직을 제수하려 하였지만, 양산보는 당시를 도의가 서있지 않는 세상으로 여기어 극력 사양하고 도학과 절의의 실현과 연구에 정진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크게, 멀리 보는 지혜와 의지가 양산보에게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2. 양산보의 소쇄원 건립

 

1) 건립과정

 

  개혁정치와 왕도정치를 주장해온 조광조의 유배와 사사 소식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사림세력으로 하여금 삶의 공포와 어둠을 절감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조광조를 스승으로 두었던 양산보도 일단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숨어 있는 길만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능주(綾州)로 귀양 가는 스승을 따라 허둥지둥 낙향을 했지만, 선택의 갈림길에서 적지 않은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서울과 지방, 정치와 자연, 현실과 이상 속에서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번민을 늘 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뇌도 스승의 사사를 목격한 후 일단락되고 지방 - 자연 - 이상의 외길을 가겠노라고 정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에 내려온 양산보는 산수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그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였고, 자신의 호도 소쇄라 하였다. 그는 소쇄원을 지으며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한가로이 살 것을 결심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소쇄원 원림에서 평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고 밝히는 일에만 정진하다 30여 년간을 살았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인품을 고고하게 평가하도록 하고 뛰어난 선비로 추앙하게 하였을 뿐더러 수많은 명사들로 하여금 소쇄원을 명원으로 여기며 출입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소쇄원은 언제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을까? 소쇄원은 양산보의 나이 20대 전반, 즉 1520년대 중반에 별서의 부속 건물로 瀟灑亭을 지으면서 그 터가 잡히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쇄정은 조그마한 정자라 하여 小亭이라 했고, 지붕을 풀로 덮었다 하여 草亭이라 했다. 그가 처음부터 계획을 하고 지금과 같은 거대한 원림을 지으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출발은 조그마한 정자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소쇄정의 건립 시기와 관련하여 송강 정철(鄭澈 1536~93)은 「瀟灑園題草亭」이라는 시에서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웠으니, 사람이 가고 머물고 마흔 해로세.”라고 읊은 적이 있다. 이 싯귀로 보아 소쇄정이 1536년(중종 31)에 건립된 듯하나, 이는 착오임이 분명하다. 이보다 먼저 건립되어 1536년 당시에는 상당한 규모로 확충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여전히 원림(園林)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에서 ‘소쇄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림이 조성된 후에 전날을 소급하여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소쇄원의 건립 시기와 관련하여 하서 金麟厚(1510~60)의 수학 과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김인후는 17세 되는 1526년(중종 21)에 담양에 있는 송순을 찾아와 수학했고, 이듬해에는 기묘사화(1519년)로 동복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재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찾아가 뵙고 학문을 배웠다. 바로 이 무렵인 1528년에 소쇄정에 올라 대숲너머 부는 바람과 시냇가의 밝은 달을 노래한 시를 남겼다. 이로 보아 1528년 무렵에 소쇄정이 이미 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527년에 양산보의 부인 광산 김씨가 죽었다.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그가 상중(喪中)인 1528년에 건축을 착공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쇄정은 1527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소쇄정은 1519~27년 사이에, 그의 나이 17~25세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굳이 시기를 추정한다면 1519년(17세)에 낙향하여 결혼한 후 1521년(19세)에 큰 아들 자홍을 낳은 다음, 20세를 넘기고 1520년대 중반에 첫 삽을 뜨지 않았을까 한다. 어떠하든 간에 상당히 젊은 나이에 소쇄정을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면앙정 宋純(1493~1582)이 1534년(중종 29)에 소쇄정에 와서 「외종 동생인 양언진의 소쇄정에서」라는 제목의 4편시를 지어 양산보에게 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해에 송순의 인척인 지지당 송흠(宋欽 1459~1547)이 노모 봉양을 위해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왔는데, 당시 송순은 1533년부터 김안로가 권세를 부리자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는 이 시에서 ‘세상 일 때문에 좋은 약속 어기어 봄을 지내서야 비로소 문을 두들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 양산보가 이미 소쇄정을 지어놓고 송순을 초청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소각(小閣), 정자(亭子), 소교(小橋), 연못, 오동나무, 매화, 대나무, 싸립문, 담장 등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1534년 당시 소쇄정은 상당히 확장되어 있었던 것 같다. 공간은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원림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40년대에 이르면 소쇄정은 더욱 확장되어 명실상부한 원림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송순의 연보(年譜)에 따르면, 김안로 죽음(1537년)후 다시 관직에 나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1542년(중종 37)에 외제(外弟)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는 일을 그가 도와주었다 한다. 송순이 관찰사로서 소쇄원의 증축에 소요되는 재물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소쇄정은 조그마한 정자 수준을 넘어 지금과 같은 거대한 원림 수준으로 대거 정비 ·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소쇄원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송순이 전라 감사 재임 중 창평을 순찰하면서 지은 ‘소쇄원에서 가랑비 속에 매화를 찾아보다.’라는 시에서 소쇄원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1548년에 김인후가 양산보에게 보낸 두 편의 시에서도 소쇄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소쇄원이라는 명칭은 공간의 확장과 함께 154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소쇄원의 출발점이 된 소쇄정이라는 작은 초가 정자는 낙향한 지 수년 지난 1520년대 중반, 양산보의 나이 20대 초반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렇게 보면 소쇄원 일원에 있는 유명 정자들, 즉 송순의 면앙정(俛仰亭 1533년), 조여충(曹如忠)의 관수정(觀水亭 1544년), 김윤제의 환벽당(環碧堂 1555?), 김성원(金成遠)의 식영정(息影亭 1560년), 정철의 송강정(松江亭 1585년)보다 소쇄원은 앞서 등장한 셈이다. 어린 나이와 열악한 경제력 및 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정자들보다 앞서 소쇄원을 건립했다는 사실은 양산보의 인생철학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여러 건물과 다양한 조경을 겸비한 원림 수준은 1530년대에 본격적으로 착공되어, 그가 40세 되는 무렵인 1542년경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소쇄원의 완공은 무려 20년 가까이 진행된 대역사였다. 소쇄원이 양산보의 나이 40대, 즉 1540년대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최경창(崔慶昌 1539~83)이 양산보를 노선생(老先生)으로 칭하면서 올린 시에 따르면, “늙으막에 소쇄원을 이룩하셨으니 만사를 모두 잊고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십시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렵이 기묘사림의 재기용이 추진된 시기인데, 이때 양산보는 관직 추천을 사양하고 소쇄원 증축에 열을 올렸던 것 같다. 따라서 소쇄원의 완공은 그가 더 이상 바깥에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서 김인후가 1548년경에 지은「소쇄원48영」이라는 시는 일종의 소쇄원 완공 기념사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쇄원은 완공 후 양산보의 원림이라 하여 梁園이라고 불리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山居를 하면서 자신의 은거지, 강학지, 거주지를 기념하고자 회화의 형태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것을 『山居圖』라 하는데, 문인화의 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다라 별서를 화폭에 담은 『別墅圖』, 제택을 화폭엔 담은『第宅圖』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소쇄원의 『별서도』는 그려진 적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18세기 영조 때에 제작된 『소쇄원도』라는 판화가 『별서도』에 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쇄원도』를 보면, 소쇄원의 구조물과 조경시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2) 한국의 명원 소쇄원

 

  소쇄원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지석 123번지에 있다. 당시의 주소는 전라도 창평현 내남면 지석리다. 조선시대에 昌平은 유명 인사를 다수 배출한 독립 고을이었지만, 일제시대인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담양에 합속되었기 때문에, 현재 소쇄원은 담양 소속인 것이다.

 

  소쇄원은 16세기 전반에 전라도 창평 출신의 양산보라는 선비가 본인의 활동처로 건립한 별서다. 소쇄원의 등장 전후에 전국의 경치 좋은 곳에 堂, 軒, 亭, 園등으로 명명되는 별서가 대거 등장하였다. 그들 가운데 소쇄원은 이미 당대에도 유명하여 여러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아낌없는 찬사를 얻기도 하였다.

 

  소쇄원은 별서 가운데 최상급이었다. 별서의 이상적 공간 구성을 소쇄원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갖추었다. 부속 건물로 소쇄원은 제월당과 광풍각 그리고 초정을 갖추었다. 최상급 별서는 안채와 사랑채를 지니어 그것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소쇄원의 높은 이름은 당시 유명 인사들이 대거 출입하였던 사실만으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전국적 명성을 날린 송순, 김인후, 임억령, 정철, 고경명 등 호남 출신 명사들이 소쇄원을 적지 않게 출입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관찰사, 주변 고을의 수령들이 소쇄원을 방문한 적도 횟수를 열거하기가 번잡할 정도다. 가량, 1562년(명종 17)에 전라 감사에 재임 중인 尹仁恕가 소쇄원을 방문하여 시를 남겼다. 이 이전에 송순도 전라 감사로 창평을 순찰할 때에 소쇄원에 들린 적이 있다.

 

  또 당시 소쇄원을 방문했던 인사들의 평가를 보아도 소쇄원의 이름값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지석동에서 ‘소쇄원가(家)’와 함께 살고 있는 경주 정씨 출신 정지유(鄭之游)가 남긴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를 보면, 풍월(風月)의 아름다움과 천석(泉石)의 기괴함 때문에 소쇄원을 남도 제일의 유명한 곳이라 하였다. 송순도 소쇄원을 환벽당 · 식영정과 함께 이곳의 명승지로 꼽았다.

 

  고경명이 친구인 양자정(梁子渟 양산보의 셋째아들)에게 준 시에도 소쇄원은 ‘지석명원(支石名園)’, 즉 지석동의 명원으로 표현되어 있다. 양천운(梁千運 양산보의 손자)의 친구 나주 출신 김선(金璇 1568~1642)이 석보촌(石保村)을 회상하며 지은 시에서 梁園(양산보의 소쇄원)과 金亭(김성원의 식영정)은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하였다.

 

  소쇄원의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제법 오르내렸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창평 고지도에 소쇄원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도 소쇄원의 명성을 입증할 수 있다. 18세기 영조 대에 발간된 『輿地圖書』『海東地圖』에 수록된 창평 지도에 소쇄원은 식영정 · 삼우헌(三友軒)과 함께 그 이름과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고종 대의 창평 지도에도 소쇄원은 식영정 · 학구당(學求堂)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많았던 별서 가운데 대부분은 사라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것 중에서 소쇄원은 규모와 수준면에서 단연 손꼽을 정도다. 단일 건물에 간단한 조경만 조성된 여타 별사와는 달리 소쇄원은 여러 채의 건물과 자연 만상이 깃든 조경이 수반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보는 이의 감정을 압도하여 발길을 붙잡아, 사람들은 소쇄원을 한국의 대표적인 별서 정원으로 입을 모아 꼽는다.

 

  왜 사람들은 소쇄원을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을까?

소쇄원의 경치는 철따라 피는 각종 화초,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 대나무 숲속의 오솔길, 각종 새와 동물 등으로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한 유형물들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상쾌한 바람, 그윽한 향기, 시원한 그늘, 따스한 햇살 등의 무형물과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신선 세계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소쇄원은 이 지역의 많은 인사들이 절의를 다딤하거나 풍류를 즐기고, 시서를 지으며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서하당 김성원, 옥봉 백광훈, 제봉 고경명이 소쇄원을 출입한 대표적 인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이거나 성리학자 또는 문필가로서, 소쇄원을 건립한 양산보 및 그 후손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소쇄원을 출입하였다. 소쇄원에서 이들은 문학 창작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논하면서 시대를 고민하고 미래를 설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쇄원 사람’들은 물론이고 소소원에 모여든 사람들은 사림파의 시대적 좌표였던 도학사상 왕도정치를 실천하기 이해 불의와 타협하기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인배’로 여겨지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공격을 감행하여 뜻하지 않은 희생을 겪었다.[기축옥사] 또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몸을 사리 않고 구국 대열에 뛰어 들기도 하였다[의병]. 이런 일로 인해 촉망받는 인사들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지역 인재의 고갈이라는 부작용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소쇄원 사람’들과 그 지인들이 문학에 전념했다면, 이러한 일을 기대하기가 애초부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이렇듯 소쇄원에는 자연의 운치와 선비들의 채취가 조화를 유지하며 서려있다. 소쇄원과 그 주변에는 자연과 인공, 현세와 내세, 현실과 이상이 함께 숨쉬고 있으며, 그 속에 우아한 풍류가 감돌고, 올곧은 절의가 서려있고, 고요한 시정이 베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소쇄원을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 소쇄원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 15대손 옮김

출처 : 남도답사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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