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강나루터 2021. 10. 2. 06:16

선(朝鮮)의 큰 선비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영남의 명문 반남박씨가에서 태어 나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중종 12)∼1586(선조 19)> 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이다. 박형(朴珩)의 아들로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만일(萬鎰)의 따님이다. 선생은 1517년(중종 12) 영천군(榮川郡) 두서리(杜西里, 斗西里)에서 7남중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 고려초 반남현(潘南縣)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를 중시조로 한다. 7대조는 고려 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수(朴秀)이며, 6대조는 공민왕대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여말 선초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활약했던 박상충(朴尙衷)이다.

조선에 들어와 5대조 박은(朴訔)이 개국초 왕자의 난때 태종을 보필한 공로로 좌명공신에 오르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집안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조부 박규(朴葵)는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황해도·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조부 박병균(朴秉鈞)은 사온서령(司醞署令)에 올랐다. 조부 박숙은 충의위(忠義衛)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는데, 서울에서 안동(安東)의 가구촌(柯丘村)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아버지 박형이 성균 진사로 안동을 떠나 이곳 영천(榮川, 영주)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그로부터 영주에서 살면서 대대로 영남의 명문가로 살아오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첫 수학을 하다.

 

 

소고 선생에게 처음으로 학문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조부 박숙과 아버지 박형, 그리고 어머니 예안 김씨였다. 특히 어머니 김씨에게 『효경』을 배웠던 그는 6세가 되던 해에 이미 요(堯)·순(舜) 임금의 아들 주(朱)·균(均)의 고사를 논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신체의 소중함을 언급하는 등 어버이를 섬기는 지극한 도리에 대하여 깨달은 바 있었다.

또한 7세 무렵에 조부와 부친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고, 9세 때에는 복희(伏羲)의 팔괘(八卦)를 배운 뒤 홀로 후미진 곳에 들어앉아 직접 64괘와 효사(爻辭)를 그리며 음양 변화의 오묘한 이치를 체득하기 시작하였다.

박승임은 12세 무렵부터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읽기 시작하여 남다른 학문과 문장을 성취하게 되었는데, 이에 14세에 향시(鄕試)에 응시하려 하였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15세에는 『서전(書傳)』을 읽었고, 16세부터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저술을 독파하며 도학(道學)의 정수를 깨우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벽에는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을 붙여놓고서 마음의 성찰(省察)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엄격하고 뛰어난 어머니, 예안(선성) 김씨.

 

 

소고 선생의 어머니는 당시 영천(영주)의 명문 가문이었던 예안(선성)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이다. 예안 김씨는 자식을 교육함에 항상 올바름을 다하게하고 의관이 반듯하지 못하거나 말씨가 불소한 경우 엄하게 꾸짖어 법도를 따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학식이 깊어서『천자문(千字文)』과『효경(孝經)』을 입으로 외워서 가르쳤고, 밤에 누워서도 그치지 않았으므로, 소고 선생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일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식들이 조금 자란 뒤에 공부를 소홀히 할까 두려워하여 늘 감독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처신을 올바로 하고 주색을 멀리 하라고 늘 간절히 훈계하던 엄한 어머니였다. 소고 선생은 이러한 어머니의 엄한 훈육속에서 자라 세상에 큰 빛을 남기게 되었다.

소고 선생은 7형제 가운데 6남이었는데, 맏형 박승문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둘째형 박승건은 생원(生員)이었다. 셋째형 인암(忍菴) 박승간은 1600년(선조 33) 박승임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예문관 그리고 사간원 등 주요 관직에 올랐다. 넷째형 박승준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는 박승임에게 삼종형(三從兄)의 관계였다.

소고 선생은 부인인 예천 권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박어(朴漁)는 요절하였고, 2남 박록(朴漉)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3남 박조(朴澡)는 진사였는데, 소고 선생보다 1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 사위는 충의위(忠義衛) 이복원(李復元)이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다.

 

 

1537년(중종 32) 21세에 선생은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특히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그리고 주자서(朱子書)의 학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때마다 의심 가는 곳이 있으면 빠짐없이 기록하여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또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등 인근의 이름난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시세(時勢)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1540년(중종 35)에 관직에 나간 뒤 서울에 머물던 선생은 을사사화 직후인 1547년(명종 2)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선생을 모시고, 『의례(儀禮)』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독하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때 퇴계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다.

 

 

소고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였으며 도량이 중후하여 사람들로부터 크게 촉망받았다.

어린 시절 놀이를 할 때에도 이미 대인(大人)의 기상을 지녔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크게 촉망받았다.

선생은 20세가 되던 1536년(중종 31) 예천권씨(醴泉權氏) 집안 졸헌(拙軒) 권오기(權五紀)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4년 뒤인 1540년(중종 35)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 때 셋째형 박승간(朴承侃)을 비롯하여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일계(逸溪) 채무일(蔡無逸), 입암(立巖) 유중영(柳仲郢) 등 인근의 뛰어난 학자들 역시 함께 급제하여 박승임과 동방(同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예문관 검열과 승정원 주서를 거쳐 홍문관 정자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1544년(중종 39)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홍섬(洪暹)·정유길(鄭惟吉)·유희춘(柳希春)·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함께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의 영예를 누렸다. 그후 소고 선생은 내관직으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조 좌랑(吏曹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예조 정랑(禮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병조 참지(兵曹參知), 병조 참의(兵曹參議),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병조 참의(兵曹參議), 공조 참의(工曹參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또한 외관직으로 현풍 현감(玄風縣監), 풍기 군수(豊基郡守), 진주 목사(晉州牧使),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강화 부사(江華府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춘천 부사(春川府使), 창원 부사(昌原府使)를 지냈다.

 

 

 

 

고향 영주에서 절의를 지키다.

 

 

소고 선생은 1545년 인종 즉위 직후 홍문관 박사·수찬 및 이조 좌랑 등의 요직에 올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계(啓)를 올리는 등 사림의 일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관장하는 홍문관 교리와 시강원 문학을 역임하였고, 다시 이조 좌랑을 비롯하여 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응교 등 이조(吏曹)와 관각(館閣)의 주요 관직들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1547년(명종 2)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인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충재(冲載) 권벌(權橃)이 유배를 가게 되자,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권간(權奸)들을 비난하는 시를 지어 그들을 송별한 뒤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인 영천(영주)로 내려온 그는 4년 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승인 퇴계를 모시고 단양(丹陽) 등지를 유람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을 기울이다가 은거 4년만인 1551년(명종 6) 현풍 현감으로 부임하여 고을 유생들을 모아 향약(鄕約)을 실시하고 향교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는 등 백성들의 교화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려 하기도 하였다.

1557년(명종 12)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직강과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지만, 그는 국정을 농단하던 윤원형의 전횡을 꺼려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 채 고향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1558년(명종 13) 풍기 군수에 제수된 박승임은 기쁜 마음으로 풍기에 부임하여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해 주어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자주 들러 유생들과 강학하며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영정을 새로 제작하는 등 치적을 남기고 5년 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며 취향정(翠香亭)과 동리서재(東里書齋)·소고대(嘯皐臺) 등을 짓고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다시 조정에 나아 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윤원형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선생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지만,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고,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곧 조정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에 올라 임금의 근신으로 활약하였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박승임은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한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에 어사(御史) 정이주(鄭以周)는 선생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계를 올렸고, 선조는 소고 선생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그는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선생이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이후 선생은 춘천 부사와 병조 참의·공조 참의 등의 요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당시 서인의 영수이던 박순(朴淳)과 이이(李珥)의 당론을 비난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이듬해 병을 얻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회헌 안향의 영정을 개수하다.

 

 

선생은 42세에 풍기 군수로 보임하여 회헌 안향의 영정을 봉심한 뒤 그 훼손 정도가 심함을 보고 다시 그리는 일을 추진하여 이듬해 화원인 이불해(李不害)를 초빙해 그 일을 완성했다. 이것은 회헌선생화상개수지(晦軒先生畵像改修識 문집 권3)라는 글로 남아 있다.

그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어 훼손 정도가 심한 영정 개수를 좌의정 안현(安玹, 1501-1560)에게 알리고 예조판서 홍섬의 지지를 받아 이듬해(1559년) 10월에 그 일을 완결지었다. 안현은 이보다 앞선 명종6년에 대사헌으로서 소고에 대해 권벌과 교분이 두터워 물의를 일으켰으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새로 영정을 그린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불해(李不害)였으며 묘우에 영정이 봉안 된 16년 뒤의 일이었다. 주세붕이 처음으로 문성공 사당에 영정을 봉안할 당시로부터 이미 225년이 경과했고 소고가 풍기군수로 묘우에 들어가 영정을 보았을 때는 241년이 넘은 때였다.

소고는 이를 “사당에 유상을 걸어 두었는데 우러러 경의를 표했다. 다만 그 그림 족자는 세월이 오래되어 뜯어지고 헐어 아주 없어질 지경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자신만의 판단이 아니라 전임 군수인 장문보(張文輔) 역시 문제라고 느껴 다시 그리는 일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는 좌의정 안현과 그의 아우로 영주군수 직에 있던 안상, 찬성 심통원(沈通源)이었다. 이때 당초 그렸던 1본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그렸고, 원본과 처음 그린 본은 함께 궤에 넣어 사당 안에 보관했다. 소고 당시에 영정은 모두 3본으로 1본은 고려 시대 작품, 1본은 처음 그려 잘못된 작품, 1본은 새로 그려 묘우에 정식으로 게시한 작품으로 정리할 수 있다.

 

 

 

『주역』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소고는 특히 『주역』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겨를이 있을 때면 두문불출하고 손님을 사양한 뒤 해가 다하도록 『주역』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며칠이고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생각하였다.

퇴계에게 『주역』의 괘상(卦象)과 효사, 하도(河圖)·낙서(洛書)의 수에 대하여 상세한 가르침을 받았고, 제자들이 이황이 남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가져와 질문하면 명쾌하게 풀이해주어 비록 처음 배우는 자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1556년(명종 11)에는 『천문도(天文圖)』를 저술하였고, 이듬해에는 제자들과 함께 주자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하는 등, 16세기 영남 사림의 역학사상(易學思想)을 주도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만년 이후 김륵(金玏)·임흘(任屹)·김개국(金蓋國)·권문해(權文海)·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김중청(金中清) 등 영천 지역의 여러 인재들을 키워냈다.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다.

 

 

소고는 문집인 『소고집』 이외에도, 『성리유선(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綱目心法)』·『사례변해(四禮辨解)』·『의례강록(儀禮講錄)』 등 5종의 저술을 더 남겼다. 이들 저술들은 퇴계의 성리설(性理說)을 이어받아 심학(心學)의 측면을 강조하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계승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저술을 통하여 예안(禮安) 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의 학풍이 영천으로 전수되던 과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퇴계와 예서(禮書)를 강론하며 주고받은 질의의 내용을 정리한 『사례변해』와 『의례강록』은 16세기 퇴계 학파의 예학사상(禮學思想)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서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소고집』을 남기다.

 

 

소고 선생의 문집인 『소고집』은 1600년(선조 33) 영천(영주)의 이산서원(伊山書院)에서 편찬·간행한 원집(原集) 4권과 1782년(정조 6) 후손 박희천(朴希天)이 이상정(李象靖)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속집(續集) 4권 및 부록(附錄) 2권 등 합 10권 5책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소고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박조가 퇴계와 왕복한 편지를 비롯한 유문(遺文)을 모아두었는데 그의 후손에 이르러 이를 모두 잃어버려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1600년 5월 무렵 문인인 김륵·오운·배응경 등이 흩어진 저술들을 수습하여 이산서원에 모여 4권 2책으로 묶어 교정한 뒤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소고의 6대손 박희천은 1780년(정조 4) 원집에서 삭제된 저술들을 모아 4권으로 편집하고 행장(行狀)을 비롯한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부록 2권으로 삼은 뒤 원집에 덧붙여 총 10권 5책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4권으로 이루어진 원집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권1에는 「질석부(叱石賦)」를 비롯한 4편의 부(賦) 및 「송주첨정경유선생출수기성(送周僉正景遊先生出守基城)」 등 시(詩) 70수, 권2에는 「수홍종백(酬洪宗百)」 등 시 169수, 권3에는 풍요선서(風騷選序) 등 서(序) 2편, 「존요집발(尊堯集跋)」 등 발(跋) 1편, 「강계부회재선생사당기(江界府晦齋先生祠堂記) 등 기(記) 2편, 「상좌상안현서(上左相安玹書)」 등 서(書) 4편, 「대인청립정산서원문(代人請立鼎山書院文)」 등 잡저(雜著) 8편, 「친제사직기우문(親祭社稷祈雨文)」 등 제문(祭文) 6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4에는 6대조 박상충을 비롯한 13인의 묘도문자(墓道文字)가 실려 있다.

속집의 경우 책머리에는 이상정이 찬술한 서문이 있다. 권1에는 「무극부(無極賦)」 등 부 2편과 시 116수, 권2에는 시 46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권3에는 「청두십점소(請杜十漸疏)」 등 소차(疏箚) 4편, 권4에는 「청삭을사훈적계(請削乙巳勳籍啓)」 등 계(啓) 5편, 권5에는 「답김희옥서(答金希玉書)」 등 서(書) 14편, 「천도지리인사(天道地理人事)」 등 책제(策題) 2편, 「수계회화서(修禊會話序)」 등 서(序) 1편, 「금천부원군평도공정안제후지(錦川府院君平度公政案題後誌)」 등 발 2편, 「우산잠(牛山箴)」 등 잠(箴) 1편, 「왕대비전상존호옥책문(王大妃殿上尊號玉冊文)」 등 옥책문(玉冊文) 1편, 「하세자길례전(賀世子吉禮箋)」 등 전(箋) 6편, 「친제기우문(親祭祈雨文)」 등 제문 13편, 「참봉이군묘지(參奉李君墓誌)」 등 묘지(墓誌) 1편이 수록되어 있다.

후인들이 박승임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한 글들을 모은 부록의 상권에는 제자 임흘과 김중청이 지은 행장 2편 및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갈명이 있고, 하권에는 제문 5편, 만사(輓詞) 3편, 봉안문(奉安文) 1편, 이황이 박승임에게 보냈던 시와 편지글 각 1편, 벗들과 수창한 시들을 모은 「응석사창수운(凝石寺唱酬韻)」 등 시 34수, 그리고 박승임과 관련된 일화들을 모아 엮은 기문록(記聞錄) 등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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