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소암 현중화는 누구?

강나루터 2021. 10. 24. 08:11

○소암 현중화는 누구?

 

서예가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1907∼1997) 선생은 제주에서 활동한 지방 작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1950~ 60년대 국전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79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근 20년 간 고향 제주를 떠나지 않고 자연과 술을 벗해 글씨만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손재형 김충현 유희강 등과 함께 한국근현대서단을 이끈 '거장'으로 평가된다. 한ㆍ중ㆍ일 현대 서예의 큰 흐름이 된 중국의 육조 해서를 일본에서 익혀 1950년대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이뤘다.

 

그는 모든 서체에 능했다. 30·40대 ‘일본시기’에 체득한 육조해를 50·60대 ‘국전시기’에 행초서로 재해석해 한국서단 ‘이채(異彩)’로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열었다. 이를 토대로 70· 80대 절정기인 ‘서귀소옹시기’를 맞아 야취(野趣)와 고전미가 물씬한, 가히 ‘소암체’(행초서)를 완성했다. 소암체는 한자 한글을 한 가지 필법으로 따로 또 같이 노래하듯 구사한다. 운필·용묵·점획·결구·장법 등 조형측면에서 음양의 조화가 탁월하고, 미학적으론 비속과 환속을 넘나드는 정신세계의 경계까지 이끈다는 평가다.


말년에는 꼬냑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을 만큼 취필을 즐겼는데, 거침없이 붓을 달린 글씨가 가히 속세를 벗어난 듯한 경지에 이르렀다. 예컨대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 <장진주사(將進酒辭)>, 도연명의 <음주> 시, 술이 모자란다는 뜻의 <주부족(酒不足)> 등의 글씨는 취선(醉仙)의 것이라는 평이다.

 

 <도잠(陶潛) 「음주(飮酒) 5」> 부분, 1992년, 30.5×22.4cm, 종이에 먹, ≪소암취서(素菴醉書)≫ 개인소장

 

 

 약력


§1907년 서귀포시 법환동 출생


§1955년 일본유학서 귀국 후 제주사범대학과 서귀포중학교 등에 재직


§1957년 국전입선


§1959년 추천작가


§1966년 개인전(목포·제주·서귀포·여수·마산·부산)


§1969년 초대작가, 심사위원, 제주도문화상 수상


§1973년 제주소묵회(濟州素墨會) 창립. 후진지도


§1982년 중국 서예계 순방


§1983년 대만 국립역사박물관 초대전


§1991년 서귀포시민상(예술부문)


§1992년 예술의전당 주최 개인전


§1995년 서귀포 조범산방에 칩거


§1997년 광주광역시 주관의 의재허백련 미술상 수상


§1997년 별세


 

 

 

 

 

 

 

 

 

 

 

 * 자연은 모든 예술의 본(本)이다 - 소암 현중화 (素菴 玄中和) (1907~1997)

 

 소암 현중화 (素菴 玄中和) 모

 

소암은 1907년 제주도 서귀포 법환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소암(素菴), 녹담(鹿潭), 소암우인(素菴迂人) 등이다. 1940년 30세 때 일본 서도의 대가 마스모토 호우수이 선생에게 3년간 사사했고 육서체를 익혔다.그 후 일본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며 서예가의 입지를 다졌다. 45세 때인 1955년 제주사범학교에서 교사를 시작, 제주대학교에서 논리학 강사를 역임하는 등 교편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도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특히 소암은  전예(篆隸) 해서(楷書) 행초서(行艸書) 파체서(破體書) 등 모든 종류의 서체를 독특하게 구사한 것이다.

 

국내에서 이름을 알린 계기는 51세가 되던 해인 1957년 국전에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을 처녀 출품, 입선하면서부터이다. 2년 뒤에는 국전 추천작가가,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후 국전초대작가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대가로서 인정을 받았고, 한국 서예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1968년 62세때인 제17회 국전 추천작가로 <삼일포(三日浦)>를 출품한 적이 있다.

 

작고한지 11년만인 2008년 10월에 서귀포에 <소암기념관>이 개관하면서 전국에 몇 안되는 서예 박물관으로 건립된 것이다. 이곳은 소암의 거처를 품고 있어 전시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실이 같이 포함되고 있다. 마치 방 주인이 잠시 외출을 떠난 것처럼 소암이 머물던 [조범산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방에 놓인 생전의 연습지를 본다면 이른바 '소암체'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전에 대한 쉼이 없는 천착(穿鑿)과 연습은 소암 서예세계의 밑바탕을 이룬다. 글씨가 마르면 다시 그 위에 글씨를 써나간 탓에 먹판이 되어버린 화선지는 흡사 추상화처럼 보인다. 소암은 그렇게 연습지가 수북이 쌓이면 그걸 들고나가 태우곤 했다.

 

近來傳得安心法 萬壑松風枕上聞   근래전득안심법 만학송풍침상문

(근래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을 터득했더니 온갖 골짜기 바람이 베개 위로 들려오네).

 

소암이 써놓은 글귀중 하나다. 기념관엔 소암의 어록이 붙어있다. "自然은 모든 藝術의 本이다. 그것은 자연 자체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하고 다층적인 의미체이기 때문이다." "서예엔 스승도 제자도 없다. 글씨 공부보다 마음 공부에 힘써라." 평소 제자들에게 들려줬던 말이다.

 

 

 

삼일포중 구월추 (三日浦中 九月秋)   삼일포에 들어 구월의 가을을 맞으면

녹파홍엽 회생수 (綠波紅葉 廻生愁)   푸른파도와 붉은단풍이 예를 생각나게 하네

 

? 삼일포(三日浦) 에 대하여

 

    김홍도의 삼일포

 

삼일포는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 리(里)인데 온정리에서 동남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포구(浦口) 이름인데, 동학(洞壑)이 맑고 그윽하며, 소나무와 돌이 기괴하고 예스러우며, 호수 가운데에는 소가 누운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고 하는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섬이 떠있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의 술랑(述郞),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 등 사선(四仙)이 이 바위에서 노닐며 3일 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이렇게 일컫는다고 한다. 그리고 물 남쪽에는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봉우리의 북쪽 절벽의 석면(石面)에는 붉은 글씨로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 여섯 글자가 신라시대로 부터 쓰여 있다. 봉래대 위에서는 삼일포 전경을 볼 수 있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객들은 아름다운 삼일포에 대하여 시문을 지었다.  

 

삼일포 둘레는 약 8Km, 깊이는 9~13m. 호수의 길이는 1.8km이고 너비는 최대 0.9km이며 수면 높이는 바다와 같다. 호수주변에는 장군대를 비롯하여 36개의 봉우리가 있고 호수가운데 와우도가 늘 푸른 청암으로 되어 있으며, 단서암, 사선정, 무선대, 매향비 등 하얀 바위섬이 마치 수석같은 사랑스러움을 자아낸다.

 

예로부터 삼일포는 <관동팔경>의 하나인데 강원도의 해안을 따라 자리잡은 8개의 경치 좋은 곳으로서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대,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명품 수석을 방불한 하이얀 바위들은 서로를 뽐내어 별구(別區)를 이루니 수석의 미(美)로는 금강에서 으뜸이고 호수풍경으로서는 전국적으로 으뜸가는 것으로 일러 왔다.

 

삼일포는 남북으로 약간 길게 놓인 아름다운 해안만이였던 것이 동해의 륭기와 함께 모래가 쌓이면서 물길이 메워져 이루어진 바다자리 호수이다. 그후 금천의 물이 흘러들어감으로써 민물호수로 되었다. 북한은 이 호수를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21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해금강의 일부가 보인다.

 

-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중 삼일포(三日浦) - 남효온(南孝溫) 1454-1492

 

갑신일에 태수 조공이 유양양을 위해 삼일포(三日浦)의 놀이를 하게 되어 나도 따라갔다. 삼일포는 신라 시대에 화랑(花郞) 안상(安祥)ㆍ영랑(永郞)의 무리가 와서 3일 동안을 놀고 파했다. 그래서 이름이 되었다. 포구의 암벽(巖壁) 사이에 단서(丹書) 여섯 글자가 있는데,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라고 한다. 수면(水面)에서 4ㆍ5리를 가면 돌섬 하나가 있고, 낙락장송이 두어 그루가 있으므로 이름을 송도(松島)라 하고, 동남의 모퉁이에서 바라보면 돌이 거북 모양과 같으므로 귀암(龜岩)이라 하고, 귀암의 뒤에 하얀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름을 설암(雪巖)이라 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터가 있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나는 훈도(訓導) 전대륜(全大倫) 및 유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정박하였다가 또 배를 노질하여 단서(丹書)가 있는 암벽(巖壁) 아래 당도하니, 과연 여섯 글자가 있어,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 하였는데, 그 글자가 돌에 심한 공격을 받았다. 전대륜은 말하기를, “옛날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는데, 손이 이 고을에 오게 되면 반드시 단서를 보고자 하는 고로, 태수가 그 비용을 대어 주기 싫어서 쳐부숴버리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 글자가 획이 인멸되지 않아서 해독할 수 있다. 나는 그 글의 뜻을 물으니 대륜은 말하기를,

 

 

- 임하필기(林下筆記)제13권 중 삼일포(三日浦) -이유원(李裕元 : 1814~88)

 

“영랑(永郞)이란, 신라 사선(四仙)의 하나요, 남석(南石)은 이 돌을 지적한 것이요, 행(行)이란 돌 위로 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이 돌이 고성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에서 보면 동북간에 있고, 동해 바다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데, 그 ‘남석’이라 칭한 것은 더욱 해득할 수가 없고, 또 여섯 글자가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 문리(文理)가 대단히 소략(疎略)하여 아희들의 솜씨와 같으니, 옛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하는 아희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곧 수랑의 무리 가운데 남석행(南石行)이란 성명을 가진 자가 제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배를 멈추고 돌 위에 오르니, 그 정상(頂上)에 미륵불(彌勒佛)을 위한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운 것이다.

 

[사선(四仙]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의 화랑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이다. 이들은 당시 전국의 명승, 특히 금강산 일대의 경관을 유상(遊賞)하면서 심신을 수련하고 도의(道義)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여 각처에 그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이들은 자주 후대 문인들의 추념(追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도 이들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단서(丹書]로 쓴 여덟 글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45 고성(高城)에 실린 안축(安軸)의 기문에는 “봉우리의 북쪽 벼랑 벽에 단서 여섯 글자가 있으니, ‘영랑도남석행’이라는 것이다. 작은 섬에는 정자가 없었는데…[峯之北崖石面 有丹書六字 曰永郞徒南石行 小島古無亭]"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

'서예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엄 일승 법계도  (0) 2021.12.25
서도(書道) 신품사현(神品四賢) 탄연국사(坦然國師) |  (0) 2021.12.09
천자문 병풍  (0) 2021.10.20
한국 서예가 화가  (0) 2021.10.15
가련청총매향골(可憐靑冢埋香骨)  (0) 2021.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