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도(書道) 신품사현(神品四賢) 탄연국사(坦然國師)| 논문 관련-저작
서도(書道) 신품사현(神品四賢) 탄연국사(坦然國師) 고려(高麗) 중기(中期) 새나라의 문화가 한창 무르익을 문종(文宗) 24년에 태어나 의종(毅宗)때까지 90세의 고령으로 고려의 왕사(王師)를 지내신 탄연(坦然)국사는 밀양손씨(密陽孫氏)로 밀양의 교위(校尉) 휘 숙(肅)의 아드님이시다.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를 통달하고 1085년(神宗) 2년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번저(藩邸)에 있던 숙종(肅宗)의 초청으로 세자를 보도(輔導)하다가 1088년 궁중에서 몰래 경북산 안적사(安寂寺)로 출가하였다. 그뒤 광명사(廣明寺)의 혜조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심요(心要)를 전수받고 다시 총림(叢林)을 두루 방문하며 증득(證得)한 바를 단련하였는데 모든 학자들이 그를 경모하였다. 뒤에 늙은 어머니 때문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외산(外山)에 조그만 절을 구하여 봉양하였다. 1104년(숙종 9년)에 대선(大選)에 합격하여 왕명에 따라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 주지가 되었고 1106년(예종1년)에는 대사(大師), 1109년에는 중대사(重大師), 1115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1117년 선암사(禪岩寺)에 머물렀다. 1121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1123년(인종 1년)에 인종(仁宗)에게서 첨수가사(添繡袈裟)를 하사받았으며 1129년 보리연사(菩提淵寺)의 주지가 되어 법회(法會)를 개설하였다. 보리연사에는 뱀이 많아서 다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가 법회를 열고난 후로부터는 뱀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132년 대선사(大禪師)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였고 1146년에 왕사(王師)가 되었다. 1148년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가 은퇴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선교(禪敎)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때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黨語句)를 지어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보냈더니 개심은 대단한 찬탄과 함께 의발(衣鉢)을 법(法)의 증표로 보냈다. 1159년 제자들을 불러서 “내가 가는 곳은 내가 벌써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당초에 세속의 본을 떠서 소기(小忌) 대기(大忌)를 지내지 말고 사십구재(四十九齋) 백일재 명재(明齋)도 지내지 말고 오직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남긴 뒤 입적(入寂)하였다. 특별히 서예(書藝)에 뛰어나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따랐는데 서도신품사현(書道神品四賢)이라 부르는 김생(金生) 최우(崔瑀) 유신(柳伸)과 함께 당대의 명필(名筆)이었다. 춘천 청평사(淸平寺) 문수원(文殊院)의 중수비와 예천(醴泉)의 복룡사(伏龍寺)비 삼각산(三角山) 승가사(僧伽寺) 중수비등을 썼으며 경북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의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문강공(文康公) 윤언이(尹彦?)가 찬한 것을 탄연국사가 쓰신 것으로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부(龜趺)와 이수는 상실(喪失)되었으나 세조각이 된 비신은 복원되어 청정도량인 운문사 대웅전 옆에 서있다. 서거정(徐居正)이 말하기를 동방(東邦)의 필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극일(姚克一), 탄연(坦然)이 다음 간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사께서 입적하신 후 나라에서 국사(國師)로 추증되고 시호를 대감(大鑑)이라 하였다. 탄연의 청평사문수원기비 청평사는 고려 광종(光宗) 24년(973)에 영현선사(永賢禪師)에 의해 백암선원(白岩禪院)으로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후 보현원(普賢院), 문수원(文殊院)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허응당(虛應堂) 보우선사(普雨禪師)가 절을 크게 중건하고 이름을 경운산 만수성 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 세월과 한국전쟁 등의 피해로 우리나라 신품사현(神品四賢:書畵로 유명한 김생, 탄연, 최우, 유신을 일컫는 말)의 한 분인 탄연(坦然)의 글씨로 조각된 청평사 문수원기비(淸平寺文殊院記碑)도 파손되고 국보로 위용을 자랑하던 극락전(極樂殿)도 불타버렸다. 당시의 건물로는 회전문(보물 제164호)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지금의 건물들은 근년에 신축한 것이다. 그러나 예스러움이 남아 있는 초석(礎石)과 석축, 4개의 부도(浮屠)가 있으며 이곳에 전해오는 전설로 일명 공주탑이라 불리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또 고려시대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은거(隱居)했던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이 조성한 고려정원의 영지(影池)와 그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곳 절터는 사찰 뒷 편에 오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지고 전면에 계곡이 흐르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풍수를 따른 곳이다. 고려 승려 탄연(坦然) 탄연(坦然, 1070~1159)은 안적사(安寂寺)에서 출가하여 고려 예종 1년(1106년) 때에 대사가 되고 인종 24년(1146년)에 왕사(王師)가 된다. 그는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선문을 중흥시켰고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서거정(徐居正)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이 제일이요, 탄연이 다음 간다.”라고 평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를 본받았으며 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춘천의 문주원비(文株院碑), 예천의 북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을 썼다. 이번 전시회에는 문주원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탁본 글씨가 전시되었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주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1130년,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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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단속사(Dansoksa) 원문보기▶ 글쓴이 : 자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