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중국화가 탕담생(湯炎生)의 <현량고독도(懸梁苦讀圖)>
현량자고(懸梁刺股)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매달고 넓적다리를 송곳으로 찌르다. 두현량(頭懸梁) 추자고(錐刺骨), 자고현량(刺股懸梁) 또는 현두자고(懸頭刺股)라고도 한다.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부지런히 노력함을 일컫는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종횡가(縱橫家)의 비조이자 합종책(合從策)으로 유명한 소진(蘇秦)과, 동한(東漢)의 대학자 손경(孫敬)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정확히 현량은 손경, 자고는 소진의 사례에 해당한다.
소진은 동문수학하던 장의(張儀)가 출세한데 자극 받고, 가족들까지 홀대하자 크게 분발했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육도(六韜)≫와 귀곡자(鬼谷子)의 ≪음부경(陰府經)≫ 등 병서를 집중 탐독했고, 자신의 허벅지(股=大腿)를 송곳으로 찔러 수마(睡魔)를 쫓으며 정진해 마침내 큰 성취를 얻었다.
손경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독서에 몰두해 훗날 학문적으로 대성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폐문선생(閉門先生) 또는 폐호선생( 閉戶先生)이라 불렀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승상을 지낸 광형(匡衡)도 남다른 공부를 통해 입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밤에 책을 읽고 싶어도 등불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의 벽을 뚫어(鑿壁) 그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偸光)으로 책을 읽었다 한다.
※ 청대(淸代) 화가 오리(吳履)의 <한헌고독도(寒軒苦讀圖)> (1794年作)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소진의 예화를 좀더 쫓아가 보자
소진이 조(趙)나라에서 노자를 얻어 연횡설로 진(秦)나라 혜왕(惠王)을 달래 10여 차례 진언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웬 "자다가 봉창(封窓) 두드리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소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시간만 허비한 채 조나라로부터 얻은 노자와 공작금으로 받은 100근의 황금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좌절에 빠진 소진은 하는 수 없이 秦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헝겊으로 칭칭 감았고, 짚신을 신었으며, 어깨에는 책 보따리를 둘러멨고, 몸은 마를 대로 말라 얼굴은 까만 것이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꼴로 집에 돌아오니 그의 처는 남편이 돌아왔건만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형수는 시동생에게 알량한 라면 한 그릇 끓여주지 않았다. 부모조차도 자식이련만 거들떠 보지 않았다.
소진이 탄식하며 한마디 했다. "처는 나를 지아비로 여기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부모는 나를 자식 취급조차 않으니 이 모든 것이 나의 허물이로다"
이에 이를 악물고 다시 밤을 세워 공부하기 시작했다. 묵은 책 궤짝 수십 개를 펼쳐 놓고 태공망의 ≪육도(六韜)≫와 귀곡자의 ≪음부경(陰府經)≫을 찾아 열심히 읽었다.
특히 그 중 어려운 구절을 뽑아 열심히 췌마법(?摩法: 상대의 마음을 읽어 설득하는 유세술)을 익혔다. 책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刺股) 쏟아지는 '원초적 본능'을 쫓아가며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과연 1년 후에 췌마법을 터득해냈다. "이 정도면 됐어! 어찌 이 정도의 유세(遊說)로도 뭇 임금의 금옥면수(金玉綿繡)를 얻어 경상(卿相)의 높은 자리를 취해내지 못하랴?"
마침내 소진은 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종래 秦나라에 유리한 연횡술(連衡術)을 버리고 대신 秦을 제외한 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육국(六國)이 연합전선을 형성해 강국인 秦에 대항하는 이른바 합종술(合從術)을 펼쳤다.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육국의 종약장(從約長)이 되었다. 6개의 재상 인수(相印)을 허리에 차고 어디에 가든지 그 자리에서 결재하고 도장을 찍는 지위에 이른 것이다.
※ 청대(淸代) 화가 탕이분(湯貽汾)의 <한창독역도(寒?讀易圖)>
이 한사람으로 인해 "한 말(斗)의 양식도 소비하지 않고, 화살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싸움에 나가지 않고"도 제후들이 서로 친하게 되어 여섯 나라는 형제 같은 우방이 되어 버렸다.
무릇 어진 사람이 임직(任職)하니 천하가 따르고, 한 사람을 등용함에 천하가 복종한 셈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함에 무력을 쓸 필요가 없고 조정에서 계획을 함에 변방에 전쟁을 시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소진이 한창 잘 나갈 때는 1만 일(鎰)의 황금을 마음대로 전용할 수 있었고, 그를 따르는 마차가 서로 이어 그가 지나는 길을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그래서 秦의 효산(?山) 동쪽 각 나라(육국)는 순풍이 부는 것처럼 소진이 재상으로 있는 趙나라의 말에 복종하게 되었다.
소진은 원래 누항(陋巷)의 대문도 없는 집에 뽕나무로 물지게를 엮고, 나무를 휘어서 돌저귀를 만든 초라한 집 출신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수레에 올라서는 위의(威儀)를 뽐내며 천하를 종횡하고, 궁중에 들어가 제후들에게 유세할 때면 좌우 대신의 입을 다 막아 누구하나 그에게 말로는 대항할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진이 초(楚)나라 왕에게 유세차 떠나는 길에 고향인 낙양(洛陽)을 지나가게 되었다. 부모와 가족이 이 말을 듣고 집을 청소하고 길을 다듬은 뒤 음식을 장만해 30리 교외까지 나와 소진을 맞이했다.
그때 처는 그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귀만 기울여 들을 뿐이었고, 형수는 뱀처럼 엉금엉금 기면서 연신 굽신거리며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기 바빴다(妻側目而視 側耳而聽. 嫂蛇行匍伏 四拜自而謝).
이런 꼴을 보고 소진이 물었다. "형수는 지난번에는 그리 거만하더니 지금은 어찌 그리 겸손하십니까?" 그러자 형수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지금은 권력에다 돈까지 있으니까 그렇지요."
소진은 그 말을 듣고 탄식했다. "아! 빈궁할 때에는 부모조차 자식이라 여기지 않더니, 부귀해지니까 먼 친척까지 다 두려워하는구나. 그러니 사람의 세상살이에 어찌 권세와 부귀를 가벼이 볼 수 있으랴(嗟乎! 貧窮則父母不子,富貴則親戚畏懼,人生世上,勢位富貴,蓋可忽乎哉!).
일찍이 나에게 고향에 성(城)을 등진 척박한 땅 두어 마지기라도 있었더라면 내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도장을 허리에 찰 수 있었으리요!" 하며 그는 곧 천금을 풀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임동석(譯解), ≪전국책(戰國策)≫, 고려원, 1993, pp.220∼225 참조.]
※ 만일 소진에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갈 논 두어 마지기만 있었어도 애당초 그는 그렇게 피눈물나는 노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처지에 적당히 순응하면서 그날그날을 보내는 누항의 장삼이사(張三李四)로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동네 복덕방 노인네들 장기판 훈수에 끼어들었다가 핀잔이나 듣고, 고스톱 판 기웃거리며 개평이나 뜯다가 드센 마누라 바가지에 시달리는 그렇고 그런 필부로 삶을 마감했을 지도 모른다.
※ 소진: 전국시대 東周의 洛陽人. 張儀와 더불어 鬼谷선생에게 종횡설을 배웠다. 후에 燕나라 문후(文侯)의 부인과 사통, 제(齊)나라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역시 유세객인 그의 동생 소대(蘇代)·소려(蘇勵)와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다.
※ 청말근대 화가 금성(金城)의 <추창독역도(秋?讀易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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