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

문수암(文殊庵)/오암대사(鰲巖大師,1710-1792)

강나루터 2022. 7. 6. 04:52

문수대

 

문수암(文殊庵)/오암대사(鰲巖大師,1710-1792)

 

絶頂庵依舊 (절정암의구)

重修運再回 (중수운재회)

簷高窓易曙 (첨고창이서)

路險客無來 (로험객무래)

列岳簾前垤 (열악렴전질)

滄溟案工盃 (창명안공배)

騁眸窮遠眄 (빙모궁원면)

胸次百優開 (흉차백우개)

 

끊어진 산이마에 옛 암자가 있는데

이에 다시 중수하니 운이 돌아왔도다

처마가 높으니 창문에 새벽이 깃들고

길이 험하니 객이 오는 이가 없도다

뭇 멧부리는 발 앞의 두덤이요

창해바다는 책상 아래 물잔이로다

눈을 놓아 먼 곳을 바라보니

가슴 속에 백 가지 근심이 흩어지네 (鰲巖集)

 

 

속성은 김씨,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하(), 법명은 의민(義旻)이다. 부친 김석경(金錫慶)은 해남현감(海南縣監)

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연안이씨다. 조선 숙종 36(1710) 10 2, 청하현 오두촌(현 용두2)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

터 총명하여 같은 마을 이진사(李進士)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재주가 뛰어나 선생의 사랑을 받으며 20세 전에 사서오경

(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전적(典籍)을 통달하였다.

 

19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3년 동안 고생을 하자 스님이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22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

.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인생무상을 느낀 나머지 친척으로 중이 된 보경사 각신장로(覺信長老)에게 나아

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불가에 귀의한 스님은 이미 세속에서 선비로 이름이 났으므로 불경을 공부하는데도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총명을 보여

다른 학인이 열흘 동안 공부할 것을 하루에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중국 진()나라의 천재적인 승려 도안법사(道安法

)에 비하였다. 25세 되던 해에 강백(講佰)으로 이름 높은 계영당(桂影堂) 수행대사(守行大師)에게 나아가 사교(四敎) 

교과(大敎科)를 공부하였다. 계영대사는 서산대사(西山大師) 6세 법손인 송암대사(松庵大師)의 제자 해월범일대사(

梵一大師)의 법을 이은 분이니, 오암대사는 서산대사의 9세 법손인 셈이다. 스님은 계영 강백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

고 교학을 수업, 그 법을 받았다. 하지만 계영대사는 스님을 문하에 둔 지 3년 만에 입적하고 말았다.

 

스님은 계영대사의 부도를 조성하여 모시고 심상(心喪)을 입은 뒤에 선지식을 참방하기 위하여 양산 통도사에 가서 강백,

학인들과 토론하였다. 그 후 팔공산 운부암(雲浮庵)에 가서 쌍운장로(雙運長老)를 찾아 화엄교리를 묻고, 32세에 보경사

로 돌아와 대강백을 찾아 화엄대교(華嚴大敎)와 전등(傳燈) 등 당시의 선교(禪敎) 최상의 도리를 연구하니, 대중(大衆)

스님을 강주(講主) 또는 조실(祖室)로 맞이하였으며, 원근의 학도(學徒)가 운집하여 교계(敎界)에서 영남종장(嶺南宗丈)

이라 하였다.

 

스님은 여가에 항상 참선을 하였고, ()과 시()가 둘이 아닌 경지에서 시 짓기를 즐겼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절 가

까운 곳에 모셔두고 은사 각신장로가 스님의 노친을 위하여 남겨 둔 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노부를 봉양하는 등 효성이 지

극하였다. 스님이 60세 되던 해에 은사인 각신장로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부친이 또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은사와 부

친의 상을 함께 맞아 명복을 빌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스님이 83세 되던 해(1792) 9월에 병을 얻어 눕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스님의 초상을 그려 두었다. 스님은 자신의 초상화

를 보고 形本是假 影豈爲眞 有相非相 離身卽身 邈來難狀 覓去無因 這豈不認(형상이 본디 거짓인데 그림자가 어찌 참이

되랴 형상있는 것은 참 형상이 아니요 몸을 의이고 보면 곧 참 몸이로다 그 온 곳을 형상하기 어려우며 가는 곳을 찾아도

원인이 없도다 저것(오고 간 것)을 인정하지 못할 적에 비로소 저 사람(참 자기)를 보리로다)”라는 진영송(眞影頌)을 쓴

다음 今朝一夢罷 何處換新願 久法菩堤願 當生法王家(오늘 아침에 한 꿈을 깨고 보니 어느 곳에 새 얼굴을 바꾸리 오랫

동안 보리의 원을 맺었으니 마땅히 법왕가에 나게 되리)”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쓰고 조연히 숨을 거두었다. 다비하여 영

골을 거두어 보경사 서운암(瑞雲庵) 부도장에 영골탑을 세우고, 다음 해에 제자 회관(誨寬)이 비문을 찬하여 비를 세웠다.

스님이 쓴 시를 모은 오암집(鰲巖集)이 전하고 있다.   [포항시사(浦項市史)](2009)

 

오암대사 진영(보경사 소장)

오암대사비(보경사 서운암 부도밭)

출처 : 漢詩 속으로
글쓴이 : 진솔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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