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素琴) 유동식(柳東植)본명출생사망국적학력경력직업상훈
|
|
유동식(柳東植) | |
1922년 1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남천 |
|
2022년 10월 18일 서울시 서대문구 봉천동 |
|
대한민국 | |
춘천고등학교 졸업 감리교신학교 졸업 보스턴대학교 신학석사 스위스 에큐메닐칼연구원 Dipl. 동경대학교 종교학/종교사학 연구 국학원대학 문학박사 |
|
공주여자사범학교 교사 전주사범학교 교사 배화여자고등학교종교주임 감리교신학대학 전임강사/조교수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 세계신학교육기금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교수 국제기독교대학 객원교수 |
|
신학자 | |
한국출판 문화상 저작상 3.1 문화상 학술상 용재학술상 |
유동식(柳東植, 1922년 11월 22일~2022년 10월 18일)은 대한민국 신학자이다. 한국에서 토착화(土着化) 신학의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한 그는 한국 토착종교인 무교(巫敎, 무속신앙)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을 시도했다.[1] 풍류신학은 고운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고유한 얼(영성)을 풍류도를 바탕으로 구성된 해석학적 신학으로 한국 문화신학이라 할 수 있다. 유동식은 한국에서 예술신학이라는 미지의 분야를 개척한 최초의 신학자[2]로, 그의 저작은 한국적 신학의 남상(濫觴)으로 평가[3] 받는다.
백수(白壽)를 누린 평신도(平信徒) 예술(藝術) 신학자[4][편집]
소금 유동식 선생은 백수(白壽)를 누린 평신도(平信徒) 예술(藝術) 신학자라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라는 꼬리표와 몇 가지 수식으로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할 수 없다. 여기서는 학자로서 유동식을 단편을 소개한다.
백수를 누린 신학자[편집]
1922년 11월 22일에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를 역임한 유동식은 학교 동문 근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2022년 10월 18일에 소천했다. 생전 숫자 2와 인연이 깊다 말한 선생은 2022년에 생을 마쳤다. 그는 세는나이 101세로 백수(百壽)를 넘겼고, 만나이 99세로 백수(白壽)였다. 이 또한 한국과 서양의 나이 사이에서 100세를 살았으니, 평소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선생답다.
그의 삶은 그 긴 시간만큼이나 역동의 근·현대 한국사를 그대로 품고 지나왔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과 피난의 삶,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 과정을 모두 겪었다. 말년에는 ‘강남스타일’로 대표되는 이른바 ‘한류’까지 목도하고, 한국 문화의 독창성을 풍류신학과 관련하여 논하기도 했다. 화랑의 풍류도에서 시작된 풍류신학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기상이 세계에 위상을 떨친 소위 ‘말춤’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평신도 신학자[편집]
선생이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신도로 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음주에 거리낌이 없어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다 말했지만, 제도적 겉치레가 선생의 삶과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때때로 학문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 신학계에서, 그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한국적 기독교 영성을 화랑의 정신에 기초한 풍류도에서 찾고자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유동식은 1960년에 홍콩에서 열린 동아시아교회협의회의 평신도와 청년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에 초청되어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평신도 신학자로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1963년 가을부터 1964년 봄까지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컬 연구소에서 공부하며,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전통종교 연구로 이어졌고, 1972년에 일본 국학원대학에서 한국 무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국에 많은 신학자가 있지만, 한국 전통 종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는 그가 유일하다. 그는 교계와 학계의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사상을 펼친 신학자였다.
예술 신학자[편집]
선생은 성서학, 선교학, 한국신학사, 한국교회사, 조직신학 등 다양한 신학분과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이와 함께 예술 활동은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신학을 넘어 예술에 대한 선생의 학문적 관심과 성과는 그를 예술 신학자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작품 속의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미학구조와 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기독교 계시와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선생은 자신의 풍류신학의 본론과 결론이 예술신학이라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생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학과 출장길에 항상 그림도구를 챙겨 다니며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선생에게 예술은 학문적 연구 대상이자 취미이자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소금 유동식은 자신이 펼친 사상 그대로, 한 멋진 삶을 살아낸 풍류객이었다.
생애[5][편집]
유동식을 신학의 길로 이끈 것은 가정의 분위기와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22년 1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3대째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으며, 당시에 황해도에 남감리교가 선교하고 있었기에 그의 가족은 모두 감리교인이 되었다. 유동식은 그의 조부가 “성경에 파묻혀 언제나 유유자적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이 생리화”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유동식은 어려서부터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그 시대 속에서 신앙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는 민족성이 말살되고,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을 경멸하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신앙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갈등을 느꼈고, 그 결과 민족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였 다. 즉, 일제의 무단 수탈과 억압, 민족적 아픔의 현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서 신념을 가졌던 그에게 있어서 기독 교 신앙의 의미와 가치에 관하여 묻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절대적 가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즉,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신학의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1943년 봄에 동경으로 건너가 동부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유동식은 동부신학교로 가고 일 년도 안 되어 “반도 학도의 특별 지원병 제”를 통해 강제 징집되어, 1년 8개월여 동안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 시절에 대하여 “비인격화된 군인생활과 폭격의 공포는 매일같이 「죽음의 연습」을 되풀이하게” 해주었다고 회상한다. 후에 그는 전쟁터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 해방의 경험에 대하여 “실존적인 부활을 체험”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 리고 이러한 전쟁과 해방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신학의 전통에 매이지 않게 만들었으며, 그의 인생과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뿌리체험 혹은 원체험”이 되었다.
해방 후, 유동식은 감리교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고, 이 시기에 동양적인 영성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함석헌과 승려인 탄허로, 유동식이 보기에 함석헌의 강의에는 종교, 시, 동양사상이 융합된 세계가 있었으며, 탄허를 통하여 공부하게 된 『장자(莊子)』 「내편(內篇)」은 그에게 성서만큼 이나 ‘참 사람’의 경지를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는 눈을 주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동식은 피난 중에 전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목회자로 있었던 고득순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에 대하여 그는 “6.25가 내게 준 하나의 큰 혜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고득순이 유동식의 심허속천(心虛屬天)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를 통하여 유동식은 한국의 이상적인 목회자상을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유동식은 1954년부터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종교 주임으로 학생들을 가르 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예수의 교훈을 중심으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만 가르쳐주면 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1954년에 『예수의 근본문제』라는 책으로 발간된다. 그곳에서 2년 남짓의 종교 주임으로 일한 후에 1956년에 유동식은 ‘십자군 장학기금’을 받고 보스턴대학에서 신약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성경』, 『노자(老子)』, 영어사전을 가지고 갔으며, ‘요한복음의 근본사상’을 주제로 그것을 동양의 도(道)의 입장에서 연구하고자 하였다. 즉, 유동식은 학문으로서 신학 작업 이전에 이미 “동양사상과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신학, 곧 토착화신학 수립을 위한 기틀”을 서서히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턴대학교에서 유동식에게 주어진 문제의식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였다. 그는 미국에서 C. H. 다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K. Bultmann)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특별히 불트만의 신학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東西의 벽이 무너지고, 道와 로고스가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을 때엔 몹시 기뻤다. 非神話化論은 성서해석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분야에서도 응용될 수 있는 解釋學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한 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부터 시대적, 문화적 제약 아래에 있는 표현 양식보다는 진리의 본질을 실존론적(實存論的)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런데 유동식이 불트만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동식은 “성서를 다시 보는 눈을 그분[불트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불트만의 신학이 아닌, 그의 성서해석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김경재와 김광식은 유동식의 신학이 불트만의 신학 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그는 복음의 실상과 한국문화 속에서 그것을 의미 있게 전달하는 문제를 고민하였 고, 『요한서신 주석』을 집필하면서 먼저 복음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1960년 겨울, 홍콩에서 열린 평신도와 청년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에서 유동식은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mer)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타 종교 이해와 커뮤니케이션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크래머의 영향으로 유동식은 성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 전통을 구분하게 되었으며, 동양종교도 성서적 실재(實 在)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963년 5월, 유동식은 WCC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게 되며, 제네바 근처에 있는 보세이 에큐메니컬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관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내면서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라고 느끼게 되었고, 한국종교의 의미에 관하여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 입장에서 한국종교에 대하여 정리하고, 선교 신학적인 관심에서 글을 쓰면서, 『한국종교와 기독교』와 『도와 로고스』가 출판된다. 이러한 점에서 유동식에게 있어서 한국의 문화와 종교, 토착화 신학이라는 주제는 식민지 치하와 서양과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서 도출된 신학적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종교와 기독교』가 출간된 이후에, 유동식은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을 본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유동식이 보기에 한국 문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 종교였고, 복음이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이 영성이었기에, 토착화를 위해서도 한국인의 영성이 규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무교(巫敎)가 한국인의 전통종교라는 생각으로 1968년 9월부터 도쿄대학(東京大学) 문학부 대학원에서 연구하게 된다. 유동식은 그곳에서 민속종교학자인 호리 이치로(堀一郎)에게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를 배우면서 샤머니즘에 대하여 폭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1972년에 “한국샤머니즘의 歷史와 構造的 特質”이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라는 책이 1975년도에 출간된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6월 말까지 유동식은 동경에 있는 국제기독교대학(ICU)에서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그는 한국인의 얼(영성)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유동식이 한국의 사상사를 한국인의 얼(영성)의 전개사(展開史)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의 영성을 풍류도(風流道)로 규정하고, 풍류도의 전개를 바탕으로 한국신학 사상사와 한국종교 사상사의 구조를 정리하였으며, 한국 문화사(文化史)를 풍류 문화의 형성 과정사(過程史)로 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유동식은 한민족의 문화와 기독교 신앙, 신학과 만남의 장으로서 풍류도를 발견하게 되었고,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풍류신학의 정립, 곧 “풍류도와 기독교 복음과의 접목을 통해 한국신학을 정립하는 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신학 여정을 “풍류신학으로의 여로”로 표현하게 된다.
후에 유동식은 종교와 예술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이며, 풍류도가 종교적 영성이자 예술적 영성이기에 “예술신학은 풍류신학의 본론인 동시에 결론”이 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학 사상을 예술신학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여기에 서 그는 “역사, 민족, 인간, 삶, 복음, 전쟁과 사랑, 자유 등을 예술론적으로 해석” 하며, 서양과 한국의 미술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도를 한다. 그리 하여 유동식은 예술신학에서 불교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불교문화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 가운데에서 “석굴암은 불교 미술의 결정체요,... 인류 문화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하나님의 묵시가 담겨 있는 거작”이라고 말한다.
'종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잔고목(摧殘枯木) (0) | 2024.01.31 |
---|---|
백은선사 (0) | 2024.01.30 |
역주 조선 불교 통사 (0) | 2023.12.14 |
영관 (靈觀)선사 (0) | 2023.10.24 |
상대방이 미울 때 ' 미륵존여래불 (0) | 2023.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