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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록을 지킨 사람들

강나루터 2014. 7. 1. 06:00

실록을 지킨 사람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전주 경기전 – 정읍 내장산 – 정읍 – 태인 – 익산 – 용안 – 임천 – 부여 – 정산 – 온양 – 아산 – 수원 – 남양 – 인천 – 부평 – 강화 – 해주 – 안주 – 묘향산”
  이것은 무슨 코스일까. 쉽게 짐작이 안 되는 코스일 것이다. 이 행로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옮겨간 길이다. 다 알 듯이 임진왜란 당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왕조실록은 모두 불타고 오로지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주사고의 실록은 위의 행로를 거쳐 묘향산에 도착함으로써 비로소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임란 당시 선조의 어가가 도성을 떠나자 난민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궁궐에 불을 질렀고, 이때 홍문관에 보관해둔 각종 서적, 춘추관의 왕조실록, 『고려사』를 편찬할 때 참고했던 사초들, 승정원의 『승정원일기』등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충주와 성주의 사고에 있던 책들까지 다 불타버렸으니, 전주사고의 책마저 타버렸다면 조선전기의 사료들은 완전히 인멸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지켜낸 두 선비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오기 위해 금산에서 조선의 관군·의병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전주성에서는 태조의 어진과 사고의 실록을 어디로 피난시킬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정읍의 내장산으로 이를 옮기기로 하고,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이 정읍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이때 그를 돕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이 지방의 유생 안의와 손홍록이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노비와 머슴 30여 명을 동원하여 전주로 달려가서 어진과 전주사고에 있던 1천여 권의 책을 50여 개의 궤짝에 넣어 내장산으로 옮겼다. 당시 이들이 옮긴 전주사고의 책은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삼국사』, 『삼국사기』, 『삼국사절요』, 『고려사』, 『동국사기』, 『동국사략』, 『동국통감』 등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중요한 사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사서는 6월 22일 내장산 은봉암에 일단 옮겨졌다가 7월 14일 다시 비래암으로 옮겨졌고, 어진은 7월 1일 용굴암에 보관되었다가 9월 28일 비래암으로 다시 옮겨졌다. 비래암은 내장산의 높고 험한 곳에 있는 암자였기 때문에 이쪽으로 모두 옮긴 것이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은 은봉암, 용굴암, 비래암에서 어진과 실록을 지켰다. 『임계기사』라는 책에 의하면, 이들 가운데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지킨 날은 53일이고, 안의 혼자 지킨 날은 174일, 손홍록이 혼자 지킨 날은 143일이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 유인 등은 전주에 연락 차 가끔 왕래를 했기 때문에 내장산에 머무른 날은 안의나 손홍록만큼 많지 않았다. 물론 안의와 손홍록도 혼자서 지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데리고 온 노비와 머슴들이 함께 있었고, 산 아래에서는 내장산 승려들과 의병들이 번을 섰다.

역사 속에는 기억해야 할 일과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내장산에서 1년여를 머문 어진과 실록은 1593년 7월 왜군의 공격으로 전라도가 다시 위험해지자 해주에 있던 선조의 명에 따라 북상길에 오르게 된다. 정부에서 파견된 유탁과 경기전 참봉 여정구와 이도길, 그리고 안의와 손홍록이 이 일을 맡았다. 7월 11일 정읍을 떠난 일행은 도보로 부평까지 올라가서 배를 타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그때가 7월 24일이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안의와 손홍록이었으며, 노비와 머슴들 30여 명이 짐을 지고 그들을 따랐다. 이들은 강화에서도 실록을 지켰으나 안의는 병이 나서 귀가하였다.

  1592년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에서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길 때 그들의 나이는 각각 64세와 56세였다. 안의는 강화에서 돌아온 뒤 3년 만인 1596년 세상을 떴다. 이들은 1593년 8월 선조로부터 별제라는 종6품 벼슬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녹봉도 없는 명목만 있는 벼슬이었다.

  오늘 우리가 조선전기의 역사를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이 두 사람 덕분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오늘날 교과서는 물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한 번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정읍에 가면 이들을 모신 남천사라는 작은 사당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여기에서만 기억되고 있다. 안의와 손홍록, 그리고 그들을 도와 천 리 길을 걸어 실록을 날랐던 노비와 머슴들,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지킨 이들이다.

 

글쓴이 /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교수
· 현 한국구술사학회 회장
· <Korea Journal> 편집위원
· 저서 :
마을로 간 한국전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1조 성립의 역사』
           『근대민중운동의 사회사』

 

출처 : NostalgiaToRoots
글쓴이 : 微幽堂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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