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 박완서
건망증이 날로 심해 식구들을 애먹이는 일이 잦다. 비누·휴지·치약 등 제때제때 갖춰놓아야 할 일용품을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나도 사오기를 잊어버려 식구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공과금 낼 날을 잊어버려 과태료를 내는 정도는 다반사다. 식구들이 흘려놓은 것 중 좀 중요하다 싶은 건 깊이 챙겨두긴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 뒀는지 깜깜이 되고 만다. 이젠 아이들이 뭘 찾다가도 엄마가 잘 뒀다는 말만 하면 좋아하기는커녕 숫제 찾던 손을 멈추고 미리 절망적인 얼굴을 한다. 아이들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면 나도 덩달아 막막해지면서 자신이 싫어진다. 왜 잘 챙겼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면서 정작 그게 어디라는 건 생각나지 않는지 내 일이건만 참으로 딱하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어서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얼마 전 설악산에서의 일이다. 설악산 관광을 위해 간 게 아니라, 강릉까지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잠깐 들렀었는데 마침 단풍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 단풍을 절경으로 꼽아 시월 한 달은 설악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에게 시달리는 달이지만 그곳 단풍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르러 오는 사람이 절로 ‘앗’하는 찬성을 지르게 하는 동안은 불과 하루 이틀이라고 누구한텐가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 설악산이 네 번째였고 가을에만 세 번째였는데 골짜기마다 다만 ‘앗’하는 탄성 외엔 말문이 막히게 황홀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뜻하지 않게 내가 그 짧은 절정의 순간과 만나고 있음을 느꼈다.
땅은 얼마나 위대한가? 일용할 양식과 함께, 그 아름다운 조락凋落을 만들어낸 땅에 겸허하게 엎드려 경배드리고 싶은 충동과 아울러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요새 나의 감동은 이상하게도 슬픈 느낌과 상통하고 있다. 하다못해 깔끔하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나서도 문득 슬퍼진다.
그때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만산홍엽滿山紅葉 중에서도 뛰어나게 고운 빛깔로 눈길을 끄는 단풍나무가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홀로 비상할 것처럼 활짝 핀 그의 자지러지게 고운 날개엔 마침 석양이 머물고 있었다, 처절했다. 나는 앗! 하는 탄성을 안으로 삼키면서 그 빛깔은 바로 어려서 할머니 등에 업혀서 바라본 저녁노을 빛깔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게 실제의 기억인지, 그 순간의 상상인지, 그 두 가지의 혼동인지 아직까지도 아리송하다.
나는 어려서 대단한 울보였던 모양으로 너무 울어서 어른을 애먹인 에피소드가 다양한데 그 중엔 노을이 유난히 붉던 날, 할머니 등에 업혀서 그걸 손가락질하며 몹시 울었다는 얘기도 있다.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어릴 적 일이니까 그걸 보고 왜 울었는지 생각날 리는 없고, 아마 강렬한 빛깔에 대한 공포감이었겠지 정도로 짐작하고 있는데 그때 느닷없이 그게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그건 이미 단풍이 아니었다, 고향 마을의 청결한 공기, 낮고 부드러운 능선, 그 위에 머물러 있던 몇 송이 구름이 짧고 찬란한 연소의 순간이 거기 있었다. 어쩌면 그건 기억도 상상도, 그 두 가지의 혼동도 아닌 이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어릴 적의 그 울음은 자연의 신비에 대한 나의 최초의 감동과 경의였다는 걸 살 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초로의 나이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만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안에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공상하게 했지만 살 날보다 산 날이 훨씬 더 많은 이 서글픈 나이엔 어릴 적을 공상한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고웁디고웁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 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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