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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인간 國寶 양주동 博士 ★

강나루터 2014. 11. 6. 06:30

★ 인간 國寶 양주동 博士

[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걸음 멈춘 인간 국보 양주동(梁柱東)박사

  • 관련사진
  • 무애 양주동 박사가 1977년 2월 4일 뇌일혈로 쓰러져 타계했다. 사진은 집필실에서 향가 연구에 한창이던 고인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택시기사 등 누구와도 농담을 즐기며 학생들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면 받아 치던 뛰어난 그의 위트와 해학을 더 이상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 박사는 영문학을 전공한 국문학자이자 번역가였으며 시인, 수필가로 명성을
날리던 당대 최고의 대중 지식인이었다. 그가 강단에 섰던 동국대 강의실은 수강생과 청강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고정 출연했던 라디오 토크쇼는 높은 청취율을 기록했다.

그의 천재성은 황해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부터 입증됐다. 5살 때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중국 당송(唐宋) 8대 가의 글을 통달했다고 하니 가히 신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양 박사는 중동고를 나와 일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와 경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광복을 맞았고,

 이후에는동국대 강단에 서며 평생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도중 잠깐 연세대에 몸담기도 했고 타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지도하곤 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해방조국의 동량이 된 제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멘토 이어령 교수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대표적인 제자 중 하나이다.

영문학을
공부했던 양 박사가 국문학자로 국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7년 향가(鄕歌)와 관련된 일본 학자의 해석을 통렬히 비판한 <향가의 해독>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당시 향가연구는 일본학자 '오쿠라 신페이'의 몫이었으며 그의 저서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접한 양 박사는 우리 고대민족문화의 가장 찬란한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규명되는 것에 충격을 받아 향가연구에 뛰어들었다.

40세가 되던 1942년, 그는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전하던 신라 향가 25수를 풀이한 불후의 명저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그리고 다시 5년 후, 고려 가요를 집대성한 <여요전주>를 출간하면서 그는 한국 문화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

학문적 성과와 더불어 무애 양주동은 여러모로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

<문주반생기>에서는 술과 어우러진 유년의 추억을 해학과 풍류로 승화했다.

수필집 <면학의 서>에 언급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澈)한다'는 독서론은 지금까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마음'을 작사한 그의 감수성 또한 놀랍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천재이자 기인의 삶을 살았던 괴짜 양주동 선생을 그리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장군. 010-7314-5002>

출처 : 제주몽생이
글쓴이 : 제주몽생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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