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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걸어서 한양 답사 (10) 東廟(동묘)

강나루터 2014. 11. 11. 08:47

지난번 답사한 단종비 정순왕후의 슬픔이 어린 東望峰(동망봉) 아래에 東廟(동묘)가 있다.

동묘? 동묘라니?  가까운 종로3가에 있는 종묘는 알겠는데 동묘라니?

역사소설이나 사극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종묘사직의 종묘는 대충 알겠는데 동묘는 또 뭐냐? 가봐야겠다. 해서 가보았다.

동대문과 신설동 사이... 1호선과 6호선 환승역이 동묘앞이다. 사실 번화한 곳이다.

그곳이 동묘인데 주변은 온통 벼룩시장이어서 평일에도 인파가 넘쳐나고 갖가지 상품들을 늘어놓은 난전으로 걷기도 불편하다.

알고보니 동묘가 보물 제142호인데 문화재 주변에 걸맞지 않는 모습이지만 이제는 그 벼룩시장 또한 전통이 된 듯 하다.

겸사겸사 한번쯤 가볼만 한 곳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관우)을 모신 사당, 東廟(동묘)

東廟(동묘)의 정식명칭은 東關王廟(동관왕묘)이다. 동쪽에 있는 關王廟(관왕묘)라는 뜻이다.

關王(관왕)은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 蜀漢(촉한)의 유명한 장군 關羽(관우)를 높여 부르는 말이니, 關王廟(관왕묘)란 관우를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란 뜻인데 東關王廟(동관왕묘)라고하면 동쪽에 있는 關王廟(관왕묘)가 되니 동쪽이 아닌 다른 방향에도 關王廟(관왕묘)가 있다는 뜻이 된다. (사실 서울에는 동서남북 모두 관왕묘가 있어서 동묘, 서묘, 남묘, 북묘가 있었다.)

 

아무튼 다시 정리해보면, 東廟(동묘)는 東關王廟(동관왕묘)의 약칭으로 '서울의 동쪽에 있는 關王廟(관왕묘)'로 關王(관왕)은 삼국지에 나오는 긴 수염의 명장, 청룡도를 휘두르며 활약하던 장수 관운장을 높여부르는 이름으로 그 관우의 조각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의 장수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 왜 한양도성 동쪽에 있으며 보물 제142호일까?

 

관우는 宋 휘종에 의해 武安王(무안왕)으로 추존되어, 文에서 공자를 문선왕이라하고 공자를 모신 사당을 文廟(문묘)라고 부르는데 비추어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武廟(무묘)라고도 하며 조선말기에는 아예 황제의 반열인 關帝廟(관제묘)라고도 불렀었다고 한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사당 문묘처럼 관우의 사당 무묘를 크게 숭배하였는데, 동묘는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 34)에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관우사당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陣寅(진인)이 정유재란인 1597년(선조 30)에 울산에서 왜군과 전투중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완쾌된 후 관우의 음덕이 있었다하며 관우상을 개인적으로 만들어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참전한 명나라의 장수들이 돈을 보태고 우리조정에서도 나서서 1598년 5월에 사당을 지었으니 지금의 서울역앞 어디쯤에 있었던 남묘였으며, 관왕묘의 효시라고 볼수 있다.

 

동묘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朝明(조명)연합으로 왜군을 물리칠때 관우의 神靈(신령)이 여러번 나타나서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 神宗(신종)이 4천금의 비용과 친필 액자를 보내 관우사당 설립을 강요하니 조정에서는 어쩔수 없이 이에 협조하여 동대문 밖 이곳에 자리를 잡고 2년간 공사후에 완공한 것이다.

 

이렇게 1598년(선조 31)에 남묘, 1601년(선조 34)에 동묘, 1883년(고종 20)에 북묘, 1902년(광무 6)에 서묘가 세워졌는데 북묘는 동묘에 합쳐지고 서묘는 없어졌으며 남묘는 사당동으로 옮겨져 재단법인 관리하에 허름하게 남아있으니 지금은 이곳 동묘만이 가장 큰 규모로 제대로 격식을 갖춘 대표적인 관우의 사당으로 남아있으며,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경북 성주와 안동, 한양근처 여러곳에도 關王廟(관왕묘)가 세워져 아직 남아있는 곳도 몇 곳 볼 수 있다.

 

 

東廟(동묘) 둘러보기

동묘는 동대문에서 신설동간 큰도로를 뒤로하고 남향으로 세워졌다. 즉, 도로에서 보이는 동묘는 뒷모습이다.

오른쪽은 차량도로, 왼쪽 담은 좁은 골목길로 둘러 쌓여있는데 오른쪽 큰 도로와 정면 앞 도로는 온통 벼룩시장으로 혼잡하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어쩌면 동묘보다 벼룩시장이 더 유명하고 名物(명물)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동묘는 보물 제142호임에도 불구하고 [동묘공원]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별도의 입장료 없이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으니 동묘를 둘러보기보다는 벼룩시장을 들렸다가 화장실을 이용하러 드나들거나 그늘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동묘 정문인 外三門(외삼문)앞 도로변... 벼룩시장 상인들과 손님들로 혼잡하다.>

 

<정문 외삼문은 5칸인데 중앙의 3칸이 솟을지붕으로 올려져 있고 좌우로 1칸씩은 낮게된 맞배지붕이다.>

 

<東廟(동묘)현판이 걸려있고 왼쪽으로는 '동묘공원'이라고 씌어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다시 중간문인 내삼문이다. 중앙이 넓은 3칸 구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삼문 왼쪽에는 雜人을 禁한다는 禁雜人(금잡인) 표석이, 오른쪽에는 下馬碑(하마비)가 보이는데 원래자리 같지는 않다.>

 

 

정문에서 중문을 바라보아 왼쪽에는 관리사무소가,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있는데 이 두건물은 최근에 공원으로 지정된 후에 세워진듯하며 화장실 앞에는 어떤 유서깊은 건물이 있었던듯한 화강암 석축과 3마리의 石獸(석수)가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왼쪽 관리사무소... 앞쪽에 게양대나 당간지주 비슷한 석조물이 보인다.> 

 

<오른쪽은 화장실인데 그 앞에 2단 석축이 남아 제법 번듯한 건물이 있었던듯 하다.>

 

<석축 좌우 끝단에는 같은 모양의 石獸(석수) 2마리가 중앙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놓여있다.>

 

 

<석축 중앙에는 끝단보다 더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石獸(석수)가 보이는데 계단 소맷돌 좌우로 2마리가 있었던 듯 싶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는 正殿(정전)이 보이고 왼쪽에는 서무와 오른쪽에는 동무가 있는 ㅁ자 구조이며, 이 건물들은 十자형태의 바닥돌을 깔아 보도로 연결하였다. 서무와 동무는 서로 대칭형 구조이며 각각의 끝에는 한칸 구조의 공간에 커다란 비석이 하나씩 세워져있어 눈길을 끈다. 동무에는 앞면에 사도세자가 뒷면에 정조가 쓴 글이 새겨졌다고 하며 서무에는 앞면에 숙종과 뒷면의 영조의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잠겨져 있어 창살 사이로 전면 글씨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드물게 한곳에 네 임금의 글씨가 모여 있다.

비석은 밖으로 꺼내놓고 그 옆에 상세한 설명을 써놓으면 좋겠다.

 

<중문에서 바라본 좌측의 서무와 우측의 동무, 대칭형 모습의 5칸 건물이다.>

 

 

<서무의 끝칸에 세워진 비석...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이라고 전서체로 전액(제목)이 쓰여있고

  그 앞면에 행서로 쓴 본문은 숙종의 글씨이며 뒷면은 영조의 글씨라는데 뒷면은 볼수가 없다.>

 

<동무의 끝칸에 세워진 비석... 武安王廟碑(무안왕묘비)라고 전서체로 전액(제목)이 쓰여있고

  그 앞면 글씨는 사도세자 글씨이며 뒷면은 정조의 글씨라는데 뒷면은 볼수가 없다.>

 

<서무에서 바라본 동무... 바닥에 돌을 열십자(十)로 깔아 보도를 만들었다. 좌우는 중문과 정전을 연결한 길이다.>

 

正殿(정전)은 관우를 모신 곳이다.

우리처럼 신주를 모신것이 아니라 관우와 친족등 4명의 조각상을 모시고 있는데 정면의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볼 수는 없다.

2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一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며 실내공간도 앞뒤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前室(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本室(본실)이다. 건물 벽돌벽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회랑구조를 갖추었으며 곳곳에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正殿(정전)은 나름 위엄있게 지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긴네모형 특이한 구조로 중국식 건물이다.> 

 

 

<전면에는 중앙과 오른쪽에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라는 같은 이름의 현판 2개가 걸려있다.

 조선말기, 또는 대한제국에 들어서 關王(관왕)을 황제의 반열인 關帝(관제)까지 올려 숭상하였다하니 그때 만든 편액인듯 하다.

 2개인 이유는 아마 북묘가 동묘에 합쳐지면서 북묘의 현판을 이곳에 함께 붙인건 아닌지?... 이런 설명이 필요하다. ㅠㅠ>

 

 

<정전 앞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애매한 석물이 보인다. 아마도 일부가 망실되어 그런듯하다.

  오른쪽은 석등이었는데 윗부분이 없어진듯하고 그 옆은 받침대만 남아서 무엇이었는지도 알기 어렵다.> 

 

 

 

정전 내부로 들어 가 볼 수는 없다. 창살문에서 들여다 볼 밖에...

안에는 다시 약간의 여유공간을 두고 그 너머에 실내구조를 갖추고 그곳에 관운장 모습이 보였는데 뜻밖에도 2개였다.

중앙의 관운장은 죽은 관운장이요, 오른쪽 관운장은 살아서의 관운장이라는 설명이다. 이해가 잘 안간다.

 

<내부 중앙칸... 바깥 현판에는 황제로 표시되었지만 안에는 武安王(무안왕)으로 되어 있다. 그 안쪽에 死時 관운장이 보인다.>

 

<정면 칸중 오른쪽... 生時 관운상이라고 한다.>

<정면 칸중 왼쪽칸에는 조각상이 없다. 관우를 칭송하는 萬古忠心(만고충심), 千古完人(천고완인)의 현판이 보인다.>

 

정전 내부에는 그밖에도 친족이나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의 조각상이 있다는데 밖에서 보아서는 알수 없다.

그밖에도 서묘나 북묘가 합쳐지면서 내부 구조물들이 더러 보태진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장방형 네모구조의 정전 뒷면...  옆면에는 작은 문이 있더니 뒷면은 제법 장식이 화려하여 답답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뒷면 주변으로 여러개의 현판이 보인다. 아마도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을터인데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정면을 제외하고 삼면으로는 벽돌담 밖으로 기둥을 회랑식으로 세워 특이한 구조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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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하면서 늘 느끼는것이지만 이제는 전공과 무관하게 일반 시민들의 관심도 많아졌고 지식도 높아졌다.

그저 꽁꽁 닫아걸고 넣어놓고 안보이게 하는것 보다는 밖으로 꺼내놓고 보게하며 근처에는 상세한 설명과 안내, 가능하다면 상시해설이 가능한 그런 여건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관리사무소에는 상세한 설명문이 비치되었으면 좋겠다.

동묘 사무실은 그래도 나름대로 A4 한장에 프린트한 자료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조금은 아쉬웠다.

 

 

南廟(남묘), 關王廟(관왕묘)

동묘를 둘러본 김에 북묘와 서묘는 없어지고 동묘와 합쳐졌다지만 남묘는 남아있다기에 사당동 180-1번지로 찾아갔다.

오르막 지형 맨 꼭대기에 남묘가 있었는데 지형상 국립묘지 故박정희 대통령 묘역의 바로 뒷편이라고 한다.

원래 서울역앞 후암동 근처에 있었으나 1970년대 도시개발에 밀려 이곳으로 왔다고 하며 재단법인 이름으로 관리한다고 하나 전체적으로 부실해보였으며 개인집과 사당(廟)이 혼재된 상태로 보이는데 문화재 지정이 안되어서인지 오래갈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외삼문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반가웠다. 南廟(남묘) 현판이 보인다.>

 

 

<몇번 불러도 인기척이 없어 안으로 들어서니 조경으로 꾸민 정원이 보인다. 정면 주택은 별도이고 11시방향 주택이 관리동인듯...>

 

<전면에는 동묘의 오른쪽 석축과 마찬가지로 비어있는 壇(단)이 보인다. 계단에는 石獸(석수)가 있는것으로 보아 의미있는 장소인듯 하나 알수는 없다. 계단 옆으로 동묘에서 본 '禁雜人'표석과 하마비가 보이고 재단법인이라고 쓴 것도 보인다.>

 

<정작 사당은 왼편으로 돌아서야 보인다. 顯聖澱(현성전) 현판이 보인다.>

 

<들어온 삼문 안쪽으로는 關聖廟(관성묘)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에는 조경이 된 가운데에도 어딘지 산만하고 엉성한 분위기... 동묘에서 본듯한 석등 받침대가 보인다.>

 

좁고 낡은 모습이지만 분명 南廟(남묘)는 존재하고 있었다.

동묘가 보물로 지정된데 비하여 문화재 지정도 안되고 관리현실도 매우 부실해보여 안타깝다.

물론 시중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표현물로 매도되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역사이자 흔적 아닌가 싶다.

잠시 돌아보는 동안 아무 인기척이 없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는데 분명 사람이 사는듯하여 조심스럽다.

 

재미있는것은 이렇게 동묘, 남묘등을 답사하고 다니다 보니 퇴계로에서 동국대학교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앰버서더 호텔이 있는데

그 맞은편 주유소 아래에 關聖廟(관성묘)라 불리는 작은 사당이 있어 들러보았다.

 

<설명문에는 고종의 엄귀비가 세웠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며 관우 부부상과 산신그림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볼수는 없었지만 관우묘를 답사하는 입장에서 반가웠다.>

 

 

廟(북묘) 흔적

서대문구 천연동 어디쯤 있었다는 서묘는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만 본 한양답사기 (1)편 '혜화동골목'에서 찾아갔던 송시열 집터 이야기에서 北廟(북묘)이야기를 잠시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송시열 집터는 남아있지 않고 그가 새겼다는 '曾朱壁立(증주벽립)'이 새겨진 바위를 찾았는데 그 근처에 흥덕사 절터임을 알리는 표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 흥덕사는 태조 이성계가 태종때에 창건한 절이며 연산군때에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세월이 흘러 조선 중기에는 그 흥덕사 절터 부근이 송시열의 집이었으며, 또 세월이 흘러 조선말 고종때에 이르러는 피난가있던 명성황후의 還宮(환궁)을 점쳐주어 유명해지고 권세가 주어진 무당이 세웠다는 北廟(북묘)가 또한 그자리였다는 해석이다.

 

<지금 그곳에는 흥덕사터 표석과 하마비가 남이 있다. 이 하마비는 그때쯤 세워진것일듯 싶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은 北廟碑(북묘비)가 온전히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북묘를 고종 20년에 세웠는데 그 4년후인 고종 24년에 碑를 세웠다고 하며 고종이 글을 짓고 민영환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로서 부족하지만 동묘, 남묘는 현존하는 상태로... 북묘는 그 흔적을 찾아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北廟碑(북묘비)...>

  

 

 

蛇足)

한글전용도 좋지만, 한자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필요하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廟(사당 '묘')와 墓(무덤 '묘')를 구분 못해서, 아니 대부분 무덤 墓만 떠올리기에 혼란스럽다.

동묘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많은 사당(廟)이 있는데 그곳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에이, 묘는 없네~'하는 사람을 본다.

설명판에도 廟(묘)가 사당이라는 뜻을 써놓으면 좋겠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너무 많다

 

 

< 계  속 >

 

출처 : 김신묵의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비의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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