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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風流客 白湖 林悌 이야기 (퍼온글)

강나루터 2014. 12. 14. 21:02

조선 최고의 풍류남아 白湖(백호) 林悌(임제)
시한수에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백호 임제
기사입력: 2009/09/11 [16:05]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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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1-2번지

▲ 창계서원 전경 © 박태선기자


 

 

 

 

 

 

 

 

 

 

 

 

 

 

 

 

 

 

 

 

 

서원 입구에는 창계서원 碑(비)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임진의 추모비가 있다.

임진은 귀래정 임붕의 아들이며 백호 임제의 부친이다.

▲ 창계서원 앞 안내판 © 박태선기자


 

 

 

 

 

 

 

 

 

 

 

 

 

 

 

 

 

 

 

 

 

이곳에 들린 이유는 다른곳에 있다. 白湖(백호) 林悌(임제, 1549-1587)선생의

묘소를 들려보기 위해서였다.

이곳 창계서원 뒷산에 있는 선생의 묘를 찾아가기 전에 서원부터 들려보기로 했다.

▲ 永成閣(영성각) 현판 © 박태선기자

 

 

 

 

 

 

 

 

 

 

 

 

 

 

 

 


 

▲ 永成閣(영성각) © 박태선기자

 

 


 

 

 

 

 

 

 

 

 

 

 

 

 

 

 

 

 

 

 

 

 

창계서원은 호남이 낳은 큰 학자 창계공 諱(휘) 泳(영)의 祠宇(사우)이다.
林泳(임영, 1649-1696) 조선 후기 문신. 학자. 자는 德涵(덕함). 호는 滄溪(창계).

본관은 羅州(나주). 나주시 다시면 회진에서 一儒(일유)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종 6년(1665) 아버지의 명으로 靜觀齋(정관재) 李端相(이단상)의 문하에서 학문을하고,

생원시에 장원급제 1671년 庭試文科(정시문과)에 급제, 독서당에 뽑혀 賜暇讀書(사가독서)하였다.

그 뒤 吏曹正郎(이조정랑). 檢祥(검상) 등을 거쳐 숙종 20년 대사간.

開城府留守(개성부유수) 등을 지냈고 이듬해 부제학이 되었으며,

그 뒤 대사헌.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 梅溪影堂(매계영당) 현판 © 박태선기자

 

 

 

 

 

 

 

 

 


 

▲ 梅溪影堂(매계영당) © 박태선기자


 

 

 

 

 

 

 

 

 

 

 

 

 

 

 

 

 

 

 

 

 

창계의 아우 梅溪(매계) 林淨(임정)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매계공(1654~1710)은 남원부사를 거쳐 강화유수를 지낸 인물이다.

초상화는 매계공이 살아 계실 때 전문화가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영당은 창계서원이

이곳에 중건(1767)될 때 이 곳에 함께 세워졌다.

창계공이 세상을 일찍 떠나자 당신 청도 군수였던 아우 매계공은 형님 창계의 문집을 간행하였고,

창계 사후의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 健順門(건순문) 현판 © 박태선기자

 

 

 

 

 

 

 

 

 

 

 

 

▲ 健順門(건순문) © 박태선기자

 

 

 

 

 

 

 

 

 

 

 

 

 

 

 

 

 

 

 

 

 


창계서원의 내삼문인 사당 삼문이다. 건순문은 닫혀있어서

사당의 전경을 담지 못하고 되돌아나왔다.

▲ 백호 임제선생 묘역 가는 길 전경 © 박태선기자


 

 

 

 

 

 

 

 

 

 

 

 

 

 

 

 

 

 

 

 

 

 

원래의 목적지인 백호 임제선생의 묘소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신걸산 아래 입구에는 선생의 시비와 묘소를 알리는 팻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사이로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선생의 묘로 갈 수 있다.

▲ 백호 임제선생 시비 © 박태선기자

 

 

 

 

 

 

 

 

 

 

 

 

 

 

 

 

 

 

 

 

 

 

 

 

 

 

 

 


 

▲ 시비 © 박태선기자

 

 

 

 

 

 

 

 

 

 

 

 

 

 

 

 

 

 

 

 

 

▲ 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 박태선기자


 

 

 

 

 

 

 

 

 

 

 

 

 

 

 

 

 

 

 

 

 

 

 

 

 

 

 

 

林悌(임제, 1549-1587) 본관 나주. 자는 子順(자순). 호는 白湖(백호), 謙齋(겸재).
大谷(대곡) 成運(성운)의 문인. 선조 9년(1576) 生員試(생원시). 進士試(진사시)에 급제,

1577년 謁聖文科(알성문과)에 급제했다.

禮曹正郞(예조정랑)과 知製敎(지제교)를 지내다가 東西(동서)의 당파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詩風(시풍)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저서에 花史(화사) 愁城誌(수성지) 林白湖集(임백호집) 浮碧樓觴詠錄(부벽루상영록)등이 있고

조선 최고의 풍류남아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 박태선기자


 

 

 

 

 

 

 

 

 

 

 

 

 

 

 

 

 

 

 

 

 

 

 

 

 

 

 

 

당대의 한량이었던 白湖(백호) 林悌(임제)가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개성을 지나다가 평소에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풍류 여걸 황진이가 겨우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주고 아쉬운 심정을 詩(시) 한 수를 읊었다.

▲ 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 박태선기자


 

 

 

 

 

 

 

 

 

 

 

 

 

 

 

 

 

 

 

 

 

靑草(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紅顔(홍안)은 어듸두고 白骨(백골)만 무첫는고
盞(잔)자바 勸(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 백호 임제선생 묘 옆전경 © 박태선기자

 

 


 

 

 

 

 

 

 

 

 

 

 

 

 

 

 

 

 

 

 

 

 

 

그러나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致祭(치제)했다 하여 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다. 명색이 사대부 출신으로 벼슬하는 자가 천한 기생의 무덤에 찾아가

곡을 하며 제사를 지내고 시까지 읊었으니 그 알량한 양반의 체면을 형편없이

구겨버린 괘씸죄에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쫓겨난 것이 아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조정랑을 지냈다.

▲ 백호 임제선생 묘 © 박태선기자


 

 

 

 

 

 

 

 

 

 

 

 

 

 

 

 

 

 

 

 

 

그후 중앙요직에 다시 복직되었으나 四色黨爭(사색당쟁)의 벼슬길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가 짧고 굵게 살았던 황진이처럼

39세의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한다.

▲ 묘 앞 문인석 © 박태선기자


 

 

 

 

 

 

 

 

 

 

 

 

 

 

 

 

 

 

 

 

 

 

 

 

 

 

 

 

묘 앞쪽 옆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임제의 외손자 허목이 撰(찬)한 것이고,

하나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묘 뒤에서 본 안산 전경 © 박태선기자


 

 

 

 

 

 

 

 

 

 

 

 

 

 

 

 

 

 

 

 

 

황진이가 조선시대의 名妓(명기)중에 명기라면, 백호는 조선시대의 한량 중에 한량이다.

아니 풍류객 중에 풍류객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세상을 사는 것이 바람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풍류야말로 우리 고유의 멋 아닐까

▲ 돌계단 © 박태선기자


 

 

 

 

 

 

 

 

 

 

 

 

 

 

 

 

 

 

 

 

 

풍류를 즐긴 백호 그의 일화 중에 유명한 것이 寒雨(한우)와의 사랑이다.

寒雨(한우)는 평양의 명기. 가야금을 잘 타고 시에 능한 콧대 높은 기생이었다.

그런 한우를 백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유혹하였다.

북창이 맑다고 하기에 雨裝(우장)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한우 기생은 백호에게 이렇게 화답을 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일 얼어 자리
원암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의 순수한 우리말은 '찬비'이다. '찬비'는 기생 '寒雨(한우)'를 은유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한우의 화답 또한 뛰어나다.

'무엇 때문에 찬 이불 속에서 혼자서 주무시렵니까.

저와 같이 가슴 맞대고 따뜻하게 주무시지요' 한다.

일설에 의하면 하룻밤을 같이 잔 한우는 백호에게 푹 빠져서 같이 살자고 했으나,

백호는 이를 뿌리쳤다 한다. 한량끼가 너무 많아서 그랬을까.

▲ 묘가 있는 산 전경 © 박태선기자


 

 

 

 

 

 

 

 

 

 

 

 

 

 

 

 

 

 

 

 

 

 

임백호가 숨을 거두기 전, 유언으로 남긴 말은...

"사방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지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그러지 못하니, 이런 못나고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었다고

무엇이 아깝고 서럽겠느냐. 내 죽음에 곡을 하지 마라."

한마디로 그의 성품과 기개를 단적으로 잘 나타낸다. 그가 명당에 묻혔건,

그러지 못했건 그건 임재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한 선생의 묘에는 감히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엿보였다.


출처 : 蘭 坡 陋 室 (난파누실)
글쓴이 : 난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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