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가을까지 남대리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요” | ||||||||||||||||||||||||||||||||||||||||||||||||||||||||||||||||||||||||||||||
우리마을탐방[3] 삼도 접경마을 남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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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가구까지 줄었다가 현재 72가구 140명 거주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이 경계를 이루는 삼도 접경 지역으로 아주 특별한 곳이다. 남대리 남쪽엔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구령이 있고, 북쪽은 백두대간 선달산에서 갈라져 나온 어래산이 있으며, 서쪽은 백두대간 형제봉에서 갈라져 나온 베틀재와 마대산으로 이어진 줄기가 에워싸고 있는 천상의 요새이다. 이 골짜기엔 선달산에서 발원한 하흘천이 흐른다. 이 물은 남대리를 지나 김삿갓계곡을 거쳐 영월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군사 요충지로 신라를 침공한 고구려 장수왕, 견훤의 군사와 대치하면서 머물렀던 왕건, 홍건적의 난에 몽진하여 이곳을 지나간 공민왕 그리고 조선조 단종의 흔적을 간직한 마을이다.
▲ 남대리 가는 길 = 남대리 가는 길은 부석면 소재지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가다가 좌회전하여 남대리, 임곡리 방향으로 향하면 과수원길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도로 폭이 좁아진다. 그 길을 10여 분간 굽이굽이 힘겹게 올라서면 해발 820m 백두대간 마구령에 다다른다. 마구령에서 한숨 돌린 후 내리막길을 10여 분간 달려 ‘주막거리’에 이르면 여기서부터 남대리가 시작된다. 주막거리에서 만난 이 마을 청년 이정표(46)씨는 남대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준다. “삼도접경공원에 있는 ‘짐대배기’마을을 1반으로 학교 앞은 송내 2반, 주막거리는 터골 3반, 선달산 방향 골짜기는 상신기 4반 등 4개 반(마을)으로 이루어져 있다”며 “귀촌인이 60% 쯤 되는데 여기로 오신 분들은 화가, 작가, 산꾼 등 다양하며, 집만 덩그러니 혼자 사는 집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이 씨는 또 “이곳 주막거리에는 70년대까지 술도가가 있었고 옛날에는 마구령 너머 부석장을 넘나드는 장꾼들이 많았다”고 하면서 “의풍리(영춘), 와석리(영월), 남대리 사람들이 소를 몰거나 봇짐을 지고 부석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 마을이름의 유래 = 남대리는 아주 옛날에 화전민들이 이룩한 마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대리란 지명은 순흥에 위리안치 된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위해 이곳에서 자주 밀사를 모의했으나 실패하자 그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남대궐’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주막거리에 생방터(밀사를 모의한 곳)가 남아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남대리는 백두대간 너머에 있어 충청도이거나 강원도가 돼야 하는데 경상도 땅이다. 옛날 조선의 임금은 팔도를 거쳐 온 물을 다 먹어야 팔도를 고루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남대리가 경상도 순흥땅이 된 연유이다. 남대리에는 삼도접경공원이 있고 의풍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 유서 깊은 ‘짐대배기’마을이다. 구한말 의병대장 이상년 장군이 왜군과 격전하던 곳으로 ‘짐대’는 ‘당간’ 곧 ‘깃대’로 의병의 깃발을 세웠던 자리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별장마을로 변해가는 남대리 =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대리에는 200가구가 넘게 살았고 술도가(양조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산촌 인구 감소로 40가구까지 줄었다가 최근 귀촌 바람를 타고 이주한 사람들이 많아 현재 72가구에 140명이 살고 있다”고 임수경 이장은 전했다. 남대리에서 일평생을 살아 온 임제월(79) 할머니는 “영월 조재에 살다가 6·25 때 이곳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16살에 시집보내니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었다”며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보리가 누룸하면 그걸 볶아서 찧고 까불어서 먹고 살았다. 그렇게 어려웠지만 8남매를 낳았고 모두 남대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남대리 출신으로 수도권에서 부동산업계 CEO가 된 김모 씨(여, 44)가 고향집(어머니 유씨, 70)을 찾아 왔다가 언덕배기 비탈길에서 기자를 만났다. 김 씨는 “남대리가 최근 들어 별장마을이 돼 가고 있다”며 “어릴 적 이 곳에 살면서(남대초 졸업) 아버지(한학자, 지관)로부터 땅의 소중함을 배웠고 아버지의 채찍과 훈계는 어려운 고비고비마다 지혜가 됐다”고 했다. 그는 또 “자연(땅)이 준 교훈은 순리였고 순리의 지혜는 나를 부동산전문가가 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땅값이 도로변엔 평당 50만원, 산골짝도 15-20만원대라고 하니 수억대의 재산을 물려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옛집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짐대배기에 살고 있는 이신식(78, 공주이씨) 어르신은 “60년대까지 마을에는 움집 같은 초가집뿐이었다. 박 대통령 때 새마을사업으로 스레트지붕으로 개량돼 지금까지 오고 있는데 영주가 영춘이나 영월에 비해 지원이 더딘 것 같다”고 하면서 “도로가 포장되고 길이 조금은 좋아졌지만 아직 불편한 점이 많다. 빨리 터널이 뚫리고 버스도 다녀 병원 가기가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남대리 선진화의 주인공 임수경 이장 = 임 이장의 이장 경력은 30년이 넘는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대리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남대리 계곡에 가득하다. 임 이장은 “한강의 발원지가 남대리다. 한국 제일 청정지역 남대리에서 부석태(콩)로 된장을 담그는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고 있다”며 “지난 2월 6일 ‘KBS 6시 내고향’에 장담그기가 방영된 후 전국 각지에서 문의(054-638-3859)가 쇄도해 4월 12일 된장담그기 체험행사를 다시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임 이장은 또 “봄부터 가을까지 남대리 오토캠핑장을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여름휴가기간인 7~8월의 예약(010-3540-0470)은 6월이면 끝난다”고도 했다. 임 이장은 이외에도 산삼전시관을 세워 생산자와 소비자가 산삼·장뇌삼을 직거래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지역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한 공이 크다. 최근 남대리에는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온 화가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북한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남대리에 정착한 조칠 화가는 백두대간 여러 곳을 답사하다 임 이장과 인연이 닿아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조 화가는 “남대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 먹거리 등을 그림에 담아 청정지역 남대리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임 이장이 앞장서 주선한 일로 임 이장은 오늘도 남대리를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 절간 같이 조용한 현정사 = 2001년 ‘파란 눈의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부임하여 화제를 모았던 현정사가 남대리에 있다. 이날 기자가 남대리 현정사에 갔을 때 현정사는 정말 절간 같이 고요했다. 너무나 조용해 숨을 죽이고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때 대웅전에서 주전자를 들고 나오는 해암 거사(부산, 69)를 만났다. 거사는 현정사에 대해 “16년 전 정 보살이라는 분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숭례문 부실복원으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신흥수 대목장이 지었다”고 했다. 거사는 “창건 당시(2001) 초대 주지로 현각 스님이 부임해 화제를 모았던 절로 부산, 울산, 서울 등 전국에 3천명의 신도가 있으며 참선을 주로하는 절”이라고 했다. 거사는 또 “이 절을 창건한 정 보살은 범어사 주지이신 수불 스님에게 이 절을 양위했고 지금 주지는 영산 스님으로 수불 스님의 상자(자식)”라고 했다. 해암 거사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로 법당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절집 뒤의 어래산과 절 앞 아름다운 경치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거사는 한사코 기자를 지하 식당으로 안내하여 국수를 삶아 점심공양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했다. 차를 타고 마구령을 넘어 오는 동안 부처님 얼굴을 닮은 거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병원에 안 가봤어요. 산삼을 많이 먹어 그래요” ■ 남대리 유일의 초등생 태웅이
부석초등학교 남대분교장은 2010년 3월 1일 폐교됐다. 1947년 개교해 71년 본교로 승격할 당시 전교생이 15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90년대 이후 급격한 산촌인구 감소로 분교로 격하됐고 폐교 당시 학생은 단 1명뿐으로 지금까지 공부방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공부방의 주인공은 임태웅(6학년)군 이다. 임 군은 키도 크고 잘생기고 씩씩한 학생이다. 친구가 없는 게 흠이 되지만 책과 컴퓨터가 친구를 대신해 준다. 책을 많이 읽고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임 군은 장래 희망이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태웅이네 집은 주막거리에서 우측길로 접어들어 급경사 오르막길을 300m 쯤 올라 남해골에 있다. 겉은 양옥 2층집이지만 내부는 황토방으로 현대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집이다. 공부방 권정석 선생님은 오전 8시 30분 남해골 입구에서 태웅이와 만나 승용차로 공부방이 있는 학교로 간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교과활동과 특별활동을 한다. 태웅이는 “국어도 좋아하지만 수학과 과학이 재미있다”며 “선생님과 장기, 바둑을 두는 재미가 끝내준다”고 말했다. 컴퓨터 공부는 누구와 하느냐는 질문에 “기초는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고 선생님이 책도 사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했다. 태웅이는 얼굴색부터 매우 건강해 보인다. 이에 대해 “전요, 병원에 안 가봤어요. 산삼을 많이 먹어 그렇요”라고 하면서 “조금 아플 때도 있는데 그 때는 어머니가 한방약재를 다려 주시는데 그걸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도 했다. 태웅이 아버지 임운철(46) 씨는 황토방 건축전문가로 태·소백 산간지역 건축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는 태웅이 교육문제에 대해 “친구와 어울림이 없고 대인관계가 없는 게 단점이다. 태웅이가 하고 싶은 컴퓨터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중학교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며 “아직 어려서 멀리 보내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태웅이는 지금 6학년이다. 태웅이가 졸업하게 되면 이 학교는 학교의 역할을 다하고 문을 닫게 된다. 경상북도교육청은 산간벽지 오지마을 어디라도 학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선생님을 보내 교육한다고 하니 우리 교육이 자랑스럽다. 이원식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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