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계 조위 (梅溪 曺偉) 행적 1454~1503년 호조참판.
매계 조위(曺偉)는 1454년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동에서 현감 계문의 아들로
태어나 1474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종2품 호조참판 암행어사 하정사 (특사)를
지냈으며. 성종 임금의 명을 받아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의제(義帝)를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사육신(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劉應孚. 柳誠源.)을 추모하는 서문을
싫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본래부터 김종직과 사이가 좋지 못하던 이극돈,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 때
성종 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에서 조의 제문을 발견 이는 단종을 조상(弔喪)
하는동시에 세조를 음기 하는 것이라 본래 사림(士林)을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이미 죽은 김종직(金宗直)의 시체를 파내어 목을 베게하였고.
제자인 김일손을 죽였다.
조위는 1498년 성절사(중국 명나라 청나라 사절단)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의주에서 투옥되었으나 이극균의 극 간으로 의주에서 장류되어 순천에서
죽음을 당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 사림의 대학자로 추앙 김종직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기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박학(博學) 여문의 문사로서 제자가
많았으며, 작품에는 부산조계문묘비(釜山曺繼文墓碑)가 있다.
대의와 명분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성장한 영남사림은 김종직과 문인 조위
유호인 정여창 김일손 등이 대거 진출하는 세조 성종대에 으르면 훈구세력
일색인 중앙정계에 신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훈구대신들에게 둘러싸인 성종이
김종직과 그의 소장 문인들의 뛰어난 문장과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중용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신숙주 강희맹등 영남출신 원로들의 적극적인 후원도 컸던 것도
사실이다.
영남 사림의 대표격인 김종직은 지방수령과 시강관 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쌓은 업적으로 당대 조정을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김종직의 이같은 위치는 그의 문인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훈구파들은 자연히 김종직을 경상도 선배당으로 몰아 붙이던 중 연산군
즉위와 함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실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 40여 명을
제거했다.
무오사화의 도화선은 지춘추관사인 조위와 사관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신록에 그대로 수록한데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영남사림에 대한 훈구파의 뿌리깊은 질시와 불안이 짙게
깔려있었다.
무오사화로 조위 ,유호인, 표연말,김굉필,정여창 등 영남 사림이 대거 숙청
됨으로써 사림은 잠시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이사화중에서 도학의 학통을 조광조로 이어저 사림이 기호지방까지
확산된다.
한편조위를 비롯한 영남사림의 문장활동은 유배지에서도 활발하여 후일
국문학사상 한 장르를 연 유배가사가 이때 이루어젔다.
본광 창녕이고 호가 매계인 조위는 단종2년(1504)경북 금능군 봉산면
인의동에서 태어났다 조위의 아명은 오룡인데 서제(庶弟)조곤과 함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시를 지을줄 알았다.
그러나 조위의 학문은 김종직(조위 자형)과의 만남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가 열 살때 누나가 김종직에게 출가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김종직의 문인이
됐다.
자형 김종직 에게서 예기와 문장을 배운 조위는 18세 때 생원진사에 3장
장원급제했다.
21세 때 문과급제하면서 관계에 진출했다. 승문원정사 예문관검열을 거처
23세 때 성종의 명으로 갓생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 조위는 양희지,조호인,권건등과 장의사에서 글을 읽었는데 조위가 제일
나이가 적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일손 강위등 문우들이 속속 호당에 들어와 마치 세종때
집현전 학사들이 사가독서 하는 것과 방불했다.
조위의 벼슬은 누진되어 25세에 홍문관 교리와 박사가 되어 임사홍을 탄핵했고
이듬해엔 경차관으로 평안도 삼봉도의 난민을 수습했다. 또 김흔과 함께 일본
통신사 이향원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세종 때 착수했던 중국 만당의 시성 두포의 시를
언해하는데 심혈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성종은 이작업의 최고 책임자로
명문장가이며 국문에 조예가 깊은 조위를 임명했다.
성종이 두시언해를 국가적 사업으로 완결 지우려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교일국을 내걸고 개국한 조선은 착착 그 기반이 다저젔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은 건국이념인 유학의 핵심인 정통사상과 대의명분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점을 염려한 성종은 우국충절의 내용이 풍부한 두포의 시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민심을 국왕과 국가에 돌리려고 했다.
원래 두포의 시는 세종때 영천사람 유윤겸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란
이름으로 주석해 놓은것이 있었다. 유윤겸은 두시의 대가이자 父인 유방선의
가학을 이어 두 시에 능통했는데 이때 조위의 소개로 두시언해 작업에
참가했다.
성종 12년 조위가 28세 때 유윤겸 義砧등과 함께 완성한 두시언해는 조위가
서문을 쓰고 활자로 인쇄됬다.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을 역임한 조위는 31세 때 부모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자청해 고향 부근인 함양군수가 됐다. 조선초 이래 유학자들에 의해 널리
숭상된다.
이같은 위친걸군(爲親乞郡)은 김숙자 김종직을 거처 문인 유호인 조위 정여창
등이 실천에 옮겨 성리학 윤리를 실천하고 지방교육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역임한 함안 선산 합천 의성 고령 등지를 중심으로 문풍이 크게
진작됐다.
영남이 명실상부한 인재의 부고로 불리게 된것도 이때부터 비롯됬던 것이다.
소학 대학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영남사학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이 성리학과
사장을 겸비했던 만큼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도학과 문장의 두 계보로
나뉘었다.
김굉필 정여창이 도학에 치중하여 만년에는 시작(詩作)에서 손을 때다 시피 한
반면, 조위 유호인 김일손 등은 문장과 경사에 뛰어났다.
특히 조위는 시노(詩老)별명을 얻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20대에 성종 제일의
충신이 됬다.
김종직이 성종23년에 죽자, 조위는 성종의 명으로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었는데 이것이 후일 유자광 이극돈에게 역신으로
몰리는 단서가됐다.

금능군 봉산면 인의동 조위의 태생지에 남아있는 梅溪舊居

매계구거 현판 (송시열 글씨로 추정)
연산군4년에 서제 조곤과 함께 중국에 성절사로 갔다오던 조위는 료동에서
무오사화의 비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는 즉시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알았다. 일행은 몰라 어쩔줄 모르는데 그는 태연히 갈길을 재촉했다.
마침 료동에 점을 잘치는 추원결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곤이
찾아갔다. 추원결은<천충의 물결속에서 몸을 뛰처나와 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세밤을 자겠다>하는 시를 써주었다.
일행이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건너니 뜻밖에도 이극균의 극간으로 조위의
사형이 취소되고 의주로 귀양가게됐다는 소식이 전해젔다.
추원결이 <천층 물결속에서 뛰처 나온다>고 한것은 바로 압록강을 건너서도
살겠다는 뜻이었으나 아래구절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뒷날 조위가 순천에서
죽은후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덤앞 바위 밑에서 부관참시되 3일간 시체를
늘어놓자 사람들은 추원결의 점괘가 딱 들어 맞은데 놀랐다고한다.
의주로 귀양간 조위는 몇 평안되는 귀양지에 해바라기 수십그루를 심고 띄풀로
역은 작은 정자를 지어 규정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죽은 성종에 대한
사모의 정을 해를 그리는 해바라기로 나타낸것이었다.
순천으로 다시귀양간 조위는 玉川가에 임청대(臨淸臺)라는 단을 쌓고는 같이
귀양온 문우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기도했다.
이무렵 그는
천상백옥경 의 십이루 어듸메오
오색운 깊은곳의 자청천이 가려시니
천문 구만리를 꿈이라도 갈동 말동
차라리 싀어지어 억만번 변화하여
남산 늦은 봄의 두견의 넋이되어 ...라는 만분가 를 지어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길없는 비분을 천상의 옥황(성종)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이
만분가는 국문학 사상 유배가사의 효시로서 높이 평가 받고있는 것이다.
현재 조위의 고향인 김천시 금능군은 조위를 기리는 뜻에서 매계백일장을
매계 조위의 태생지인 봉산면 인의동 숲에서 열고있다 .
직계손으로는 15대 종손인 명준씨 가 있으며 후손들은 봉산면에 1백5십호
창녕에 200호 등 2만여 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