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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동묘

강나루터 2015. 2. 11. 10:38

 

 

 

만동묘

화양동에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 있었다. 만동묘이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우리 나라를 도와주웠고 의종은 신종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왕이다. 왜 화양동에는 조선왕조의 왕도 아닌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 있었던 것일까? 

우암 송시열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우암의 사대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이 만동묘라고 한다. 더 나아가 만동묘는 대표적인 조선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비판되곤 하였다. 과연 그러한지, 만동묘를 짓도록 한 우암의 진정한 속뜻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동묘의 창건 계기는 우암의 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암은 1689년(숙종 15) 5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었다.


일찍이 나는 늘 마음 속으로 환장암 뒤편 왼쪽에 한 채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고 써서 봄가을로  무이신례(武夷神禮)에 따라 마른 고기로 제사를 올리는 동시에 술은 서실(書室) 텃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결하게 빚고 오직 축사만은 성대하게 칭송하고자 하였네. 이 일을 마음속으로 경영한 지 오래였는데 이루지도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큰 한이 어디 있겠는가.


우암은 환장암 뒤편 왼쪽에 사당을 짓고 명 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권상하를 비롯한 제자들은 우암이 남긴 뜻을 받들어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짓는 일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사사로이 설치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 있고,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암은 중국의 여러 사례를 들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 데다, 권상하 역시 중국 기나라의 하묘(夏廟)와 송나라의 은묘(殷廟) 제사를 들어 만동묘를 지어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드디어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는 조정의 허락없이 우암의 제자와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1704년(숙종 30) 화양동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만동묘 위치는 환장암에 건립하려는 우암의 계획과는 달리 우암이 살던 초당 옆에 건립하였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이란 글에서 ‘萬’과 ‘東’자를 취해 지은 것이다. 만절필동이란 뜻은 황하의 물줄기가 만번 꺽이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반드시 동쪽에 있는 조선으로 흐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암은 만동묘를 짓고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한 것일까? 우암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신종이 조선을 도와준 은덕을 찬양하였으며, 그 덕분에 멸망할 위기에 있던 조선이 다시 번성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의해 멸망된 중화의 정통왕조 명나라에 대한 의리이자 정통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창건된 만동묘는 1710년(숙종 36)에 우암을 제사하는 화양서원과 합께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본산이 되었다. 춘추로 지내는 제사 때는 호남과 영남의 선비들까지 모여 참여자가 수백 명이나 될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

더욱이 1726년(영조 2)에는 우암의 문인으로서 당대 노론을 이끌었던 민진원이 만동묘를 중수한 뒤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니,1) 조정에서는 관둔전(官屯田) 5결(結)의 땅과 노비를 주었다. 1744년(영조 20)에는 충청감사가 만동묘의 중수를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747년(영조 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키게 하였으며 만동묘의 창건 내력을 적은 묘정비(廟庭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1776년(정조 1)에는 정조가 친히 ‘만동묘’ 글씨를 써서 사액하였을 뿐 아니라, 1809년(순조 9)에는 기존의 사당을 헐고 다시 짓도록 하였다.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번씩 충청도관찰사가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1704년 창건 이래 조정에서는 만동묘를 극진히 다루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였던 영조∙정조시대에 크게 번창한 만동묘의 건물은 지패(紙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上丁)에 봉행하는 제사를 올리는 묘우(廟宇)가 5칸, 제관의 숙소 또는 유림들의 회합이나 학문 토론장소로 쓰이던 3칸의 정침과 그 동서쪽에 각각 1칸의 협실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당보다 규모가 컸다.

 

그리고 ‘성공문(星拱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삼문과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었으며 외곽의 담장이 남북으로 길게 사당을 두루고 있다. 그리고 외삼문 밖에는 나란히 2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오른쪽(동) 건물은 제물을 준비하던 증반청(蒸飯廳), 왼쪽(서)은 집사의 숙소로 쓰이던 존사청(尊祀廳)이 있었다. 서쪽 입구에는 주문인 진덕문(進德門)과 홍살문, 하마비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만동묘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조 이래 노론정권이 장기 집권하고 송시열의 화이론이 그 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세가 날로 증대하여 폐단도 자못 컸다. 만동묘는 그 당시 전국의 서원이나 사당 중에서 가장 위세를 부려 폐해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1865년(고종 2) 3월 29일 대원군은 명나라 황제들을 대보단(大報壇)에서 제사지내므로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만동묘에 안치되어 있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지방과 만동묘 편액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그뒤 많은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았으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이항로․최익현 등 유림들의 거센 상소로 1874년 2월에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바뀐 상황에서 만동묘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었다. 1908년 일본 통감부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소유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그에 맞서 1910년에 송병순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하여 제사를 비밀리에 올리는 등 유림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17년에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들은 계속 제사를 올렸다. 1937년에도 일제는 유림들을 구속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던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42년에는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1943년에 만동묘는 완전 철거되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만동묘 묘정비는 앞 개울에 매몰되어 있었는데, 1983년 홍수 때 발견되었다. 현재는 1996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져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돌계단과 주촛돌만 쓸쓸히 남아 있던 만동묘는 2006년에 진덕문과 홍살문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복원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최근 만동묘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찬반 논란이 거셌다. 찬성하는 쪽의 입장은 만동묘가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교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조선중화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복원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원을 반대하는 쪽은 만동묘가 조선 사대주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자 조선후기 정치 및 사회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다는 점을 지목하고 있다. 양자의 시각차가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 만큼이나 크고 극단적이다.

그러나 만동묘를 처음 세우던 당시 우암의 순수한 뜻과 이후 만동묘를 끼고 자행된 유림들의 작폐는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암이 만동묘를 세운 목적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명나라가 오랑캐나라인 청나라에게 멸망해서 끊긴 중화의 정통을 이어받기 위한 의례적 표현이었다. 성리학에서 정통을 잇는 가장 확실한 예의범절은 제사였던 만큼, 명나라 마지막 황제에 대한 제사는 황제에 대한 사대적 표현이 아니라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동묘를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만동묘는 현재 증산교와 대순진리회의 성지이다. 강증산(1871~1909)은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道典 5:325:1~10)이라 하였다. 이 말은 조선중화주의의 상징체인 만동묘가 세계의 중심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오는 신도적(神道的) 디딤돌이 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강증산은 도통한 뒤 제일 먼저 만동묘를 찾았다. 이는 곧 조선이 세계 개벽의 중심국가로서, 그 연원이 만동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의 정통 계승의식은 곧 조선중화주의가 계승 발전된 한 모습이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설령 만동묘를 조선중화주의의 상징체로 평가할지라도, 그것을 복원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복원 전 만동묘의 쓸쓸한 모습이 더 많은 역사의 추체험을 하게 한다는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끼 낀 돌계단과 앙상히 남아 있던 건물의 주촛돌은 사라진 왕조를 연상하게 할 뿐 아니라, 이곳에서 지낸 제사의 의미를 더욱 곱씹어 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함께 고민될 때 복원한 만동묘의 참 가치는 더욱 빛날 수 있으리라.

출처 : 화사모<화양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이순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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