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신도비등 석물(10.14)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에는 두가지 문화유적이 있다.
하나는 금천교인데 일제에 의해 일본인 중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헐려 땅속에 묻혔다는 것이다.
원래 궁궐 정문을 들어서면 금천이라는 개울을 건너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2001년에 복원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리 옆에는 난간이 있는데 안상문양의 풍혈이 있다.
다리 난간 밖에도 동물모양의 석물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또하나는 운현궁 신도비 등 석물이 있다.
능에 있는 동물모형의 석물이 있고 고려시대 탑도 있다.
석물에는 유독 조선 황실의 문양이 오얏문양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은선군신도비, 흥친왕신도비, 영선군신도비, 이우신도비가 있고 몇 개의 묘표, 묘갈도 있다.
은선군신도비의 글은 정조대왕이 직접 글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썼다고 한다.
나머지는 한말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서예가가 썼다고 한다.
신도비와 석물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있어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아래 내용은 인터넷에서 퍼온 것입니다.
운형궁 일가 묘소에 있던 석물이다. 원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번지 일대인데,운현궁 측에서 기증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재질은 화강암과 흑요암(일명오석)으로 비석의 갓과 대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요암이다.
운현궁의 연원은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신군은 정치적인 이유로 17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도로 귀양가 죽었다. 요절한 그를 위해 정조는 즉위 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었고 다음 임금인 순조는 인평대군의 후손 남연군으로 하여금 그의 가계를 잇도록 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은 왕위(고종)에 올랐고 임금의 본가는 운현궁이 되었다.
정조는 재위 7년인 1783년 은신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직접 글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써서 그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주었으니 이것이 ' 은신군 신도비'이다. 그 외 ' 은신군묘표" 계보상 은신군의 종숙인 낙천군 이온의 '낙천군묘표' 그리고 흥선대원군 아들 이회(재면)의 '흥친왕신도비' 그 아들 이준(준요)의 ' 영선군신도비' 그리고 ' 이문용묘갈'(이준 동생) ' 이우신도비(이준아들),'이종묘표(이우 아들)'가 있다.
이문용묘갈,흥친왕신도비,영선군신도비에는 한말의 대표적 문장가인 김윤식이 글을 짓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윤용구와 김성근이 글씨를 썼다.미석들 이 외에도 영선군 묘소나 이우묘소의 석물들이 있다.
영선군신도비(永宣君神道碑) 1919년
영선군(永宣君) 이준용 [李埈鎔, 1870~1917]
자 경극(景極). 호 석정(石庭) ·송정(松亭). 흥선대원군의 손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세마(洗馬)가 되고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檢閱),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냈다. 이어 부응교(副應敎) ·형조참의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홍문관직제학(直提學) ·도승지에 올랐다.
1894년 법부협판(法部協辦) 김학우(金鶴羽) 피살사건에 연루,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전으로 석방되었다.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의 내부협판 ·통위사(統衛使)에 등용, 곧 칙명으로 유학차 일본에 갔다가 주차일본공사(駐箚日本公使)가 되었다. 1910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 육군참장(陸軍參將)이 되었다. 일본측의 압력으로 내부협판에서 물러났을 때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흥친왕신도비
흥친왕(興親王)이재면 [李載冕, 1845~1912]
자 무경(武卿). 호 우석(又石). 희(熹)로 개명. 흥선대원군의 장남, 고종의 형. 1864년(고종 1) 문과정시(文科庭試)에 급제, 규장각 대교(待敎)와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이조참의 ·이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1881년 금위(禁衛)대장이 되어 돈령부판사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무위(武衛)대장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호조판서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 ·삼군부지사(三軍府知事) ·훈련대장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겸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좌찬성(左贊成)과 좌우참찬(左右參贊)을 겸임, 1894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고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지고, 1910년 흥친왕(興親王)에 책봉되었다.
은신군묘표
은신군 [恩信君, ?~1771]
이름은 진(禛 ).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 정조의 이복동생.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조부. 어머니는 숙빈(肅嬪) 임씨(林氏). 1771년(영조 47) 앞서 영조를 충동질하여 장헌세자를 굶어죽게 한 김구주(金龜柱) 일당의 무고로, 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관작을 박탈, 제주로 유배되어 죽었다. 뒤에 추복(追復)되고, 연령군(延齡君) 헌(昍 )에게 적통(嫡統) 입적되었다.
오얏꽃은 ‘이화李花’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자두나무꽃이며, 대한제국 황실 상징으로 사용된 문양이다. 오얏꽃문양은 조선 말기에도 궁궐 장식과 화폐에 표현된 예가 일부 보이지만, 대한제국 설립 이후에 공식적인 황실 문장으로 창덕궁 인정전과 덕수궁 석조전 등의 건축물, 새롭게 제정된 훈장과 군복, 황실 공예품에 사용되었다.
문장의 구성은 오얏꽃을 매우 간결하게 정형화하여, 다섯 개의 꽃잎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고 각각의 꽃잎에 세 개의 꽃술을 일정하게 배열한 것을 기본 형태로 한다. 황족들 중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을 응용하여 문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운현궁雲峴宮에서는 오얏꽃을 가운데 두고 둥근 띠를 한 줄 두른 것, 사동궁寺洞宮에서는 오얏꽃에 둥근 띠를 두 줄 두른 것을 사용하였다. 오얏꽃 문장은 대한제국 황실과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황족의 생활공간과 생활용품 등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타깝도다! 명(命)이란 무엇인가? 원망도 탓도 할 수 없느니라 하셨으니 내 마음 속 깊이 허전하도다."( 君子曰噫 命也如何 匪怨匪尤 予懷孔多)
요절한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을 위해 조선왕조 제22대 군주 정조(正祖.1752-1800)는 이렇게 말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서는 "혼이시여! 얼마나 안타까우신가? 유궁(幽宮. 무덤)에서 편안하소서"(魂兮奚憾 安此幽宮)라고 노래했다.
17세에 요절한 동생을 위한 정조의 이런 만가(輓歌)는 흥선대원군 묘소가 있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번지 일대에 있던 은신군(1755-1771) 묘소 앞에 있던 신도비(神道碑)에 새겨져 있다.
이 신도비가 올초에 서울시립박물관(관장 김우림)에 기증돼 이곳 광장 앞 녹지대에 다른 기증 석조물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화강암 머릿돌을 얹은 흑요암(일명 오석) 비신(碑身)에 정자체로 새긴 신도비문은 정조 친필로 돼 있다.
은신군은 어떤 인물이며 정조와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일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조 조부인 영조 때 발생한 사도세자 옥사사건을 마주하게 되며, 아울러 그의 후손을 훑어가는 과정에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만나게 된다.
은신군은 아버지가 장헌세자(莊獻世子), 즉, 사도세자이지만 혜경궁 홍씨가 어머니인 정조와는 배가 달랐다.
은신군 외에도 정조에게는 이복 동생으로 은언군(恩彦君.1755-1801)과 은전군(恩全君.1759-1778)이 있었다. 하지만 순빈임씨 소생들인 은언군과 은신군, 경빈박씨 소생인 은전군의 세 이복동생은 모두 제 명을 살다가지 못했다.
정조 즉위 후 은전군은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며 역모를 꾀했다 해서 사사됐고, 은언군은 영조 47년(1771)에 사소한 죄를 지었다 해서 3년 동안 유배되었다가 정조 10년(1786)에는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모반하려 했다 해서 강화로 유배되었가가 순조 원년(1801)에 결국은 사사됐다.
은신군 역시 영조 47년에 은전군과 함께 죄를 뒤집어 쓰고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거기에서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이상한' 죄목이 더해져 역시 사사되었다.
정조의 이복형제들에 대한 이런 처단은 결국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기반 강화를 위한 영조의 조처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동생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즉위한 정조는 그 원년에 은신군을 숙종의 서자로서 이미 죽고 없는 연령군의 양자로 들이게 하는 한편 즉위 7년째인 1783년에는 직접 신도비문을 손수 써서 추모하는 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문을 쓰면서 정조는 이복동생 은신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할아버지 영조를 탓할 수도 없고, 당사자인 은신군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이에 정조는 이 신도비문에서 그의 죽음이 명(命)이라고 했다. 문맥상으로는 네 팔자가 그렇다는 운명론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정조를 이어 즉위한 순조는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 후손인 남연군을 은신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그 가계를 잇도록 했다. 남연군은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따라서 생물학적 혈통은 다르나, 억울하게 죽은 은신군은 손자가 대원군이 되고 증손(고종)을 왕으로 배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과 고종-순종 시대에 은신군은 대대적으로 현창되었을까?
신도비 기증을 계기로 은신군 계보를 추적한 서울시립박물관 김문택 박사는 "이상하게도 고종 가문이 은신군을 족보에서 빼어버리려 한 흔적이 농후하게 드러난다"면서 "아무래도 서자인 은신군에서 계보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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