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사 혜련부도>
달을 건져 올린 여인
고운체로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져내는 여인의 모습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정현스님의 마음은 자꾸만 위축되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맞잡아 쥔 손에는 초조와 긴장으로 땀을 쥐고 있었다.
여인이 달을 건져낼 수만 있다면 자신과는 끝장이었다.
그토록 갈망해오던 여인과의 삶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었다.
정현스님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자비하신 부처님, 저여인이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질 수 없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꿈에도 그리던 저여인과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가게 하옵소서.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이옵니다...으흐흐흐...관세음보살님!'
그는 기도를 하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몇 년간을 짝사랑하여 온 결과가 수포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고아로 자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얼굴을 모르고 성장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김씨 성을 붙여 주기도 했고 박씨 성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그에게 친절하게 해주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직 신혼이었던 아주머니는 그를 친동생처럼 돌보아 주곤 했다.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아 보지 봇한 그는 그 아주머니에게서 어머니 같고 누님 같은 정을 느꼈다.
그러던 그에게 슬픔이 찾아왔다. 아주머니가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린 것이다.
그는 슬픔을 주체할 길 없었다. 며칠을 두고 방황하던 그에게 삶의 길을 바꿔 놓은 전환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어떤 스님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아주머니의 죽음에 시달림을 왔던 스님이었다.
"총각, 너무 상심하지 말게. 인생이란 어차피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 아니던가.
자네가 그 슬픔을 억제할 수 있는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두를 털어 버리는 공부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네. 어떤가?
총각. 자네 한 번 멋지게 중 노릇 해볼 생각은 없는가?보아하니 그릇은 충분하이."
그렇게 해서 그는 집을 나왔고 관음사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에 어떤 사람의 소개를 받고
이곳 모후산으로 오게 된 것이다.
모후산은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정현스님이 공부하던 관음사는 곡성군 화면 선세리 성덕산에 있는 절로서
백제 분서왕 3년(300)에 처녀 성덕이 창건한 절이었다.
그는 송광면 모후산 유마사에 와서 또다른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유마사를 창건한 유마운 거사의 딸 보안 처녀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유마운은 당나라 고조 8년(625)에 요동 태수로 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보안이라고 했다.
보안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혼자 된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그녀는 보기드문 천재였다. 생후 두 살 때 기둥에 씌어진 주련을 읽었고,
다섯 살이 되자 이미 제자백가를 훤히 꿰뚫었다.
마을에서나 집안에서는 그녀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하면서 안타까워들 했지만
오히려 유마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남독녀 외딸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극했다.
남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유마운에게 있어서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소중한 딸이었다.
보안이 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태수 유마운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진장선을 잃고 말았다.
그도 역시 태수였는데 권력을 이용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에게는 일곱 채의 집이 있었다.
남들은 자기 집 마련에 평생을 바쳐야 했는데 그는 태수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일곱 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던 것이다.집을 챙기기는 유마운 쪽이 더 심했다.
유마운은 아내를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도 집이 자그마치 열세 채나 되었다.
붙잡아다가 곤장을 때리고 멀리 귀양까지 보내곤 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토록 지독한 유마운도
나라에 대해서는 온갖 충성을 다했다. 그는 약자에게는 군림을 했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아첨했다.
진장선의 49재 탈상이 있는 날이었다. 유마운이 조복을 입고 나서자 딸 보안이 말했다.
"진 태수님 49재에 가시는 길이시지요?
49재가 끝나고 진 태수님을 만나고 싶으시면 제가 일러드릴게요."
유마운은 보안이 워낙 영특했기에 그녀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 보렴."
"그 절의 법당 뒷담에서 왼쪽으로부터 일곱 번째 기왓장 밑에
진 태수님의 업신이 기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꼭 한번 만나 보고 오십시오."
"오냐,알았다. 왼쪽으로부터 일곱 번째 기왓장 밑이라고 했겠다?"
그는 진장선의 49재 탈상에 참례했다. 영혼을 목욕시킨다는 관욕의식이 끝나고
상단 불공을 올린 스님은 모여든 사람들과 유족들에게 법문을 했다.
"진 태수님께서는 평소 선행을 많이 하셨기에 틀림없이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유족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눌러댔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법당 앞에 서있는 불두화나무에 하얀 꽃이 함빡 웃고 있었다.
유마운은 더 이상 법당에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마당으로 내려서니 웬 구렁이 한 마리가 법당 뜰 앞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빨갛고 파란 색깔들이 햇빛을 받아 징그럽게 보이는 능구렁이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유마운은 보안의 말이 생각나 법당 뒤로 돌아갔다.
그는 담 왼쪽 끝에서부터 기왓장을 세어 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는 일곱 번째 기왓장을 살그머니 들어올렸다. 그때 법당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얼른 기왓장을 내려놓고 먼산을 바라보았다. 웅성대던 사람들이 요사체로 건너가는 게 보였다.
모두들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다시 그 기왓장을 찾아 들어 올렸다.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방금 전 법당 앞에서 보았던 그 능구렁이가 바로 그 기왓장 밑에 또아리를 틀고 머리를 치켜든 채
두 가닥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일곱 겹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했다.
행여 물릴세라 조심스럽게 기왓장을 놓은 유마운은 그곳을 빠져 나왔다.
법당 앞에 다다르니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법당 안에서는 아직도 스님의 법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생전에 욕심을 부리면 죽어서 능구렁이가 됩니다.
화를 잘내면 살모사나 독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네가 삶을 사는 동안에는
본인도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특히 성 잘 내고 남을 속여 재산을 모으는 일들은
웬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의 다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49재 탈상을 맞이하는
진 태수 영가께서는 평소에 인자하셨고 또 청렴하셨던 분입니다. 참 장한 우바새였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능구렁이가 된다?!"
유마운은 방금 전에 보았던 능구렁이와 때맞춰 법문하는
스님의 설법 내용을 생각해 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문득 법당을 빠져 나와 교자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재촉했다.
하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태수의 명이라 거역할 수 없었다.
다만 한 하인이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아직 진 태수님의 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시겠습니까?"
"그래, 어서 가마를 우리 집으로 향하라. 시간이 급하니 어서 가자."
가마에 앉아서도 유마운은 방금 전 보았던 능구렁이와 스님의 말씀을 번갈아 비교해 보았다.
"진 태수가 능구렁이가 됐다?"
집에 돌아온 유마운은 다짜고짜 보안을 불러 야단을 쳤다.
"너 이녀석! 그래 애비한테 보여 줄 게 없어 능구렁이를 보게 했느냐?"
보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래,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무서우셨어요?
그래도 진 태수님은 능구렁이나 되었으니 망정이지..."
"허허 ! 이녀석보게. 그럼 나는 어떻게 된단말이냐?"
"아버지는 나중에 비단구렁이가 되실걸요. 게다가 살모사나 독사와 같은독을 품고요."
"뭐라고?!"
"능구렁이는 그래도 사람은 해치지 않습니다만 비단구렁이는 닥치는 대로 죽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제가 알기로는 진 태수님은 욕심은 있어서 집을 일곱 채나 갖고 계셨지만
아랫사람들에세 성 한 번 안 내고 사셨다잖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빚이 열세 채어다가
걸핏하면 하인들을 족치고 바른 말 하는 사람들을 귀양보내고 하셨잖아요."
유마운은 속으로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그는 보안의 말대로 직언하는 많은 사람들을 귀양 보내곤 했다.
그리고 또 현재 살고 있는 집 말고도 하인들의 이름을 빌려 열세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보안에게 말 안하고 있는 수십만 평의 전답도 있었고 금고에 넣어 둔 돈과 보화도 엄청났다.
유마운이 마을을 누그러뜨리면서 말했다.
"그래, 네가 어떻게 그 구렁이가 일곱 번째 기왓장에 숨어 있는 줄 알았느냐?
얼핏 보니 그 구렁이는 또아리를 틀고 있는게 일곱 겹은 되어 보이더구나."
보안이 대답했다.
"그것은 그분이 일곱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남들은 집 한 채 버젓이 갖고 살고 싶어도 적은 봉록에 쪼들리다 보면
평생 자기 집 한 번 가져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한 고을의 태수가 되어 어떻게 일곱 채의 집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라에서 주는 녹은 누가 내는 것입니까? 바로 이 땅의 백성들이 내는 세금입니다.
아버지는 진 태수보다 여섯 채의 집을 더 갖고 있을 뿐더러 집의 크기도 진 태수님의 것에 비하면
서너 배씩은 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로 미루어 본다면 아버지는 아마 또아리의 겹침이
30겹도 넘는 큰 비단구렁이일 것입니다."
보안의 말을 듣는 유마운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얘기대로라면 그보다 더 무서운 과보는 없을 것 같았다. 비단구렁이로 몸을 받아 난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보안아!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냐?"
"아버지! 그러기에 욕심을 내도 성을 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보안은 자세를 가다듬고 합장을 하더니 눈을 지그시 내려 감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일곱 살 난 어린 딸에게 어쩌면 저토록 많은 지식이 담겨 있을까.
유마운은 그 내용을 생각하면서 한편 딸이 기특해 미칠 지경이었다. 유마운이 말했다.
"네 말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방법이 있을 뜻도 싶은데?"
"그러면 아버지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겠어요?"
"비단구렁이 몸만 피할 수 있다면 할 수 있구말구."
"아버지, 정말 후회는 안하시겠지요? 그러러면 아무래오 손실이 크실 텐데요.
우선은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는 재산을 제 명의로 변경시켜 주세요.
둘째, 아버지가 그동안 누려 오던 태수 직을 미련없이 던져 버리셔야 합니다.
셋째, 지금까지 아버지가 부정으로 돈을 모은 것에 대한 뼈저린 참회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세 번째는 아주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가능하지만 태수 직을 그만두라는 말과 재산을 네 명의로 변경하라는 말은
좀 어려울 것 같구나. 아니, 뭐 네 명의로 재산을 등록하는 것이야 그래도 괜찮겠구나.
하지만 사직을 안하면 안 될까?"
보안은 아주 냉정했다.
"정 그러시다면 비단구렁이 몸을 받으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서른 바퀴는 또아리를 틀 정도의 아주 커다란 비단구렁이로요.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아버지. 아버지는 저를 쉰넷에 낳으셨습니다.
제가 일곱 살이니 아버니도 벌써 예순이 되셨습니다. 옛말에 인생 칠십고래희라 했습니다.
아버지가 남달리 오래 사신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사실 날이 10년도 안 남았습니다.
구렁이 몸을 받으실 날이 얼마 안 남았다구요."
일곱 살 난 어린 보안이 너무 영악하다고 유마운은 생각했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유마운은 보안의 말에 따르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보안은 모든 재산이 자기 명의로 되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재산을 나우어 주었다. 집은 열세 채가 넘었다.
모두 서른두 채나 되었고, 논과 밭은 합하여 3백 60만 평이나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금이 수십만 냥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유마운은 딸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났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생이 허무했다.
그는 사직서 한통을 써서 조정으로 모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그러나 어린 보안은 아버지 유마운을 이끌고 한없이 걷기만 했다.
부녀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산을 몇 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멀리 지평선 저쪽에 큰강이 있엇다.
강은 한낮의 햇살을 받고 비늘을 꿈틀거리며 누워 있었다. 압록강이었다.
오랜만에 유마운이 입을 열었다.
"얘, 보안아! 어디로 가는 게냐?"
"어디로 가든 아버지께 손해 날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만 오시면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강에는 나룻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좌우를 곁눈질로 가늠하던 보안은 강폭이 가장 넓은 곳을 택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제 일곱 살밖에 안 된 아이지만 거침없이 물로 뛰어들었다.
유마운은 갑자기 후회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아무리 비단구렁이의 몸을 받는다 하더라도 보안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안은 이미 강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고 있엇다. 유마운은 갑자기 보안의 신변이 염려스러웠다.
그는 보안을 부르며 같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보안은 이미 강의 맞은편 언덕에 서서 속히 건너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유마운은 벌써 며칠을 굶었는지라 보안이 둘로 보였다 다시 하나로 보이고 또 둘 셋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회오리 바람이 일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쳐다보니 맑아 있었다.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해가 쨍쟁 내리쬐는 한낮에 왠 회오리바람과 소나기일까?'
유마운은 물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는 다급한 대로 보안의이름을 부르며 구해 달라고 했다. 보안이 강둑에 서서 냉정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직 미련이 남았습니다."
"미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잘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글세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구나. 네가 좀 일러 주렴."
"아버지는 마음을 비우시겠다고 철석같이 제게 약속하시고 허허허 웃으셨습니다.
그 '허허허' 란 웃음소리에는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운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네가 '호호호'하고 웃은 것은 무슨 뜻이냐?"
"아버지가 비우고 비우고 도 비우시면 보안은 '좋고 좋고 또 좋습니다'라는 뜻이지요.호호호."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자 유마운은 또 한 번 물속으로 곤두박질을 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불현 듯 떠오른 게 있었다. 그는 상투를 만져 보았다.
보안 몰래 감추어 둔 보물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 보배를 꺼내 사정없이 강둑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렇게 불던 바람도 폭우도 거짓말처럼 뚝 그쳤고, 물은 정강이에도 차지 않는 얕은 강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앗다. 이젠 버리고 온 재산과 벼슬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몸이 이토록 가볍고 날아갈 듯했던 적은 60평생에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사를 호령하고 동헌에 버티고 앉아 세상이 온통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생의 길을 어둡고 무겁게 만드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보안에게 진정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보안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평생 죄만 짓다 갈게 뻔한 일이었고, 비단구렁이 몸은 떼어논 당상이었다.
어린 딸 보안이 대견스럽기 그지 없었다. 보안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미련도 버릴 수 있었다.
보안을 위해서라면 그토록 어렵다는 중도 될 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넌 지도 한 달, 부녀는 내내 걸었다.
서해안을 따라 신의주와 평양을 지나고 해주 인천을 지났다.
한양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수원 도산 평택을 거쳐 군산으로 나왔다. 남원을 지나고 광주로 들어섰다.
보안은 무등산이 마음에 들 것 같다며 광주에서 묵자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 부녀는 광주를 떠났다.
광주 무등산처럼 아름답고 좋은 곳도 백제에서는 다시 없지만
단지 부녀와의 연때가 맞지 않는다고 보안은 말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승주군 송광면에 소재한 모후산이었다.
두사람은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싸리나무 대나무를 이용하여 그릇을 만들었다.
특히 대나무로 만든 죽공예품들은 저자에 나가기 무섭게 팔려 생활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이태 동안을 알뜰히 모아 조그만 초암을 짓고 부처님 한 분을 깎아 모셨다.
그때가 백제 무왕 28년(627)이었다.
한편, 중국 조정에서는 요동 태수 유마운이 사직서를 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당고조(618--626재위)가 천자의 자리를 태종(626--649재위)에게 넘기자
태종은 사람을 물색하던 중 요동 태수로 있던 유마운이 충성스런 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백방으로 그를 찾았다.
그리고 유마운의 거처를 알아 오는 자에게는 황은을 베풀겠다고 했다.
하지만 유마운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백제로 갔을 것이라는 제보로
백제 땅에 있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그때 백제에는 광주 목사로 이을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숭천 지구에 순찰을 나갔다가 어떤 약초 캐는 노인으로부터 송광면 모후산에
두 부녀가 새로 초암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들었다. 광주 목사가 모후산을 찾으니
유마운은 거사와 그의 딸 보안의 행색은 남루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그들 부녀의 얼굴에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청초함이 있었다.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고 늘 사색하는 생활을 했다.
초암에 모셔진 유마운이 조각했다는 불상도 꼭 그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광주 목사는 이들 부녀를 위해 절을 짓고 불량답까지 하사했지만 중국 조정에는 알리지 않았다.
그것은 광주 목사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처럼 티없이 맑고 순박한 사람을 중국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절을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다.
찾아오는 신도도 많아지고 심지어는 운수납자들도 모여들었다.
유마운 거사는 그절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유마사라고 붙이고 법당의 편액은 보안당이라 내걸었다.
딸 보안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다.
절이 커지자 염불을 맡아서 할 부전스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 부녀는 성덕산 관음사에서 공부하는 정현스님을 모셔오게 된 것이다.
이때 보안은 이미 어엿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모후 산에 절을 짓고 산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유마사에 온 정현스님은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보안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워낙 뛰어난 미인인데다가 남달리 지혜가 있었서 언어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법도에 맞았다.
하지만 유마운 거사가 늘 곁에 있어서 짬을 낼 수도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정현스님은 처음에는 누이동생처럼 생각하고 지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날 유마운 거사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분이 다음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 나서도 보이지 않자
정현스님은 거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었다. 보안이 달려왔고 부복과 대중들이 달려왔다.
방문을 열고 보니 유마운 거사는 앉은 채로 세상을 뜬 것이었다.
방안에는 이름 모를 향내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뿐, 방안에는 침구도 경전도 없었다.
다만 그가 깔고 앉은 방석 하나가 그 방 가구의 전부였다.
정현스님을 비롯하여 모든 남자들과 불자들은 유마운 거사가 무소유를 실천하다 간 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마음에 커다란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갔다.
72세 동안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다가 마지막 10여 년간은 무소유로 살다가 갔다.
정현스님은 보안 처녀를 도와 유마운 거사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유마운의 시신이 다비에 부쳐질 때, 정현도 울었고 다른 스님들도 울었다.
모여든 모든 신도들도 울었다. 다만 울음을 보이지 않은 사람은 보안 처녀뿐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즐거워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흐느껴 우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평소처럼 매우 담담했다. 정현스님은 생각했다.
아버지의 정을 받아 보지 못한 그에게 있어서 유마운 거사는 아버지와도 같은 그런 분이었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 살아가면서 그처럼 아옹다옹하는 것은 무엇을 위함일까.
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될까. 어차피 죽으면 그육신은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 텐데.
도대체 죽으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육신이야 부처님 말씀대로 각기 사대의 본처로 돌아간다고 하겠지만 육신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고
사물에 대해 생각할 줄 알고 상대를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할 줄 알던 그마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가. 아니, 죽음이 도대체 뭘까. 무엇을 일러 죽음이라고 할까.
정현스님의 의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는 걸까.
그토록 애지중지하연 육신조차도 버려야 하는데 뭘 가지고 갈까라는 생각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리라.
남기고 벌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육신이요, 온갖 감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만
인식하던 그 자체는 무엇일까. 생전에는 영과 육이 분리될 수 없던 것이 죽음이라는
하나의 장대한 의식을 통해 분리되는 것일까. 분리되는 것을 누가 증험이라도 한 것일까.
"스님, 이젠 그만 돌아가시지요. 날씨가 제법 쌀쌀해요."
보안 처녀의 말에 정현스님은 비로소 본래 그의 세계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상의 세계일지 모른다. 실상의 세계,
본래의 세계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가 본래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세계를 훔쳐 보며
혼자 키득거릴지도 모른다.
온 산야를 불태워 버릴 듯하던 불꽃도 사그라져 갔다.
바람이 불어와 가끔씩 죽음의 세계를 확인이나 하듯 재를 이리 날리고 저리날렸다.
기러기 한 마리가 창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짝을 잃고 헤매는 외기러기 같았다.
기러기는 한 점 흰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산꿩이 길게 여운을 남기며 두 번 울었다.
정현스님은 앞서 걷고 있는 보안 처녀의 뒷모습을 보며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상복을 입은 여인은 더욱 안아 주고 싶다고 하더니
하얀 상복을 입은 보안이 더욱 청초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는 보안의 상복을 투시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이제 조금은 자유로울 것 같았다. 사실 유마운 거사가 방해물이기도 했던 건 분명하다.
기제 그는 알 수 없는 세계로 먼저 떠났다.
어찌되었거나 정현은 보안에게 다가가기가 그만큼 쉬워졌다.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그러나 양심상 49재 탈상까지는 기다리기로 했다.
유마운 거사의 탈상 겸 49재가 끝나고 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정현스님의 보안에게로 향한 마음은 그 도를 더해 갔다.
끝없이 치근덕대는 정현스님에게 보안 처녀가 말했다.
"내 일찍부터 스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현안을 부여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중생을 구제해야 할 사명감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다시 생사윤회에의 길을 자청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오나 스님께서 정히 제 몸을 탐하신다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내일 바 자정 무렵에 한천으로 나오십시오.
거시서 서로 뜻이 맞으면 장차 부부의 연을 맺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실 때는 고운 체 하나를 반드시 준비해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내일 자정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시간을 지켜 주시면 더욱 고맙겠어요."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보안 낭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정현스님은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달려갔다. 부처님이 빙그레 웃고 계셨다.
그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삼천배를 하고 나니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는 목욕물을 데워 땀으로 얼룩진 몸을 말끔히 씻었다.
이튿날 밤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좀채로 가지않는 듯싶었다.
삼경 종이 울렸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방 한 구석에 앉아서 뒷다리를 비비며 울고 있었다.
그의 성공을 빌어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절을 나섰다. 아랫마을 한천까지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지만 부지런히 걸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보름달은 유난히 밝았다. 그는 흥얼거렸다.
달아!
너의 모습을 보노라면
보안 낭자의 고운 음성이 거기 있고
보안 낭자의 고운 자태가 게 있구나.
우리들의 사랑을 엮어 주기 위해
너 또한 몇밤이나
이 어둠을 밝혀 왔더냐.
달아!
너는 이 사나이의 마음을 아느냐.
승복으로 비록 육신은 가렸지만
나의 본능은 꿈틀거렸고
나는 승려이기 이전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었다.
하나의 완전한 남성이었다.
달아!
나는 한 생을 접어 두기로 했다.
성불은 다음 생을 기다려
보안 낭자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보안 낭자는
나의 전부, 나의 모든 것이다.
달아!
우리의 사랑을 지켜 봐 다오
우리의 사랑을 무르익게 하라.
나는 간다 보안에게로
나는 간다 사랑을 위하여
"일찍 나오셨군요, 정현스님."
그녀는 미리 나와 있었다. 정현스님은 보안 낭자를 보자 체를 길섶에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한 해에 한 번씩 칠석날에 만나는 견우와 직녀처럼
정현스님은 보안 낭자를 향해 팔을 벌리고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말을 기다릴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사랑은 말을 초월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행동이었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문자의 표현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안 낭자가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잡을 것을 놓쳐 버린 정현스님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는 다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이번에 놓치면 영영 다시는 붙잡을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정현스님!"
보안 낭자의 목소리가 유난히 맑았다. 해맑은 미소가 거기 있었다. 보안이 다시 말했다.
"스님! 정현스님. 체는 가지고 오셨어요? 어서 내놓아 보세요."
그제서야 정현스님은 길섶에 던져 놓은 체를 주워 왔다. 물도 새지 않을 만큼 가는 체였다.
체를 받아든 보안 낭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스님과 저의 인연이 잘 어울리는가를 시험해 볼 차례입니다."
"그야 시험해 보나마나입니다."
"글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생각합니다만"이라니, 정현스님은 끝의 한 글자가 덧붙여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자 하나는 멀리 집어던져 버리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옆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돌멩이를 주워
그 "만"자를 짓이겨 버리고도 싶었다.
보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 체로 저 물 속의 달을 건지는 것이에요."
"물 속의 달을 이 체로 건진다고 하셨습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안 되면 둘 다 안 되는 거겠지요. 일단 둘이 다 못 건지면 내가 스님의 아내가 되지요.
그리고 스님이 건지고 내가 못 건져도 저는 스님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보안 낭자가 제시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현스님은 일이 거의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설사 자신이 못 건진다 하더라도 괜찮은 내기였다.
"허지만, 스님! 만일 제가 이 체로 달을 건져 올리면 그때는 각자 자기의 직분을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고 공덕을 닦는 것입니다. 어때요? 스님께 별로 불리한 조건은 아니지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밝은 달빛을 받아 그녀의 피부는 더욱 희게 보였다. 정현스님은 약속했다.
"좋습니다, 보안 낭자. 낭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낭자께서 만일 달을 건지시지 못하면 제가 건지든 못건지든 상관없이
제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호호호!그렇게 하죠. 자, 스님께서 먼저 하세요."
정현스님은 체를 들고 물가에 허리를 굽혔다. 정현스님은 자신이 달을 건지지 못해도 좋았다.
그는 이미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보안 낭자가 달을 건지지 못하도록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단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해도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열의 세계로 곤두박질을 치는 법이다.
달을 건져 올렸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거듭해 보았지만 물결만 일렁일 뿐이었다.
둥근 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달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깨어지고 흩어져
물 가장자리로 달아나 버렸다가는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깨어져 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보안이 말했다.
"이제는 제가 건져 볼 차례입니다."
정현스님은 채를 보안 낭자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는 달을 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달 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현스님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초조와 불안으로 죄어들었다.
보안 낭자는 달을 건졌다. 체로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져 올린 것이다.
아니 물 속에 있는 달을 건져 올린 게 아니었다. 체에 담긴 물이 밑으로 새지않고
마치 바가지처럼 담겨 있었던 것이다. 체에 담긴 물 속에 또하나의 달이 밝게 웃고 있었다.
보안 낭자가 말했다.
"정현스님! 할 수 없군요. 스님은 달을 건지지 못했고 저는 달을 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불도를 닦는 일에 배진을 해야겠습니다."
정현스님은 할 말이 없었다.
절로 올라가는 보안낭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패감으로 물에 몸을 던져 버리고도 싶었다.
이제 무슨 낯으로 보안 낭자를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시각부터 정현스님은 말을 잃어 버렸다.
절에 돌아왔지만 법당에 들어가고픈 마음도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보안 낭자가 정현스님을 불렀다.
"스님,제가 이 몸을 스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풀죽은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오."
"제 아내가 되어 주시겠다구요? 그것이 정말입니까?"
"정말이구말구요. 스님은 속아만 살아 보셨습니까?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리고 그녀는 법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현스님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보안 낭자를 앞질러 가서 법당 문을 열어 젖혔다.
그녀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현스님도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법당 문을 닫을 생각도 없이 그는 보안 낭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조그마한 칼을 꺼냈다.
칼은 문을 통해 살며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녀는 성큼성큼 불단 쪽으로 걸어가서는 부처님 뒤에 모셔 놓은 탱화를 칼로 긋기 시작했다.
마치 신들린 여인처럼 칼끝을 놀렸다. 탱화를 떼어내어 법당 마룻바닥에 깔았다.
정현스님은 그녀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탱화를 깔고 난 여인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었다.
정현스님이 보고 있는데도 돌아서지 않고 옷고름을 풀고 있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거룩한 의식을 접전하는 듯 매우 진지하고 엄숙했다.
저고리를 벗자 속옷이 드러났다. 가슴에 두 개의 볼륨이 살아서 꿈틀거렸다.
작은 가슴이었지만 볼륨은 컸다. 정현스님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부처님이 돌아가고 있었고 대들보도 도리도 서까래도 돌아가고 있었다.
법당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현스님은 넘어지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치마를 벗었다. 잠자리 날개인 양 속치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는 몸의 한 부분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부처님의 탱화에 눈길이 갔다. 사내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스님의 모습으로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부처님 법당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이거룩한 법당에서 탱화를 오리고
그리고 여기서 옷을 벗다니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보안낭자!"
그 말을 들은 보안 낭자가 말했다.
"스님은 조각하고 그려놓은 부처는 볼 줄 알면서 어찌하여 살아있는 부처는 볼줄 모르십니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보안 낭자는 탱화를 들어 법당 밖으로 던졌다.
그러자 탱화는 눈깜짝할 사이에 오색구름으로 변했다. 몸을 솟구친 보안 낭자가
그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가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하얀옷을 걸친 백의관음의 모습으로.
그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19년 동안 인간 세상에 몸을 나타내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을 교화하며 살다간 관세음보살이었다.
정현스님은 비로소 깨달았다. 확철대오, 그야말로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열아홉 살 난 젊은 여인 보안을 사랑했던 인연으로
그는 큰 깨달음을 얻어 대오인이 되었다.
그는 삼매에 들었다. 보안과 자신과의 인연 관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은 전생부터 도반의 인연을 맺고 살았었다. 전생에는 같은 남자로서 도반을 맺었고
금생에 와서는 남녀로서 도반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은 전생에 서로 약속을 했었다.
누구든 먼저 성불하는 사람이 이끌어 주기로 철석 같은 맹세를 했었다.
그런데 보안이 먼저 성불하였고 금생에 자신을 제도한 것이다.
그는 유마운의 딸로 몸을 나타내 자신의 아버지도 교화를 했다. 그녀는 참으로 좋은 도반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보안 낭자를 사랑했던 자신을 대견스레 생각했다.
깨닫고 보니 모두가 관세음보살이고 도반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스님들도, 부목들도, 신도들도 모두가 도반이고 보살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모두가 무정설법을 하고 있었다.
법당 주변에 절려진 작은 돌멩이도 진리를 설하고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도, 푸른 창공도 지저귀는 산새들도 귀뚜라미도 죄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었다.
그는 오도송을 읊었다.
깨닫기 전에는 부처가 중생이더니
깨닫고 나서는 중생이 부처로다.
보안이 누구냐고 묻지 마시게나
다만 푸른 하늘만이 허허허.
정현스님은 보안 낭자의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하여 보안사를 창건했다.
그리고 그들이 달을 건지던 곳을 제월천이라 이름하였다.
유마운의 부도는 해련탑이라 했으며 유마사 서쪽 계곡에 보안교라는 다리를 놓아
보안 낭자가 언제든지 찾아오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놓았다.
그의 불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범종각을 짓고 범종을 주조했다.
지금은 종각만 있고 범종은 없다. 그 범종은 화엄사에 옮겨져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안교는 정현스님이 인부들을 시켜 모후산에서 바위를 운반해다 세우려 했다.
하지만 워낙 바위가 커서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보안 낭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그 바위를 치마폭에 담아 옮겨 주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최근에 지은 것들인데 창건 당시 지었던 건물들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6.25때 완전히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백운당, 운당, 종각, 요사체 등이 있다.
- 옮긴 글 -
'전설의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8. 인연(因緣:일타스님 일대기) /정찬주 장편소설 (0) | 2015.06.01 |
---|---|
[스크랩] 18. 인연(因緣:일타스님 일대기) /정찬주 장편소설 (0) | 2015.05.30 |
[스크랩] 조선시대 유학자 허미수[許眉 叟] (0) | 2015.02.25 |
[스크랩] 충남 부강면에 있는 노고봉! (0) | 2015.01.15 |
[스크랩] 두꺼비와 지네의 전설 (0) | 201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