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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58.09.10 독립운동가·정치인 조소앙 사망

강나루터 2015. 9. 21. 00:02

1958.09.10  독립운동가·정치인 조소앙 사망

 

 

 

 

 

 

 

 

 

 

 

 

 

 

 

 

조소앙[ 趙素昻 ]

1887(고종 24) 경기 파주~1958. 9. 9.

독립운동가.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노선이자 광복 후의 새로운 국가건설 방략을 제시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립했다.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호는 소앙(素昻).

 

초년

아버지는 정규(禎奎)이며,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7월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도쿄[東京] 부립 제1중학에 입학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격분, 동경유학생들과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7충신의 추모대회를 열고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행위를 성토했다. 1906년 동경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고 학보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단연동맹(斷煙同盟)을 조직해 활동했다. 같은 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세이소쿠 영어학원[正則英語學院]에서 공부했으며 1908년에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했다. 1909년 1월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고 같은 해 5월 창간된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병 때 '한일합병성토문'을 전달하고 비상대회를 소집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연금당했다. 191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임정활동 및 민족유일당운동

1913년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개조해 박달학원을 창립하고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5년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했으며 1917년에는 국내외 동포에게 대동단결선언서를 작성·선포했다. 또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 주권민유론(主權民有論),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조선문제의 의제로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1918년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 지린[吉林]에서 여준(呂準)·김좌진·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 등과 '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김교헌(金敎獻) 등 재만독립운동가 39명과 공동서명하여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임시의정원법기초위원, 초대 국무원비서장,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어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사회당대회 등에 임시정부대표로 참가하면서 유럽을 시찰한 뒤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해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문인 〈만주리선언 滿州里宣言〉을 발표했다. 1922년 상하이로 돌아가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7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안창호(安昌浩)·원세훈(元世勳)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발기했으나 의견의 차이로 분열되었다. 한편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타격을 입은 임시정부는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하고 제3차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로 전환을 도모했다. 이에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을 반대하고 내부분열을 수습하고자 노력했으나 1926년 8월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직과 국무위원직을 사퇴했다.

 

국내외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대립이 본격화되자, 1926년부터 이러한 상태를 청산하고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일어나 국내에서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고 중국과 만주 지역에서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26년 〈삼균제도 三均制度〉를 집필해 삼균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1927년 김구·안창호·이시영(李始榮)·홍진(洪震)·김두봉(金枓捧)·구연흠(具然欽)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창립하고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3월 유일독립당촉성회의 분규를 청산하고 순수한 민족주의자의 중심체를 조직하고자 이동녕(李東寧)·안창호·이시영·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와 함께 동생 용주(鏞周)를 귀국시켜 삼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삼평사(三平社)를 조직하고 잡지 〈평론〉을 간행하게 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과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해 활동했으며 같은 해 2월부터 이듬해까지 국문판 〈한보 韓報〉, 중문판 〈한보특간 韓報特刊〉 등을 발간해 사설과 특간사 등을 집필해 민족운동론을 설파했다. 1920년대 후반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후 1935년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신당창립대표위원으로 참석했으며 김규식·김원봉과 함께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당의(黨意)와 당강(黨綱)을 통해 8·15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여기에 삼균주의 이론이 반영되어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원봉 노선에 대한 불만과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의 불일치 등으로 탈당해 같은 해 9월 한국독립당을 재건했다. 한국독립당은 더욱 명백하게 삼균주의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표방했다.

 

좌우합작운동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좌우통합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은 김구파의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한인애국단 및 미주(美州) 5단체 등과 통합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1939년 광복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연합해 전국연합전선협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정강에 삼균주의 정책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1940년 5월에는 김구의 한국국민당 및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3당통합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창당선언과 정강에서 삼균주의의 정립을 확정시켰다. 한편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타정당과 단체를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는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1941년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서 삼균주의 원칙에 입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기초했다. 이후 1943년 4월에는 한국독립당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8·15해방 후 개인자격으로 귀국해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에는 비상국민회의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국민의회로 개편되자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신탁통치안에 반대해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참가를 반대하는 등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단독정부수립에도 반대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취임을 거부했으며 1948년 3월에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총선거에 불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4월에는 7개항의 남북협상안을 발표하고 평양의 남북회담에 참가했다. 그러나 평양을 다녀온 후 10월 한국독립당과 결별하고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밝혔다. 12월 백홍균(白泓均)·조시원(趙時元)·방응모(方應模)·정형택(鄭亨澤)·민영수(閔泳壽) 등과 사회당을 조직하고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6·25사변으로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한국문원 韓國文苑〉(1932)·〈소앙집〉·〈유방집 遺芳集〉(1933) 등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장문집〉을 간행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가 건국까지 좌우파를 통합하여 어떤 이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할지 기본 방향을 정했다. 그는 임정의 외교부장으로 한국이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통해 독립을 보장 받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을사조약 후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유학생들 모아 역적들과 일진회 규탄 대회 열고 퇴학 당해

조소앙(趙素昻, 1887.4.10~1958.9.10) 선생은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월롱면에서 부친 이화제(理化齊) 조정규(趙禎奎)와 모친 박필양(朴必陽) 사이에서 6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아호는 소앙이었는데, 통명으로 사용하여 본명과 같이 불리었다. 1892년 6세부터 정삼품 통정대부 조부 조성룡(趙性龍)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사서(四書)를 독송, 시전(詩傳)·서전(書傳)을 독료하고 작시(作詩)·시부표(詩賦表)에 몰두하였다.

 

또 이 무렵 맏형 조용하(趙鏞夏)는 일찍 개화파가 되어 1896년 독립협회를 지지하여 아우인 선생에게 독립협회의 취지와 활동을 설명해 주어 선생을 감복케 했으며, 형의 영향으로 개화와 서양지식에 일찍 눈을 뜨게 되었다. 1902년 성균관에 최연소자로 입학하였으며, 수학 중 역신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음모를 막기 위하여 신채호 등과 제휴하여 성토문을 만들어 성균관 학생들을 격동하여 항의 규탄하였다.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7월에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도일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도쿄 유학생들과 같이 우에노[上野]공원에서 7충신 추모대회와 매국적신 및 일진회의 매국행각 규탄대회를 열어 일제를 비판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도쿄부립제일중학교 가츠우라[勝浦炳雄] 교장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필연성을 말하자 이를 즉각 반박하였다. 이로 인해 퇴학처분이 되었으나 일본 문부성(文部省)의 권유로 이듬해에 복학되었다.

 

1906년 도쿄 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하는데 참가하여 배일독립운동을 고취하고 평의원 겸 회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7년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도쿄에 기착한 안창호를 만나 시국문제를 토론하고, 국내의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도쿄에서 단연(斷煙)동맹을 조직하였다. 또 그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정칙(正則)학원에서 영어를 전수한 뒤 이듬해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학교에서 외국어(일어, 영어)와 법률을 배우는 외에도 1904년 대한제국의 주독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있는 맏형 조용하가 베를린에서 보내준 『손문전(孫文傳)』과 고리키(A. M. Gorkii, 古爾岐)의 작품을 비롯 강유위(康有爲)ㆍ양계초(梁啓超)ㆍ다윈(C. R. Darwin) 등 동서양에 걸친 저명인사의 정치ㆍ철학ㆍ역사ㆍ종교 등에 관해 많은 양의 책을 정독하였다.

 

또한 형 조용하가 1906년 도쿄에 들러 선생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형의 영향으로 더 한층 개화와 서양 최신 추세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기독교에 입교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을 국제적인 사상과 비교하면서 체계화 시켜나갔다. 또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일제 앞잡이 스티븐슨 처단 의거를 계기로 도쿄 유학생들과 항일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어서 1909년에 도쿄에 있는 유학생들의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의 주필이 되어 국내 신문 및 학회 등과 호응하여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또 1910년에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되자 ‘한일합방성토문’ 등을 작성하여 국내의 윤치호ㆍ김규식 등에게 전달하고 비상대회의 비밀소집을 도모하다 왜경에 사전 발각되어 구금당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 유학을 하던 안재홍·송진우·김성수·조만식 등과 서로 교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 당시 도쿄에는 중국인 유학생들과 동맹회를 결성하는 등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선생은 그들 중 대계도(戴季陶) 등과 교류하면서 한ㆍ중 두 나라가 처한 공동관심사의 문제와 연대의식에 관하여 논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이라 약함)시절 선생의 한·중 유대강화는 이때 그 기반이 잡힌 것이다.

 

한편 1912년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게 강탈당한 형세를 극복하기 위한 항일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중국으로의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또한 이때 선생은 일본 유학 8년 동안의 일기 『동유약초(東遊略抄)』 5권을 남겼다. 그해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경신학교ㆍ양정의숙ㆍ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미 일본 유학 때부터 국권상실에 대해서 보였던 국권회복의지와 이에 앞서 맏형 조용하의 망명에 자극되어 중국 상해의 신규식 등과 연락을 취하고 망명계획을 추진하여, 선생은 1913년 북경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단군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의 가르침 연결한 육성교(六聖敎)를 구국종교로 창안

망명 즉시 선생은 신규식ㆍ박은식ㆍ홍명희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편․창설하여 청년 혁명가들을 육성하고, 또 그 해 선생은 친분이 있었던 중국혁명지사 대계도를 비롯하여 진과부(陳果夫)ㆍ황각(黃覺) 등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ㆍ반일대동당(反日大同黨)을 결성하므로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1915년 선생은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과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라는 구국종교를 창안하였다. 이것은 단군의 독립사상, 석가의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의 지덕합치(知德合致), 예수 그리스도의 애인여기(愛人如己), 마호메트의 신행필용(信行必勇)을 연결하여 육성일체화(六聖一體化)를 시키고자 한 것이다. 즉, 이는 선생의 민족단결을 위한 기본사상이었던 것이다. 또 그 해 국내공작차 입국을 시도하여 만주 안동에 왔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연금되었다가 1916년에 다시 상해로 탈출 망명하였다.

 

조소앙 선생 유묵


이 같은 사상이 바탕이 되어 선생은 1917년 7월에 상해에서 독립운동계의 국내외의 변화에 대응하여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기초하여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하고 각계인사에게 발송하였다. 이 선언문은 주권재민론과 대동사상에 기초한 선구적인 독립선언이었다. 그 강령에는 독립과 평등은 성스러운 권리임을 주장하면서, 해외 각지에 현존하는 단체는 대소를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을 조직하고자 제청하였다. 또한 헌법을 제정하여 민정에 부합된 법치를 실행할 것과 국민적 외교의 실행을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이는 선생이 임정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제에 입각한 헌법의 초안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민족대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임정을 수립하려고 계획한, 이 대동단결선언의 제의 제창은 독립운동의 이념 의지가 처음 공론으로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해 선생은 장차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ㆍ‘주권민유론’ㆍ‘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 등 한국독립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취지서를 작성하여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선생이 긴급히 창당한 조선사회당 명의로 한국독립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이를 정식 의제로 삼게 하는데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이것을 시발로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기구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대한독립의군부 조직하여 부주석 맡고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1918년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운동을 실현하기 위해서, 선생은 중국 동북지방 길림(吉林)에 가서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그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기초하여, 김교헌ㆍ박찬익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시영ㆍ신규식 등을 비롯한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변동을 포착해서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으로는 가장 앞선 것이다. 또 일제의 포학함과 인류평화에 미치는 위험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주독립의 민주국가 건설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국외 특히 중국 본토 및 동삼성지역을 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민족지도자 다수가 참여한 선언으로 3ㆍ1운동과 임정수립 이전의 민족연합형태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는 선언서를 기초한 선생의 삼균주의 원형이 나타나고 있다.

 

이때를 즈음해서 선생은 1919년 2월 상해 신규식의 밀명으로 신한청년당원으로서 도쿄에 파견ㆍ잠입하였다. 선생은 일본 유학생시절 학생들 사이의 영향력을 그대로 행사하여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하였고, 2ㆍ8독립선언서의 계기를 조성하는 등 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는 3ㆍ1독립선언서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반영되어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3ㆍ1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초기 항일독립운동은 선생의 임정 수립에 참여와 한국민족운동의 이념 즉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체계화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유럽에 특파되어 국제사회당대회에서 한국 독립 승인안 통과시켜

1919년 3ㆍ1운동 직후에 선생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교통무경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임정을 수립할 때 선생은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정출범의 법적 뒷받침이 된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의 기초위원으로 실무 작업을 담당하여 민주공화제 임정수립의 산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임무를 다하였다. 서구 민주주의 이념을 기본으로 헌법을 기초한 선생은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1회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개회되어 절차에 따라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선출되고 국무원이 구성되자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그 해 4월 상해 임정에서는 국내의 독립운동 정보와 군자금 모집 및 송금, 임정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각지에 파견, 활동하였다. 그리고 6월에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단 지원과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을 경유 파리에 도착하여, 임정의 전권대사로 파견된 김규식과 합류한 뒤 한국의 독립 승인 및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요구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당대회 준비위원회에 참석하여 선생은 ‘한국독립의 승인안’을 제출하였고, 이에 36개 참가국들은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켰다. 이어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되는 그 대회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다시 ‘한국독립문제실행요구안’을 제출하여 10개 참가국가들은 이를 통과시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미국에서 이살음(李薩音)ㆍ김호(金乎) 등은 노동사회개진당을 조직하고 당대회에서 선생을 세계인민연맹결성대회의에 한국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듬해 봄 파리에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만나 ‘시간의 머리와 공간의 꼬리’에 대한 문답을 교환하고, 런던에서 인도의 시성 타골과도 회동하여 세계문명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또 영국 노동당 지도자 맥도날드 등과 회합하여 영국 하원에 한국문제에 관한 4개조의 토의 안건을 제출케 하였는데, 이는 일본을 규탄하는 치명적인 안건이었다.

 

조소앙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역임할 때 작성한 성명서(1944.06.10). 중ㆍ미ㆍ영ㆍ소 등 우방국가들에게 한국과의 합작을 촉구하기 위해 발표한 성명서로, 중문과 영문 각 1부씩 작성되었다.

 

 

유럽외교에서 거둔 또 하나의 큰 성과는 에스토니아 국회에 정식으로 한국독립승인안이 상정되었다. 그 후 선생은 네덜란드ㆍ프랑스ㆍ덴마크 등 6ㆍ7개국을 순방하면서 각국 정부 요인들과 면담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불법적인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을 지지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유럽 순방에 이어 그해 선생은 국제사회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페데르부르그에서 개최된 소련혁명기념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약 3개월간 8개국 대표 25인 사찰단의 일원이 되어 소련 각지를 시찰하면서 소련 공산당의 통치를 관찰하였다. 그 후에도 외교활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였다.

 

 

선생이 창시한 삼균주의, 한국독립당 당강에 반영되고, 임시정부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돼

선생은 2년 가까운 유럽ㆍ소련 등지에서의 외교활동을 통해 이론과 현실을 스스로의 눈으로 직시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유학, 대동단결선언・대한독립선언서 등에서 쌓은 지적인 능력과 판단, 그리고 예리한 정세분석 등을 통해 <김상옥전(金相玉傳, 1925)>을 비롯하여 <한국지현상급기혁명추세(韓國之現狀及其革命趨勢, 1930)>ㆍ<한국독립당지근상(韓國獨立黨之近像, 1931)>, 임정의 외교문서, 독립신문의 논설ㆍ논문, 각종 기념일에 발표한 선언문 등 광복 의지를 구현하는 창조적이며 혁명적인 문필활동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1920년대 후반 삼균주의 사상을 창안 해낼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반 삼균주의 개념의 제시, 1930년대 중반에는 그 이념체계가 확립되었다.

 

1922년 1월 상해에 돌아와 중국국민당 간부 장계(張繼)의 초청으로 손문과 회담한 선생은 삼균주의로 관심을 깊게 해가는 한편, <발해경(渤海經, 1922)> 이후 <한국문원(韓國文苑, 1929)>ㆍ<유방집(遺芳集, 1932)>ㆍ<화랑열전(花郞列傳, 1933)>ㆍ<대성원효전(大聖元曉傳, 1933)>ㆍ<이순신귀선지연구(李舜臣龜船之硏究, 1934)> 등을 계속 집필하였다. 이는 모두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것이며, 민족문화의 독창성과 우수함을 강조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동시에 민족적 단결을 부르짖는 내용이었다. 이어 6월에 임정의정원에서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고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임 되었다. 곧 외무총장에 취임한 선생은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원조와 한ㆍ중 공동전선의 모색에 힘썼다. 또한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하여 의거케 하고, 1928년에는 장개석(蔣介石)을 설득하여 김좌진에게 무기를 제공케 하였다. 1931년 말부터 선생은 김구ㆍ이동녕ㆍ조완구ㆍ김철 등 5인의 모의로 1932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은 1927년에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되자, 이에 호응하여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결성하고 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임정 수립 후 처음의 민족세력통합운동이었으나, 좌우익의 대립심화로 민족대당은 결성하지 못하고 1930년 1월 이동녕ㆍ김구ㆍ이시영 등 임정 요인을 포함한 28명과 함께 상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이때 선생은 당의ㆍ당강을 작성하였는데, 선생의 삼균주의 사상이 공식 반영되어 여기에서 ‘태극기민족혁명론’을 제창하고 적기혁명론을 배격하였다. 즉 당의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해서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안으로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한다.”라고 하였다. 당강은 보통선거의 참정권과 기본권 보장,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에 의한 생활권의 평등화, 국비의무교육에 의한 교육권의 평등화, 또한 민족자결과 국제평등, 세계일가의 조성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후 임정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실상 임정의 집권당이었다. 그리고 인류, 민족, 국가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삼평(三平)을 획득하며 서로 공생해야 된다는 삼평사(三平社)를 조직하고 잡지 《평론(平論)》까지 간행케 하였다.

 

한편 삼균주의가 임정 차원에서 처음 개진된 것은 1931년 4월부터이다. 선생이 삼균주의 이론체계를 정립한 임정의 <대외선언>을 기초ㆍ작성하여 재중독립운동자 전원에게 배포하였으며, 또 5월에는 남경에서 개최된 중국 국민당정부의 국민회의에 제출하였다. 이 대외선언서에서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과 임정의 정치이념으로 채택 수용되고, 그 체계가 정립되었다는 임정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또한 1934년 1월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여 <민족문제연구>와 <각국혁명운동사요> 등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선생은 그 해 11월 임정국무위원회에서 삼균제도를 국시로 채택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고 이를 결의에 의해서 통과하게 하였다. 삼균주의를 정리해보면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는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 차원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이 필요하다. 민족 차원에서는 자결주의가 필요하며, 국가 차원에서는 제국주의가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다.

 

 

1941년 임시정부, 선생의 삼균주의를 건국강령으로 공표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광복진선의 강화를 기하기 위하여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선생의 한국독립당이 다시 제휴하여 그 해 8월에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남경에서 결성하고, 동회 명의로 ‘대중전국선언(對中戰局宣言)’을 기초 발표하였다. 선생은 1940년 5월 3당을 통합한 한국독립당을 재건ㆍ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창당 선언에서 다시 삼균주의 정립을 확정시켰다. 또한 그 해 9월 임정은 중국 정부의 전시 수도 중경에 정착하면서, 드디어 민족진영의 모든 항일독립군 요인들이 임정산하로 총결집되어 한국광복군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의 최후단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달 17일 선생은 자신이 기초한 광복군포고문을 광복군 창립전례식에서 공표하였다. 10월에는 임정의 제4차 개헌을 통해 수립된 김구주석체제하에서 선생은 외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임정은 선생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공표하였다. 또 1942년 1월 선생은 임정내부에서 선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임이 된 뒤 내외에 대한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한 구체적인 활동의 하나가 그 해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창설ㆍ활동이었다. 한ㆍ중 공동문제에 대한 폭넓은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공동전선이 강화되었다. 선생은 이 협회에서 김규식과 함께 부회장직을 수행하였고 회장은 입법원장인 손과(孫科, 손문의 아들)가 맡았다. 그리고 1943년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장이 되고 1945년에는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 당ㆍ정 간에 진력하였다. 또 임정 외무부장으로서 ‘대일선전포고문(1941. 12. 9)’, ‘대독선전포고(1945. 3. 1)’ 등을 비롯한 많은 대외문서를 작성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조소앙 선생(동그라미 안)과 임정 요인들이 한국을 앞둔 1945년 11월 3일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 받아

그러나 무엇보다도 임정에서의 선생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은 중ㆍ미ㆍ영 등의 연합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이었다. 임정의 외교정책인 한국독립운동에의 물질적 지원과 임정승인의 획득을 위해 중국정부에는 보다 구체적인 지지를 요구하는 한편, 미ㆍ영 등 연합국에 대해서는 광복 이후 임정의 정통성 확립과 신민주국가 건설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임정 승인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1943년 ‘카이로선언’과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독립을 보장 받은 것은 외교활동의 큰 실적이었다. 또 선생은 일제의 패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3월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정식승인,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리 등을 요구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연합국 국제회의에 임정대표로 참가를 정식 요청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의도한 대로 외교적 성과는 얻지 못하였지만, 임정에 참여한 이후 줄곧 외무부장 등 외교관계를 전담함으로써 선생 자신의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안으로 민족세력의 통합모색은 물론 밖으로 중국 및 서구 연합국에 대하여 한국의 독립문제와 임정의 존재를 일깨우는데 큰 몫을 해내었던 것이다.

 

 

해방 후 국민의회 의장으로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에 나서

1945년 8ㆍ15 광복을 맞아 12월 선생은 임정 대변인 겸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 환국하였는데, 환국 당시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따라 건국운동을 계획하였다. 임정요인은 이러한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그 달 말에 모스크바 3상(미ㆍ영ㆍ소)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격렬한 국민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특히 임정요인에게는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이 신탁통치안으로 즉시 독립이 부정되었다고 판단해 다시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국민의 반대에 호응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어 반탁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처음 공산당도 이 반탁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뒤에는 돌연 찬탁으로 그 태도를 바꾸었으며, 그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큰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에 1946년 임정에서는 그 후계체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를 조직하고 선생이 그 의장이 되었으며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또 그 의장에 선임되고, 1948년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통합대회에서 다시 의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임정계를 중심으로 반탁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위원장에도 선임되어 각 지방에 순회유세를 실시하여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때 소집된 비상국민회의에서 김구와 함께 임정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고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ㆍ미ㆍ소공동위원회의 참가를 반대하는 등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단독정부수립에도 반대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취임을 거부하였다. 사실상 신탁통치를 배격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1947년 9월 한국독립 문제의 유엔의 이관을 통일독립국가 건설의 호기로 파악하여 남북협상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8년 2월 유엔에 의해 남한만의 선거가 결정된 단정에 반대하여 3월 김구ㆍ김규식과 함께 총선거에 불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남북협상안 7개항목을 발표하고 남북에 의한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하여 선생은 김구ㆍ김규식과 조윤제ㆍ조시원ㆍ조일문ㆍ하상령ㆍ임영대ㆍ조만제 등 많은 동지와 함께 월북하여 평양에서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결국 소련의 ‘코민포름’ 지령 하에 강대한 권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한 북쪽과 남북협상회의에서 뚜렷한 결론을 보지 못하고, 선생은 5월 돌아오고 말았다. 선생은 남북협상회의에 참여하면서 이때 삼균주의 원칙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삼균주의청년동맹, 삼균주의학생동맹 만들고, 사회당 세워 위원장에 선임돼

한편, 광복 후 임정 중심으로 활동한 선생은 삼균주의 실천을 지향하는 청년조직으로서, 1946년 ‘삼균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에는 ‘삼균주의학생동맹’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조만제가 선임되었다. 이들 청년단체의 육성ㆍ발전을 지향하고, 선생은 삼균주의에 기초한 민족통일과 세계평화를 동시에 추구했던 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은 임정의 정통성을 계승한 정부이므로 이를 지지하고 “주권과 영토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대한민국을 거부하면 안 된다.”며 정부수립의 당위성을 인정하였다. 1948년 10월에는 한국독립당과 결별하여 12월 독자적으로 대한민국을 지지 육성함과 삼균주의를 집행할 원칙에 동의하는 백홍균ㆍ조시원ㆍ하상령 등 노선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사회당의 기본노선은 결당대회 선언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완성하고 정치ㆍ경제ㆍ교육상 완전 평등한 균등사회 건설에 일로 매진”하는 즉 우선 대한민국 체제 내에서 삼균주의 이념을 실천하려는데 있었다.

 

 

전국 최고 득표로 2대 국회의원 당선. 납북 후 김일성 요구 거부하고 중립화 통일운동 전개

이렇게 선생은 종래의 단정 반대의 태도를 철회하여 총선거로의 참가를 결의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회 총선거에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34,035표)로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에 진출하여 국정의 대계를 전진시킬 수 있는 큰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6ㆍ25전쟁으로 서울에서 강제납북 되었다. 납북된 선생은 전시하에서 가혹한 생활을 견뎌야 했고, 전후는 박헌영(朴憲永)의 숙청 등 정치적 사건 때마다 번롱(翻弄)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일성(金日成)의 요구를 거부하고 납북인사들과 함께 독자적인 ‘중립화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1958년 9월 10일 선생은 비극적인 임종에 즈음하여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때 순국하여 평양 남쪽 애국지사 묘역에 고이 잠들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조항래 / (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출처 :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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