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500년을 이어온 지리산의 명당 함양일두고택/우리땅 걷기 지리산길 제3코스

강나루터 2016. 1. 9. 05:21

 함양일두고택(咸陽 一蠹 古宅)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 정여창(1450∼1504)의 옛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현 소유자의 고조할아버지가 다시 지었다고 하며, 안채는 약 300년 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집의 터는 500여년을 이어오는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정병호가옥(咸陽鄭炳鎬家屋)'이었으나, 조선 성종 때의 이름난 유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생가지에 후손들이 중건한 가옥인 점을 반영하여 그의 호를 따라 ‘함양 일두 고택’으로 지정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하신지 1세기 이후에야 중건된 것이라 하나 원래의 집이 이 터에서 500여년을 이어져 온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운위하는 인사(人士)는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한다.

이 집을 문화재로 지정한 특색의 한가지가 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 소재 중요민속자료 186호.

<이하 출처 : 문화재청>

함양일두고택 진입로

 

 

 

자잘하면서도 널찍널찍한 돌로 포장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야 막다른 듯한 즈음에서 솟을대문을 본다.

 

 함양일두고택 대문채의 솟을대문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를 게시한 문패가 5개가 걸려 있다. 이편액은 나라에서 충효를 기려 내린것으로 보통은 하나이다.

 

솟을대문 정려 편액

 

 

 

 

 대문채 후면

 

 

대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는 'ㄱ'자 모양이다.

 

함양일두고택 사랑채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內樓)가 전출(前出)한 구조이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

등을 써붙인 사랑채는 전퇴(前退)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지그시 앉아있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랑채의 내루(內樓)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端雅)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석초(石礎)를 삼았다는 특색을 지녔으며 또 누하(樓下)의 주간(柱間)을 판벽(板壁)으로 막아

수장처(收藏處)로도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랑채 앞마당에 꾸민 인공산이다.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엄격한 법도에 따라 아름다운 인공산을 꾸몄는데, 지금은 원래의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구조적 특성과 함께 살림살이들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랑채는 집주의 병호옹(炳鎬翁)의 고조부께서 중건(重建)하였다고 하는데 이분은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다고 한다.


 

 

 

안채로 들어 가는 입구에 있는 중문채

  

 

일각문을 들어서서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면 다시 중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야 '一'자모양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다. 또 안채 뒤 따로 쌓은 담장 안에는 사당이 있다.

 

함양일두고택 안채

 

 

일곽(一廓)을 이룬 안채는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낸 덕제선생(德濟先生)이 300여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 부엌

 

 

 

안채 툇마루

 

 

 

 

 

안채와 중문채 사이, 뒤에 보이는 것이 광채(위)

 

 

 

 

 

 

아래채(위), 아래채 좌측면(아래)

 

 

 

 

 

 

 

곳간채(위 좌측)와 그 앞의 절구와 항아리(아래)

 

 

 

 

 

 

 

안채 뒷면(위)과 장독대(아래)

 

 

 

 

사당

 

 

별당

 

 

 

 

 

 

  

 

 안채 뒷쪽으로 가운데는 사당으로 들어 가는 문, 오른쪽 건물은 광채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士禍)로 죽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육을(六乙)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예문관검열·세자시강원설서·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그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鄭夢周)·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정여창 역시 스스로 성인을 공언하여 이러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했고 결국은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500년 명당이라고 하는 이 터에서 태어 나신 분이 사화에 연루되어 죽고 부관참시까지 당한 것을 보면

과연 명당이 무엇인지 허망하기 그지 없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출처 : 로드그래퍼 청솔객이 걷는 길
글쓴이 : 청솔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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