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이야기

[스크랩] 性近習遠(성근습원)

강나루터 2016. 1. 11. 12:25


성근습원(性近習遠) 본성보다 습관에서 차이가 생긴다 공자 역시 인생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믿었다.<br>
		본성보다는 습관과 노력이 인생의 결정적 요소이며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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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려우면 긁고 배가 고프면 먹고 문제가 생기면 고민한다. 이것은 사람마다 서로 닮은 측면이다. 시험을 치면 성적이 어떤 이는 높고 어떤 이는 낮으며, 스포츠를 배우면 기량이 어떤 이는 뛰어나고 어떤 이는 뒤떨어진다. 이것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측면이다. 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묶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사람은 같은 점으로 인해 공감과 위안을 느끼지만 다른 점으로 인해 갈등과 고통을 느낀다.

여기서 같고 다른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람 사이에 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이는 사회생활을 한 이래로 인류가 해답을 찾아온 묵은 질문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유전자, 출신, 재능, 능력, 천성, 계급, 신분, 학습, 환경, 노력 등 여러 가지 대답이 제시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로 묶을 수 있다. 유전자, 천성 등이 선천성에 속한다면 학습, 노력 등은 후천성에 속한다. 공자는 습관이 사람을 다르게 빚어낸다고 생각했다.



논어 양화()편 2장

- 453번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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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은 본성, 경향성의 뜻이다.
: 상()은 부사로는 서로의 뜻이고 동사로는 보다, 돕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부사로 쓰인다.
: 근()은 가깝다는 뜻으로 멀다는 뜻의 원()과 의미상으로 반대된다.
: 습()은 익히다, 습관의 뜻이다.

: [논어()]는 공자가 제자를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을 수록하고 있다. 공자가 발언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장은 ‘자왈()’로 시작된다. ‘자왈’은 공자가 말한다는 뜻이지만 오늘날 직접 인용에 사용하는 문장 부호인 큰따옴표(“ ”)와 같다. 즉 ‘자왈’은 그 다음에 내용이 공자가 직접 한 말을 그대로 전한다는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 ‘공자()’의 이름은 공구()이다. 한자 ‘자()’는 다양한 용례로 쓰인다. 예컨대 자()는 자식, 아들, 접미사로 쓰인다. ‘자녀()’에서 자는 아들이고, ‘의자()’에서 자는 접미사이다. ‘공자’의 자는 존칭이다. 제자와 후학들이 공구를 존경하여 가문의 성 ‘공()’ 다음에 ‘자()’ 자를 붙여서 공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 장자에서 자 자가 쓰이는 것처럼 학문적 성취를 거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를 붙여 불렀다. 공자가 살았을 당시는 학자만이 아니라 정치인, 공직자도 자로 불리었다. 오늘날의 경우 신정근은 ‘신자’가 되고, 류현진은 ‘류자’가 되는 것이다.



‘성()’의 어원

조선시대에 성()의 범위를 두고 뜨겁게 벌어졌던 사단칠정론의 대표적인 학자 이황. <출처: (CC) intergral>



‘성()’은 사전적인 풀이를 넘어서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편하게 지내던 친구 사이도 문제가 생기면 정색을 하고 “우리 이야기 좀 하자”라고 하듯이 ‘성’도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만하다. 공자 이후로 동양철학은 ‘성’을 중심으로 펼쳐질 정도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성()은 글자만 보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왼쪽의 은 마음 ‘심()’ 자와 같고, 오른쪽의 ‘생()’은 태어나다, 생기다는 뜻이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는 성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식의 씨앗을 땅속에 심으면 새싹이 땅을 뚫고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사람이 어떤 일을 겪으면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고민을 하면 생각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과 비슷하다. 예컨대 칭찬을 받으면 기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퍼진다. 이러한 감정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동양철학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모두 성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조선시대의 사상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황기대승의 ‘사단 칠정 논변()’도 알고 보면 성의 범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학술 토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은 경향성인가 본성인가

그렇다면 왜 성()의 범위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결국 ‘성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성은 크게 두 가지 맥락으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가 경향성이고, 둘째가 본성이다. 경향성은 기울어지는 성향을 나타낸다.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려고 계단을 올라가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엉덩이가 평평한 곳에 있으면 아이는 미끄럼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엉덩이를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면에 걸친 채 손을 놓으면 몸이 어느새 쑥 미끄러져 땅바닥에 있게 된다. 이렇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상황에서 멈추거나 뒤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온갖 감정을 드러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은 화를 낼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 중에 화의 상태로 기울어졌다는 것이고, 웃는다는 것은 사람이 드러낼 수 있는 감정 중에 기쁨의 상태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화를 내던 사람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기뻐서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화를 내고 있으면서 동시에 기뻐서 웃을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경향성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면 드러내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경향성은 순전히 개인적인 성향도 있지만 민족과 인종의 집단적 성향도 있다. 예컨대 “길동이는 무슨 일이 생기면 잠수를 타!”라는 말은 개인적 경향성을 나타낸다. “한국 사람은 신바람이 나면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어!”라는 말은 민족적 경향성을 말한다.

본성은 사람을 비롯해서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예컨대 소금은 맛이 짜다. 짠 맛은 소금의 본성이다. 설탕은 달다. 단 맛은 설탕의 본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짜지 않는 소금’과 ‘달지 않는 설탕’을 상상할 수 없다. 본래의 성질을 가지지 않는 소금을 소금이라고 할 수 없고 설탕을 설탕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소금과 설탕처럼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잃을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성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는 “사람은 유희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는데, 유희(놀이)가 바로 사람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맹자는 사람이 잘못을 하면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수오지심()’을 말했는데, 이 수오지심이 사람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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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라고 보았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을 수오지심()이라고 말했다.



성()의 두 가지 풀이는 초점이 다르다. 경향성은 사람이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본성은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느냐에 상관없이 실현해야 하는 가치를 나타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성의 의미와 범위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인류의 영원한 문제

새해에 우리는 금연, 다이어트 등을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2500년 전 공자도 이 문제를 고민했다. <출처: © gettyimages>



해가 바뀔 무렵이면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계획을 세운다. 흔히들12월은 반성하는 달로, 1월은 다짐하는 달로 삼는다. 1월에 세운 계획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연초 금연과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가도 2월이 되면 다시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가리지 않게 된다.

계획은 지키려고 세우는 것인데, 왜 이렇게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물음은 한 개인만이 겪는 상황이 아니라 유사 이래로 인류가 겪는 공통의 문제이다. 계획을 세워놓고 달성하는 정도에 따라 사람 사이에 차이가 생겨난다. 이러한 차이는 같이 어울리는 사람 사이에 영향을 끼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공자도 같은 문제를 고민했다. 공자가 뛰어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는 역사와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결과 그는 “경향성(본성)보다 습관이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다”라고 보았다.


유전자는 바탕, 습관은 결정적 요소

이에 대해 누군가는 금방 공자에게 “유전자, 출신, 천성 등 선천적 요소가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복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과 고아원에서 자란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더 많은 능력을 계발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고 가정해보자. 전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후천적인 요소보다 선천적 요소가 사람을 좌우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본성(경향성)과 습관이 사람에게 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마라톤 시합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본성(경향성)은 마라톤 시합의 출발과 초반 상태에 영향을 준다면, 습관(연습)은 마라톤 시합의 중반과 후반 상태에 영향을 준다. 발이 평발인지 키가 큰지 등은 달리기 시합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은 마라톤 성적을 전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신체적 조건이 불리한 사람이 그 결함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 선수는 전통적으로 하계올림픽의 육상, 수영 종목과 하계올림픽의 스케이팅 종목에서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박태환, 이상화, 김연아 등을 보면 신체적 조건은 불리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해냈다. 요컨대 경향성(본성)은 사람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바탕이지만 습관이 사람의 개성을 살려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를 ‘공자’로 만든 1만 시간의 노력

공자는 모든 것을 성취한 입장에서 습관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와 누나 같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공자를 데리고 오늘날취푸()로 이사를 했다. 공자는 훗날 대학자가 어떻게 일상적이고 잡다한 일까지 잘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젊은 시절에 닥치는 대로 별별 일을 다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중국 산둥성 취푸(Qufu)에 있는 공자의 사당. <출처: (CC) Rolf Müller>



공자가 경향성(본성)이 아니라 습관의 힘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관찰할 결과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길어낸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유롭기보다는 결핍되어 있고 성공을 거두었다기보다 실패를 거듭하는 삶을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습관의 힘을 밀고 나갔던 것이다. 흔히 오늘날 성공의 열쇠로 말하는 ‘1만 시간의 법칙(하루 3시간씩 10년 동안 1만 시간 이상을 투자하면 꿈을 이룬다는 주장)’을 공자 스스로 실증해낸 것이다. 1만 시간의 습관은 공자가 부족하고 결핍된 상태를 초월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경험과 성취를 나의 롤 모델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공자도 물론 역사와 현실의 사람들로부터 배운 점이 있지만 자기 스스로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본성(경향성)은 이미 가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여유와 방심을 줄 수 있지만 습관은 아직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분투와 노력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 그렇게 생긴 에너지는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출처 : 꽃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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