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소백춘추 6월] 천문학자 무송헌 김담과 칠정산
- 김태환(월간 소백춘추 편집국장)
<세종문운을 빛낸 천문학자 무송헌 김담>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1464)은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선성(예안)이고,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이다. 조부 김로(金輅)는 고려때 좌우위보승랑장으로 고려 절신이고, 아버지는 영유현령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平海 黃氏)로 고려 때 공조판서를 지낸 유정의 따님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으며, 1435년(세종 17)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후에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이순지(李純之)가 간의대(簡儀臺)에 나가 천문을 살펴보던 중 어머니가 상(喪)을 당하자 그 일을 대신 맡게 되었다.
1437년에는 집현전 저작랑, 1439년에 집현전 박사가 되었고, 그해 이순지와 더불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교정해서 올렸다. 이전에 왕명으로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이 수시력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혔다. 이 후 수정을 해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었는데, 이를 보완한 현존(現存)하는 규장각본인 칠정산외편과 태양통궤(太陽通軌)·태음통궤(太陰通軌)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의 편찬으로 되어있음을 보아 이 두 사람이 칠정산내편의 교정·편찬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담은 나이 25세에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정인지, 이순지, 박윤장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을 시행했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32세 때 승문원 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1448년 서운관 부정이 되었고, 이듬해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48년 전라도 관찰사, 1451년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를 배척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렸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1456년 이 후 안동부사, 1458년 경주부윤, 1464년 중추원사를 역임했다. 그는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칠정산외편》·《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대통력일통궤 大統曆日通軌》·《태양통궤 太陽通軌》·《태음통궤 太陰通軌》·《교식통궤 交食通軌》·《오성통궤 五星通軌》·《사여전도통궤 四餘纏度通軌》·《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경오원력 庚午元曆》·《선덕십년월오성릉범 宣德十年月五星陵犯》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편찬하였다. 그가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이 도적을 잘 다스렸으며, 장물의 증거를 발견하면 비록 그 양이 적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영주 사림에서 향현사(鄕賢祠)와 문계서당(文溪書堂, 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1리 서원마을에 있었음.)을 지었는데, 뒤에 다시 구강서원(龜江書院)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이축하여, 개명되었다가 그 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에 철폐되었다.
<집현전에서 17년을 보내다>
김담이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 기관인 집현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435년(세종 17) 19세 때 일이다. 그는 19세에 집현전 정자(정 9품)로 집현전에 뽑혀 들어가 21세인 1437년(세종 19)에 저작랑(정 8품), 23세인 1439년(세종 21)에 박사(정 7품), 25세인 1441년(세종 23)에 부수찬(종 6품), 35세인 1451년(문종 2)에 직제학(종 3품)에 올랐다.
집현전은 세종 2년인 1420년에 궁궐안에 설치된 후 37년 후인 1456년(세조 2)에 혁파(革罷)될 때까지 37년간 존속하면서 약 75명의 집현전학사들이 세종년간의 문화부흥을 일으켰다.
집현전의 활동을 대체적으로 3기로 나누는데 1기는 세종 2년~세종 9년까지이고, 2기는 세종 10년~세종 18년 까지이며, 3기는 세종 19년부터 세조 2년까지로 구분된다.
김담은 2기인 세종 17년에 집현전에 들어가 3기까지 활동했다. 그는 집현전에서 17년간 활동했으며 1계급 평균 재직 년한이 1년 7개월이었다. 특히 집현전 학사 75명 중 집현전 초입연령이 네 번째로 어린 19세였다. 집현전의 제학(提學) 이상은 겸관으로서 명예직이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즉 전임학사(專任學士)였다. 따라서 집현전의 실무책임자는 부제학으로서 행수(行首)라고도 했다. 집현전 전임관, 즉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에는 10인이었으나, 1422년에는 15인, 1426년에는 16인, 1435년 초에는 22인, 그 해 7월에는 32인으로 점차 늘었으나, 1436년에 20인으로 축소되어 고정되었다. 또한 약간명의 서리(書吏)를 배속하여 행정말단의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집현전 학사의 자격은 문사(文士)여야 하였고, 그 중에서도 재행(才行)이 있는 연소한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집현전은 그 설치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文風)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도 그와 같은 원칙에 의해서 육성하였기에 그 특성은 학문적인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에는 일단 집현전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전직됨이 없이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하여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六曹)나 승정원(承政院)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장기연구직인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수장하도록 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하게 하였으며, 그 밖에 여러가지 특권을 주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김담은 이곳에서 17년간 학문연구에 정진했다.
<김담과 이순지가 만나다>
천문학자이며 과학사 연구가인 유경로(兪景老, 1917~1997) 선생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문학자 세 쌍을 뽑았는데, 그 첫 번째가 세종대의 김담(金淡, 1414~1464)과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이다. 이 두 사람은 간의대와 서운관에서 함께 일하며 조선의 역법(曆法)체계를 바로 세워 역법독립과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꼽히는 두 쌍은 서양 역법인 시헌력의 소화와 활용에 기여한 영·정조시대의 서명응(徐命膺)과 서호수(徐浩修) 부자, 그리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과 천문·역산·수학에 큰 업적을 남긴 철종시대의 남병철(南秉哲)과 남병길(南秉吉) 형제다. 그 중에서도 김담과 이순지가 으뜸이다. 김담과 이순지와 첫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세종의 간의대사업의 내용을 기록한 김돈의 「간의대기」에 기록된 세종 19년 4월 15일 실록기사에는 전해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묘를 하고 있는 봉상시판관 이순지에게 갑작스럽게 두 단계나 높은 정4품 호군의 벼슬이 제수되고 시묘를 중단하고 관직에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순지가 역산(曆算)에 정밀하여 세종의 간의대사업에 참여하여 공헌이 많았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살게 되니 간의대에서 천문을 관측하던 일에 중대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이를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림과 동시에 여의치 않으면 시묘중인 이순지를 기복(起復)시킬 것임을 언명하였다. 승정원에서 “집현전 정자 김담은 나이는 젊지만 민첩하고 영특함으로 가히 맡을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여러 사람이 집현전 정자(正字)인 김담(당시 20세)을 천거하여 김담이 이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넉 달 후 세종은 이순지에게 기복(忌服)하기를 명하고, 이어 벼슬을 올려 주고 당시 사간원 지사였던 그의 아버지에게도 “모름지기 아들 순지로 하여금 벼슬에 나아가게 하라”는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지만 시묘를 멈출 수 없어 이순지는 고사를 들어가며 시묘를 중단할 수 없는 이유와 자신의 건강이 나쁘고 역산의 미진함을 깨우치는 데 여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5일 걸러 두 번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막무가내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시대 초기 최고의 역산가인 김담과 이순지가 한 팀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은 역법을 교정하고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역법 토착화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기유년(1489) 12월에 윤필상이 아뢰기를 “관상과 추보(推步)는 나라의 큰 일 입니다. 조종조에 김담이 역법에 정밀하였으나, 김담 이 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젊고 총민한 문신을 골라서 천문산법을 학습하게 하소서…….’
<《서운관지》 권지 3, 고사>
세종조에는 김담과 이순지가 천문에 정통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으니 마땅히 사람을 선발하여 천문을 익히게 하여야 한다’
<《서운관지》 권지 3, 고사>
이들은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천문·역산학자들로서 이들의 사후에도 혜성이 나타난다던가 천문측정과 역산에 문제가 생길 때에는 임금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이들을 아쉬워했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칠정산을 저술하다>
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천문기구와 시설을 갖추어 천체를 관찰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역서를 작성하는 관상수시(觀象授時)야말로 정치의 요체로서 과학기술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도 바로 이러한 정치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 왔기 때문에 천문·역산과 시간측정의 역사가 곧 과학기술사의 큰 줄거리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는 독자적인 역서를 만들지 못해 중국의 역서를 도입해 썼는데,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수시력(授時曆)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쓰이게 된 것은 세종대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교정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되면서부터다. 칠정산이란 7정의 운행을 계산하는 역법이다. 역(曆)이란 주어진 시각에서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위치를 계산한 표를 총칭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천체관측과 계산이 이루어져 자오선(子午線)을 지나는 별의 이름과 경점(更鮎) 시각이 얻어진다. 따라서 역법이란 책력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천문상수 등의 자료를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서는 서운관에서 다음 해의 책력을 만들어 동짓날에 백성들에게 내리면 백성들은 이것으로 농사지을 시기와 기념일을 챙기고 바다에도 나갔다.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중국을 기준으로 한 대통력(大統曆)이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고, 대제학 정초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역법을 연구하여 우리의 실정에 맞는 역법 만들기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천문·역법은 문관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더욱이 생색이 나지 않는 공부라 이것을 깊이 연구하려는 사람이 적었다. 세종 24년에 정초, 정인지, 정흠지가 명나라의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연구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하였는데 간행된 것은 세종 26년(1444)이다. 이 때 실무를 맡은 이가 김담과 이순지였다. 「칠정산내편」은 명나라와의 정치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역원(曆元)을 홍무 17년으로 하지 않고, 원나라의 지원(至元) 17년(1280)으로 하여 사실상 대통력 대신 수시력을 교정하여 역(曆)을 계산하고 한양을 기준으로 한 상수들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양을 기준으로 표준시간을 정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천문대의 천체측정자료를 바탕으로 천문연구원에서 역서를 제작하여 발표하면 개인이 달력을 제작하여 보급하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식만 다를 뿐이지 역서발간을 국가가 관장하는 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②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세종 24년(1442) 김담과 이순지는 아랍 역법, 즉 회회력의 모든 수치를 한양을 기준으로 교정한 「칠정산외편」 다섯 권을 편찬하여 「칠정산내편」의 보조력으로 사용하여 일식과 월식의 발생 등 교식(交食)의 추보(推步, 계산)에 활용하였다. 또한 이들은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과 「경오원력(庚午元曆)」도 교정하여 편찬하였으니 이 때에 비로소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독자적인 역법을 갖추게 되었다.
성주덕(成周悳, 1759~?)가 지은 《서운관지(書雲觀志)》에서는 ‘회회력을 얻어서 이순지, 김담 등에게 명하여 그 것을 검토, 교정하여 외편을 만들게 하셨다’고 적고 있다.
「칠정산내편」에서는 천체위치 표시에 28수(宿), 주천분(周天分)을 365만 2,575분(항성년=365일 2,575(평균 태양일)에 해당하며, 현대의 365일 2,564와 매우 근사하다. 주천도(周天度, 곧 원주)를 365도 25분 75초, 곧 365도 4분지 1도(1도는 100분, 1분은 100초)의 각도법을 사용하였다. 반면 「칠정산외편」에서는 아랍 방식에 따라 28수 대신에 12궁(宮, zodiac)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주천을 360도, 1도를 60분, 1분을 60초로 하였다. 이순지와 김담이 창안한 칠정산의 계산법은 효종 때까지 쓰였다. 박성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칠정산내편」은 2세기가 지난 뒤인 1643년 통신사의 일원인 박안기(朴安期)에 의해 일본에 전해져 이를 배운 강야정현정(岡野井玄貞)의 제자인 삽천춘해(澁川春海)가 40년 뒤에 「정향력(貞享曆)」이라는 일본 최초의 역법을 제작하는 데 크게 활용하였다고 한다.
<왕립천문대 간의대에서 천문을 관측하다>
김담과 이순지는 왕립천문대(王立天文臺)인 간의대(簡儀臺)에서 대간의, 소간의, 구표 혼의(선기옥형), 혼상 등을 이용하여 천체를 관측하여 칠정산을 찬정하였다. 세종 때 이천(李薦)은 호조판서인 안순(安純)과 더불어 경복궁 안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의 축대를 쌓고 대 위에는 쇠와 돌로 난간을 두르고 가운데에 대간의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간의의 남쪽에는 이 곳의 방향을 바로잡는 데 쓰이는 정방안(正方案)을 장치하였다. 간의대 서쪽에는 청동으로 높이 40척 되는 규표(圭表)를 만들어 세웠는데 이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규표였다. 규표의 서쪽에는 작은 집을 짓고 혼의(渾儀)와 혼상(渾象)을 동·서로 배치하였다. 이것이 세종 15년 8월에 완성된 간의대 시설의 대강이다. 이 간의대에서 김담은 이순지와 더불어 천체를 관측했다. 세종은 이 간의대를 귀하게 생각하였는데 세자 문종으로 하여금 김담과 이순지와 함께 관측하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간의대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간의는 간의대 위에 설치하고 천체를 관측하는 의기이다.
나일성 교수는 “간의는 김담과 이순지가 함께 가장 많이 사용한 천문의기였다.”고 평하고 있다. 대간의는 「원사(元史)」의 곽수경의 법에 따라 만들었는데, 세종은 먼저 이천을 시켜 「원사」의 기록에 따라 대간의를 제작하여 간의대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하룻밤에 5명씩 교대로 천체를 관측하고, 세종도 몸소 세자(뒷날 문종)를 대동하고 간의대에 올라 세자에게도 관측법을 가르치는 등의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전문적인 관측은 김담과 이순지를 시켰다. 특히 혜성이나 객성 등 하늘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면 예외없이 밤낮으로 관측하도록 하였다.
대간의는 규모도 매우 거대하고 한 번 설치하면 이동이 쉽지 않아 세종은 대제학 정초(鄭招)와 정인지에게 이것을 간소화한 소간의를 제작하도록 하여 경복궁의 천추전 서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보냈다. 또, 「간의대기」에 “대의 서쪽에는 동표(銅表)를 세웠는데 높이는 8척으로 얼의 5배다. 청석을 깍아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에는 장·척·촌·분을 새겼다. 영부(影符)를 써서 일중(日中)의 그림자와 맞춰서 음양의 차고 주는 이치를 미루어 알도록 하였다”라고 하여 동표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였다. 동표는 청동으로 주조한 규표를 말하는 것으로, 규표는 인류가 최초로 발명한 천체관측기로서 이미 요·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혼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혼천의라 불렀으며, 적도의·황동의·지평의도 모두 이것에서 유래한다.
혼의가 여러층의 환으로 구성된 데 비하여 혼상은 구체로서, 구체 위에 별자리를 표시하고 별자리를 동정(同定)하여 시각을 알아내는 천구의(天球儀)를 말한다.
혼상을 하루에 한 번씩 회전시켜 보면,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고,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도 측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BC 70`~BC 50녀에 이미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개량하였다.
1437년(세종 19)에 제작하여 간의대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지름 71.6cm인 구(毬)에 칠포를 입혀서 만들었다. 그 후 세조 때 만든 것은 오랫동안 잘 사용되었으나 기계부분에 고장이 생겨 1526년에 수리하여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보관되면서 두 번째 혼상이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세 번째는 1601년(선조 34년)에 이항복(李恒福)의 감독하에 제작되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보이는 혼상은 퇴계 이황 선생이 만든 것으로 형태만 겨우 남아 있다.
<칠정산, 일본 역법에 영향을 주다>
칠정산은 바로 세종의 열성의 결과로 완성된 우리나라에 맞는 천문 계산법이었다.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정인지(鄭麟趾) 등 많은 당대의 천문학자들이 동원되어 완성된 이 책은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편’은 전통적 동양식 천문 계산술을 이용하고 있고, ‘외편’은 아라비아 방식인 서양 천문학 전통을 활용한 계산법을 보여 준다. 한마디로 동·서양의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수용하여 우리에게 맞도록 소화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 550년 전 세계에서 이 정도의 과학수준에 있었던 나라나 민족은 몇이나 될까? 자기 나라의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동을 미리미리 계산해 낼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였을까?
1442년에 세계 과학 올림픽이 열렸다면 우리나라는 3~4등 안에 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보다 일식을 먼저 예보할 정도의 천문학 수준을 이룩한 민족은 중국과 아랍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보다 어떠했던가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처음으로 우리의 <칠정산>같은 천문학 수준을 이룩한 것은 1683년 <정항력(貞享曆)>이란 역법을 완성한 때였다. 이 천문 계산법의 완성을 일본 과학사에서는 대대적으로 자랑한다. “일본인 천문학자에 의한 일본 최초의 천문 계산법의 완성”이라는 중요성 때문이다. 바로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세종 때의 <칠정산>보다 무려 241년이나 뒤의 일이다. 그런데 일본 역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향력>보다 2세기 이상을 앞선 우리의 <칠정산>에 대해서는 정작 우리 국민들은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 역법을 만든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 사부카와 하루미(1639~1715)는 그가 일본에 맞는 일본 최초의 역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인 학자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과학사를 공부하는 학자가 별로 없다. 한국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천문학사 책까지 읽을 한국인이 거의 없었을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일본 천문학사의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나카야마 시게루(中山) 교수의 책 <일본의 천문학>에는 바로 이 대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인 학자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643년 조선의 손님(客) 나산(螺山)이란 인물이 에도에 와서 역학에 관해 오카노이 겐테이와 토론했다는 말이 <하루미선생실기>에 보인다. 하루미는 바로 이 겐테이로부터 역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나산이 어떤 내용을 전해 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조선에는 15세기 천문학의 최성기에 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을 낸 바 있는데 이는 수시력(授時曆) 연구의 뛰어난 텍스트로 꼽히고 있다.
명말(明末)에는 중국의 역산학 전통이 어느 정도 쇠퇴한 다음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에는 역산학을 배우려던 태도는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일본의 정항력은 김담과 이순지가 만든 칠정산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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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소수박물관 특별기획전》소수박물관, 2006
《우리 지역을 빛낸 발명위인, 발명품》특허청, 2006
전북대사학과《전북사학 제4집》선명인쇄소, 1980
성주덕《서운관지 書雲觀志》소명출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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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향《영주·영풍향토지》여강출판사, 1987
김담 《무송헌문집》회상사, 1989
《영남인물고》
《조선왕조실록》
《동국문헌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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