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살아라” 호통 소리 운곡천 계곡 물소리로 흘러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세상의 풍파가 함부로 밀려들어오지 못하는 곳. 권력을 놓고 서로의 목숨을 거는 당쟁이나 오랑캐의 노략질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는 곳. 세상이 번잡할수록 곧은 선비들은 그런 곳을 찾아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때를 기다려 왔다.
봉화 춘양이 그런 곳이다.
수많은 정자가 선조들의 정기를 간직하고 오늘까지 버텨오고 있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주위는 밝고 따뜻하지만 불나비가 불을 안고 돌듯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권세를 멀리하고 산속으로 찾아들었을 것이다.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에 있는 경북도문화재자료 276호 사미정 앞에 서면 “인간답게 살아라”는 옥천 조덕린의 300년 전의 바른 소리가 계곡물소리로 흐른다.
조덕린은 바른 소리를 하다가 몇 차례나 귀양을 가야 했고 결국은 귀양길에 죽음을 맞은 선비다.
정4품 필선이던 67세의 나이에 당쟁의 폐해를 상소했다가 오히려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다.
‘바른 정치를 하라’ ‘형벌을 살펴서 하라’ 등 시무10조의 상소문 속에 노론을 비난하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뒤 정치권력이 소론으로 넘어가면서 풀려난 조덕린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경상도호소사가 됐다가 난이 평정되면서 동부승지로 오른다.
1736년 서원의 폐해를 없애야 한다며 서원 설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아 78세의 나이로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죽음을 맞는다.
사미정은 조덕린이 종성에 유배되었을 당시 문득 깨달음을 얻어 아들에게 정자를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사미정이라 지었다고 조덕린이 사미정기에 적었다.
그 시간이 참으로 묘하게도 정미년 정미월 정미일 정미시로 1737년(영조 3년) 6월22일 오후 2시쯤이다.
조덕린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순간은 마침 공자의 ‘중용’ 13장에 나오는 “군자의 도는 4가지인데 나는 한 가지도 능한 것이 없다”고 한 대목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자식으로서 아비를 섬기는 일과 신하에게 임금을 섬기는 일, 아우에게 형을 섬기게 하는 일, 벗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베풀어 주는 일을 군자가 할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자는 그 중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미능=未能)고 썼다.
시간을 표현하는 정미의 미(未)자가 ‘아니다’는 뜻의 ‘미’자와 중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조덕린이 중용에서 이 대목을 읽은 순간이‘사미’라고 했으니 우연 치고는 기이한 인연이기도 하다.
사미정은 이보다 30년 전인 1706년 조덕린이 후학 양성을 위해 근처에 지어놓은 창주정이라는 설도 있다.
사철 맑은 물이 넓은 반석 위를 흐르는 옥천 계곡 측면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미정은 건축사적으로도 의의가 높다.
현판 사미정과 내현판 마암(磨巖)은 명상 채제공의 친필이라고 한다.
사미정이 있는 옥천 계곡은 춘양면 서벽리 태백산 지맥 문수산에서 흐르는 운곡천이다.
조덕린이 자리를 잡으면서 자신의 호를 옥천이라고 지었다.
옥천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명신 학봉 김성일의 아들 김잠이 광해군의 난정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옥천이라고 부르면서 굳어졌다고 방유수 봉화문화원 사무국장은 설명한다.
물 맑고 하늘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정치권력보다는 학문 탐구와 후학 양성에 인생의 목표를 삼았던 것이다.
◆선비정신의 산실 운곡천 정자들
사미정에서 멀지 않은 운곡천 상류 법전면 소천리에 학봉의 5세손인 옥계 김명흠의 옥계정이 옥계구택을 뒤로 하고 있다.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화장산에 건립한 정면 4.5칸 측면 2칸의 정자를 193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옥계정은 졸천정사라는 현판도 걸려있다.
김명흠은 13세에 조덕린의 제자가 되어 학덕을 익히고 배웠다.
스승 조덕린이 귀양가 있을 때는 변호와 신원에 고심했고 식량을 조달하기도 했고 조덕린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는 앞장서서 도왔다.
조덕린 사후에는 가족들을 극진히 돌보아서 인륜과 제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김명흠은 특히 효행으로 원방에까지 이름을 알렸는데 부친 살아생전 한겨울에 잉어를 구해 봉양한 이야기나 부친상을 당한 뒤 묘소의 호랑이를 쫓은 일화는 그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한 것이라고 봉화지역에서는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계정에서 운곡천 상류를 잠시 거슬러 오르면 만나는 창애정은 조선중기 창애 이중광이 건립한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 자형 정자로 막돌 기단에 자연석으로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들이고 한쪽에는 누마루를 설치했다.
춘양목으로 지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237호인 옥계정은 운곡천변에서 이중광 선생을 흠모하는 후학들을 지켜보듯 서 있다.
그런데 창애정 앞에 세워둔 창애선생 유허비와 창애정 옆 화장실이 창애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버티고 있어 풍광은 물론 분위기조차 망치고 있다.
창애정에서 운곡천 건너 산기슭에는 창애의 삼촌 두릉 이제겸을 기리는 창랑정사가 창애정을 내려보듯 서 있다.
이중광은 학행으로 추천한 벼슬을 사양하고 옥계정에서 명현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특히 조덕린의 애제자 김명흠과 이광정, 권만 등이 창애정을 중심으로 이중광과 교유했다고 여러 문헌들은 적고 있다.
창애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을만큼 명리를 멀리하고 자기 수행에 몰두했음은 그의 문집이나 여러 행적에서도 나타난다.
이중광이 벼슬길을 멀리 한 데는 젊은 시절 과거 보러 갔다가 과장에서 온갖 추잡하고 문란한 모습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과거를 더럽히고 있다.
나는 결코 이런 작태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그런 결심은 조정에서 내리는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했으니 잠시 경기전참봉에 봉해졌을 때도 잠시 관직에 몸을 맡겼다가 이내 사직하고 내려왔다.
정9품 능참봉 벼슬을 버리고 내려오는 길에 지었다는 시다.
<한없는 청산 속에 자유롭게 놀던 몸이/ 어이하여 오릉의 손님이 되었던가/ 내일 아침 말 타고 청산에 돌아가면/ 여전히 청산 속 사람이 될 것인데>
그뿐 아니다.
그가 죽은 뒤 후학들이 남긴 문집 창애집에는 육도삼략에 나오는 낚시의 권도를 인용한 조자설은 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람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들듯 위험하다는 것이다.
벼슬길에 나서면 연못속의 물고기와 비슷하여 작은 미끼에 걸려들어 큰 뜻을 잃고 일신을 망치기도 한다고 경고한다.
처신을 바로 할 수 없으면 아예 벼슬길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후학들 각계에서 활약
옛날에도 지금처럼 권력에는 파벌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의 주변에는 부정과 비리가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애는 관리들의 비리를 차단할 수 없다면 아예 관리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애 이중광이 그처럼 꼿꼿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퇴계 이황의 후손이고 그의 조상들의 가르침을 몸으로 이어받은 가문의 내력이다.
퇴계의 형 송재 이우의 8세손으로 할아버지는 불의와 타협하기보다 과감히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버린 조부 난은 이동표다.
이동표는 정승의 아들 청탁도 거절하는 인사로 소퇴계라는 인망을 얻은 관리다.
인현왕후 폐비사건 당시 목숨을 건 직간을 했다고 그의 묘갈명은 쓰고 있다.
이중광의 선조들의 이런 내력들이 후손인 경암 이한응에게로 전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 학자 경암은 조덕린의 사미정에서부터 창애정과 옥계정 두릉정 등 춘양의 여러 정자와 풍광을 시로 남겨 정자 아닌 자연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운곡천 인근에 계재 정자를 세워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봉화 운곡천 주변은 지금은 길이 뚫리고 그렇게 훼손되고 있지만 참으로 깊고 깊은 산속이었다.
그러니 세상 명리를 벗어난 선비들이 자연을 벗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기에는 더없이 맞춤한 곳이었다.
수많은 명현들이 이곳에서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더하며 때를 도모했으니 지금도 그 후손들은 사회 각계에서 명활약을 하고 있다.
비록 번듯한 대저택도 아니고 국보나 보물도 아닌 작은 정자들이지만 세상살이를 넘겨다보는 그 넓고 깊은 속은 세월이 지날수록 새록새록해진다.
운곡천 정자들은 우리 선비문화의 뿌리이자 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