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비슬산 유가사-비슬산의 아홉성인

강나루터 2016. 5. 18. 05:06
비슬산의 아홉 성인
유적지종류 : 산
관련사찰: 유가사(瑜伽寺)
설화종류 : 인물설화
시대 : 고려

<요약>
비슬산 성인 반사(甑師) 첩사(瘡師)에 관한 설화

<내용>
일연 스님 당시에 비슬산의 아홉 성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자세하지는 않지만 관기와 도성 두 스님을 비롯해서 반사(甑師)·첩사(瘡師)·도의(道義)·자양(子陽)·성범·금물녀(今勿女)·백우사(白牛師) 등이라 하였다. 반사와 첩사 두 분은 오랫동안 바위틈에 숨어살아 인간 세상과는 교통하지 않고, 속계와는 인연을 끊고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고 나무 열매와 풀뿌리를 먹고, 갈잎을 깔고 덮고 살았다고 한다.
비슬산 정성천왕(靜聖天王) 산신
유적지종류 : 산
관련사찰: 유가사(瑜伽寺)
설화종류 : 기타
시대 : 연대미상

<요약>
비슬산 정성천왕(靜聖天王)이라는 산신 관한 설화.

<내용>
비슬산에는 정성천왕(靜聖天王)이라는 산신이 있어서 일찍이 가섭불(迦葉佛)에게 부촉(付囑)을 받았는데, 산중에 1,000인의 출가를 기다려 여보(餘報)를 받는다고 하였다.
도성암(道成庵) 관련 설화
유적지종류 : 사찰
관련사찰: 유가사(瑜伽寺)산내암자 도성암(道成庵)
설화종류 : 사찰전설
시대 : 고려

<요약>
도성암(道成庵)에서 여러번의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내용>
고려시대에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 스님 당시에는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인의 이름을 딴 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곧 도성이 수도하던 바위인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여러 길이 되었는데, 훗날 어떤 사람이 굴 밑에 절을 지었다 한다. 982년(성종 1)에는 성범 대사가 이 절에 와서 만일미타도량을 열어 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번의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 때 현풍에 거주하는 신자 20여 명이 해마다 모임을 조직하고 향목(香木)을 주워다 절에 바쳤는데, 그 향나무 조각이 밤에는 촛불과 같이 빛을 발하였다. 이로부터 향도들이 향목을 모아올 때면, 고을 사람들이 향도에게 시주하며 빛을 얻는 해(歲)라 하여 하례하였다. 이는 관기·도성 두 성인의 영감이요, 혹은 산신의 도움이라 생각하였다고 한다.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인
유적지종류 : 산
관련사찰: 유가사(瑜伽寺)
설화종류 : 인물설화
시대 : 통일신라

<요약>
도성 관기 두 성인이 비슬산에서 성불한 이야기

<내용>
《삼국유사》 권제5 〈피은(避隱)〉편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는 신라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인이 옛이름이 포산(包山)인 비슬산에서 함께 의좋게 수도하여 각각 성불하였다는 이야기가 다음처럼 전해온다. "관기와 도성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싫어하여 포산에 은거하여 살았다. 관기는 산 남쪽 봉우리에 암자를 지어 거처하고, 도성은 북쪽 봉우리 위의 바위굴에 거처하였는데 거리가 10리 가량 되었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두 사람은 늘상 서로 오가며 살았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생각하면 산의 나무들이 모두 관기가 있는 남쪽을 향하여 구부러져 마치 서로 맞이하는 것 같아서 관기가 그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고 하면 역시 나무가 모두 북쪽으로 기울어져 도성이 관기에게 갔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하여 여러 해를 지났다. 도성은 그가 거처하고 있는 뒷산 높은 바위 위에 항상 고요히 앉아 있곤 하더니, 하루는 거기서 몸을 솟구쳐 전신이 공중으로 날아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관기도 또한 뒤를 따랐다."
출처 : 단나사(보리살타사랑)
글쓴이 : 푸대화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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