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마곡사 대광보전 경내에 있는 무궁화 1946년 4월 하순 백범선생이 마곡사를 찾아 향나무와 무궁화 1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향나무는 지금까지 수세가 왕성하게 잘 자라고 있으나 무궁화는 죽었는지 그 후 누가 새로 심은 것 같다.
활짝 핀 무궁화
수세가 왕성한 백범선생이 손수 심은 향나무
향나무 안내판
당시 기념사진
일본군 중위를 살해하고 은거하며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던 곳
그락교
대광보전
백범 김구선생과 공주 마곡사 무궁화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처서(處暑) 하루 전, 그러나 전국의 날씨는 폭염경보를 내릴 만큼 수그러들지 않았다. 특히 같은 위도(緯度) 상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운 대구는 더 불볕더위라는 예보를 듣고 이른 아침 마곡사를 가기 위해 대전행 버스를 탔다.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년, 한국동란 60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를 맞아 일생동안 조국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흉탄으로 돌아가신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손수 심은 무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무궁화는 나라꽃이다.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리고 심고 가꾸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말로는 애국을 외치는 위정자도 그랬다. 그러나 백범선생은 달랐다. 나라가 좌우와 남북으로 분열되고 혼란에 휩싸였던 1946년 이곳 한적한 마곡사를 찾아 무궁화를 심으며 난마(亂麻) 같이 얽힌 정국을 풀기위해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구에서 대전까지는 2시간, 대전에서 공주까지 1시간, 3시간의 여행은 수월했다. 그런데 공주에서 마곡사행을 타려니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손님이 적어 배차 간격을 길게 한 것은 이해되지만 먼 길을 찾아 간 나그네에게는 무척 아까운 시간이었다. 오후에 꽃이 오므라드는 무궁화의 특성 상 만개한 꽃을 보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마곡사 입구, 주차장은 차들로 만원이었다. 아주 오래 전 와본 것과는 딴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여름을 즐기려는 듯 계곡 역시 인산인해였다. 일주문 현판이 태화산 마곡사(泰華山 麻谷寺)여서 조금은 의아했다. 천안의 광덕사 주산도 태화산이다. 아마 창건주가 같은 자장율사(慈裝律師)였기에 부쳐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탈문, 천왕문을 지나 극락교를 건넜다.
선생이 마곡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진남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을 살해한 죄로 채포되어 인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898년(고종 35) 탈옥하여 몸을 숨기게 되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하은당을 은사로 출가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승려생활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미리 승려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새로 구성되고, 의병활동이 전개되는 등 나라가 어순한 때에 절간에서 허드렛일로 시간을 보내기에 그의 큰 뜻이 허락하지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마곡사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 이듬 해였다.
“인천에 이어 1946년 4월 하순에는 마곡사를 찾으셨다. 정태훈씨가 모는 차를 타고 엄항섭선생과 내가 백범선생을 수행했다. 공주에 도착하자 지방경찰청장과 경찰서장이 나와 백범선생을 모시고 공주군민 환영회로 안내했다. 많은 군중이 모인 감격적인 환영회였다. 환영회를 마치고 백범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았던 유학자 고 김복한(金福漢)선생 댁에 들려서 김복한선생의 영정에 배알하고 준비된 점심을 드시고 떠났다. 그 댁 총각들은 그때까지도 전부 머리를 깎지 않고 땋고 있었다. 그리고 마곡사에 들렸다. 잘 알려진 대로 마곡사는 백범선생이 인천감옥을 탈옥한 뒤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수계(受戒)를 받고 여러 달 승려생활을 한 곳이었다. 마곡사승려 수십 명이 공주까지 환영 나와 있었다. 마곡사 입구부터 승려들과 한국독립당 사곡지부 당원들, 그리고 인근 사람들이 양쪽으로 도열하여 근 50년 만에 마곡사에 오시는 백범 선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국독립당 사곡지부장은 선우영거(鮮于永巨)라는 분으로 나와 종씨가 되어 기억에 남는다.
선생은 절에 들어가시다가 못에 피어있는 수련을 한참동안 보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선생은 자신이 삭발했던 냇가의 바위도 살피면서 5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는 마곡사를 돌아보았다. 선생은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이 그때 그대로라고 하셨다.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글귀였다. <백범일지>에서 선생은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고 감회를 밝힌 바 있다. 절에서는 밤에 백범선생을 위해 큰 재를 올렸다. 백범선생은 50년 전에 불경을 배우던 염화실이라는 방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선생은 마곡사 경내에 향나무와 무궁화 1그루씩을 기념식수하고 떠났다.”
이상은 선생의 비서 선우진 씨의 회고록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에서 옮겨온 글이다.
나는 경내에 발을 드려 놓자마자 우선 무궁화부터 찾았다. 꽃이 많이 피는 8월이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활짝 핀 무궁화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서 있는 무궁화는 1그루가 아니고 7그루였다. 숫자만 틀리는 것이 아니라, 크기나 굵기도 심은 해에 걸맞지 않게 작았다. 또한 그 때 같이 심은 향나무는 안내판을 별도로 설치해 놓았으나 무궁화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 죽었거나 없어진 무궁화를 되살리려고 새로 심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마음 갸륵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새로 심은 분은 이름을 떳떳이 밝히고 그 연유를 나무 아래 적어 놓으면 이 나무 역시 백범선생이 심은 나무와 무엇이 다르랴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7그루 중에서 단심(丹心)이 없거나 수형이 불량한 4그루는 뽑아내고 생육이 좋은 3그루만 잘 보전해 백범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오래 동안 기리고 마곡사의 승보(僧寶)로 삼았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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