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마지막 선비 心山 金昌淑의 애국정신

강나루터 2016. 8. 13. 21:44

籌謀光復十年間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性命身家摠不關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 磊落平生如白日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何須刑訊故多端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일제의 악독한 고문에 전쟁포로 대접을 하라며 호통치다 끝내 앉은뱅이가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스스로 호()를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이라 했다. 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 일제 치하에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꼿꼿세수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3(三節)’이라 불렸던 심산의 한시를 접하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진다. 역사왜곡을 일삼고자 하는 현 정권에게는 심산 선생과 같은 분은 눈에 가싯거리일 것이다.

 

시간이나 세월은 많은 위인을 잊게도 만들고 떠올리게도 한다. 한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정치가도 매도되거나 잊혀지는 게 인지상정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갈수록 빛나는 위인, 바로 심산이다. 왜 그런가. 심산은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조선조 명유(明儒)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나 196284세로 타계하기까지 우리 민족사상 가장 험난한 시기에 오직 꺾일 줄 모르는 투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지사 중의 지사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27세의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오적(五賊)의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으며, 1909년 일진회(一進會)와 그 앞잡이들이 한일합방론을 들고 나오자 이를 성토하고 저지하기 위한 건의서 사건으로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나라가 망한 후 술과 방랑으로 광인처럼 지내다 3·1운동 민족대표에 유림만 빠진 천추의 한을 씻고자 동분서주했으며,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갖고 상해로 망명했다. 이렇게 된 데는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는 것이 선비의 의무라는 어머니의 엄한 채찍이 있었다.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케 한 것이 500여 명이 체포된 제1차 유림단사건이자 파리장서사건이다.


1916년 동지 송준필에게 보낸 서간의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실유소사(實有所事)에 힘을 써 진부한 옛 생각에 빠지지 말 것과 오늘의 상황 속에 살면서 종래의 편견 체식에 고식하지 말 것 그리고 성리(性理)의 공담에 급급하지 말고 강상을 부식하는 일과 도의를 밝히고 바로잡는 일에 앞세워야 한다는 구절만 보아도 심산은 진보적 유학정신을 가진 민족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부의장이 되었으며, 한때 만주독립군 군사부고문을 맡았다.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동지들을 밀파하거나 영남지역에서 직접 모금을 했다. 조달된 군자금으로 나석주 의사에게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게 했던 운동이 탄로 나 유림인사 600여 명이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제2차 유림단사건이다. 심산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은 단재,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과 힘을 모았으며, 두 아들까지 민족의 제단에 바쳤다.

 

심산은 20여 년에 걸친 네 차례의 투옥과 고문에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표상이었다. 해방 이후 백범과 함께 신탁통치와 남한 단정(單政) 수립 반대투쟁에 앞장섰으며, 사이비 황도유학(皇道儒學) 사상을 가을 척결하고 피폐된 성균관 조직을 재정비하여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교육사상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총칼 앞에서도 김일성과는 죽어도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헌법을 고치며 독재를 굳혀가는 이승만정부에 반대하여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1958년 아시아경기 운동장을 건립한다는 미명 아래 일곱 분의 순국선열의 혼(백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안중근의사 가묘)이 잠든 효창공원을 교외로 이전하려는 음모에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1인 시위를 벌여 축소된 채로나마 현재의 추모공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1962718일 치러진 사회장에서 우습게도 일본 천왕에게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던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선생의 일생은 건국의 공로로 새겨진 명예의 상처로 엮어졌으며 대쪽같이 강직한 선생의 애국심은 항상 국민의 대변자로서 국정을 바로 비판했다선각자이자 직언거사(直言居士)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자고 추모사를 했을 것인가. 자기의 친일행각을 세탁하기 위한 박정희의 노력에 웃음이 나온다. 심산 선생의 사회장에서는 백세사 천하법(百世師 天下法)’이라는 만장(挽章)의 문구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휘날렸다고 한다.

 

病枕無寐憶白凡丹齋二公/ 병상에서 잠못들고 백범과 단재를 생각하며

白凡化爲凶彈鬼 백범은 흉탄 앞에 쓰러지고/ 丹齋去作修文郞 단재는 수문랑으로 멀리 갔네/ 獨憐心山老躄子 가련할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 六年臥病三角陽 여섯 해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심산(心山)- 김창숙문존에서 인용.

* 수문랑은 천상의 옥경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벼슬이다.

 

평생 집 한 칸 남기지 않고 대쪽같이 강직했던 선생은 불의를 보면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충정(忠正)의 인간이었다. 시인 고은은 김창숙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심산을 명징한 칼처럼 이렇게 정의했다.

 

싸가지 없는 이승만 꼬라지/ 진작부터 알았다/ 상해 임정 때도/ 이승만 노는 것 미워했다 싸웠다/ 이 싸움 내내 시들지 않아서/ 1950년대 성균관 관장 자리도 쫓겨나게 디었다/

 

긴 세월/ 16년 감옥살이/ 고문으로 다리병신 되어/ 제 걸음 걷지 못하는 세월/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나이 눈물이 있고/ 사나이 노기 있고/ 사나이 쓰라린 기상 있다/

 

그의 노래/ 저기 저 사이비 군사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 만인보2-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 이만한 상찬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이런 상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록 심산이 그토록 원하던 민족 통일과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여도 어찌 심산의 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박한 세상에도 세월의 더께가 쌓일수록 오랜 시간 빛날 그 이름인 것을.

 

심산 선생의 동상에는 1957년 청천서당(晴川書堂)에서 기거하며 병상에서 지은 고시(古詩)의 일부분 和平幾時現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統一幾時圓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皓天苟不復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無寧遄溘然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가 유언처럼 새겨져 있다.


선생의 문집인 심산유고(心山遺稿)에 어디 음풍농월한 시 한 편이 있던가. 모두가 우국충절과 통일조국을 염원하며 소인배들이 판치는 세상을 경계할 뿐이었다. 선생의 反歸去來辭/ 반거래사중 끝부분을 보자. ‘南北黑風惡 남북을 가르는 흑풍회오리/ 和平未易期 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 彼叢莠之苗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矢竭蹶而耘耔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死道路兮亦何恨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랴

 

선생은 애초부터 고리타분한 유학자가 아니었으며, 참다운 지식인이자 참여 시인이었고 문장가이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은 선생이 쓴 祭中妹星山李氏婦文/ 누이동생 성산 이실 영전에제문을 천하의 명문이라고 극찬했다.

 

2001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은 수유리 심산 묘소를 참배, 절을 하여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이런 분한테 절을 안 하고 어느 분한테 절을 하느냐며 주위의 시선을 일축했다고 한다.

 

김창숙문존(2006년 심산사상연구회 발간)을 덮으며 표지의 심산 선생의 유영(遺影)을 지긋이 응시해 본다. 금방이라도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호통이 튀어나올 듯하다. 친일파들이 광폭의 활보를 하는 이 시기에 마지막 선비다운 단호한 존안에 꽉 다무신 선생의 입을 바로 보기가 겸연쩍다. 삼가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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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1603(선조 36))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희삼(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8(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573(선조 6)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서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여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홍문관직제학이 되고, 이어서 대사성·대사간을 거쳤으며, 1584년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에는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과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학제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 동안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6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중흥요무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그래서 서인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이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현종 2)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경종 3)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등이 있으며, 편서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 황도유교(皇道儒學)

http://blog.ohmynews.com/q9447/317405을 읽으시면 유익합니다.

출처 : 소창대명(小窓大明)
글쓴이 : 바람난 공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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