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합천에서의 권율. 이순신(1)

강나루터 2016. 8. 4. 11:19

합천에서의 권율. 이순신(1)

합천군의 예산을 지원받아 합천문화원에서 발행 배포한 합천군사 내용이 잘 못되었다는 보도와 관련하여 임진왜란 기간 중 관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초계군 갑산면(현 합천군 율곡면)에 주둔을 하면서 주요 작전 전략을 수행한 권율(權慄)도원수와 도원수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한 이순신(李舜臣)장군에 대한 기사가 누락된 사실에 대해 군사(郡史)편집이 잘 못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이를 비롯한 200여 곳의 오류를 바르게 고쳐서 합천군의 역사가 바르게 기록되어 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필자는 군사(郡史)내용에서 누락된 권율(權慄) 도원수와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합천과의 관계를 공부해 보았다.

두 장군께서 합천과 인연이 된 것은 전적으로 왜란 7년 전쟁 때문이었다.

7년 왜란으로 합천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선생을 비롯한 합천(합천.초계.삼가등 옛고을)의병들의 활약 때문이었다.

합천의병사(陜川義兵史)에 대해서는 1994년부터 거군 적으로 추진한 합천임란창의기념사업을 통해서 연구와 기록정리 기념물 설치 보존 등이 잘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권율.이순신 두 장군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다.

15924월에 발발(勃發)한 전쟁은 전국토가 왜군의 점령 하에서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격고 관군과 의병, 명나라 원군들의 피 흘린 전투 끝에 전세를 회복하고 왕이 대궐로 돌아왔다.

대궐로 복귀한 선조는 1593, 6 , 7 전라도 관찰사 권율(權慄)을 도원수로 삼는다고 발표했다.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된 권율(權慄)장군이 남으로 내려오다 73일 적의 무리가 운()을 나누어 1운은 구례(求禮)로 향했고 1운은 이미 운봉현의 경계에까지 왔으므로 낙참장(駱參將)과 송유격(宋遊擊)은 이미 구례를 향하여 떠났고,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은 운봉 팔량치(八良峙)에서 지키고 있으며,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는 운봉 실상동(實相洞)에서 지키고 있고, 방어사(防禦使) 이복남(李福男)은 장수현(長水縣)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적세는 호대(浩大)하고 아군(我軍)은 고약(孤弱)하니 서둘러 제독부에 고하여 시기에 맞추어 속히 구원해 주기를 청할 일로 치보(馳報)를 했다.

이때 (79) 유 총병(劉總兵)은 합천(陜川), 거창(居昌)에는 요장(遼將)이 있었는데 체찰사는 요장(遼將)으로 하여금 와서 고령(高靈)과 합천을 지키게 한 뒤에 행군(行軍)하려고 하였는데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았다.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조방장(助防將) 박명현(朴名賢), 별장(別將) 박종남(朴宗男)은 다만 지친 군사 56백 명을 거느리고서 명장 오 유격(吳遊擊)과 함께 초계(草溪)를 차단하여 수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장군은 이문(移文)을 띄웠으나 그들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고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적은 의령(宜寧)의 기강(岐江) 등지에 책()을 설치하고서 둔수(屯守;진을 수비)하고 있는 숫자가 매우 많은데 날마다 흩어져 나와서 삼가(三嘉)와 의령 등지에서 분탕질 치고 있으며. 합천의 40리 거리에서 망군(望軍)이 전고(傳告)하니, 총병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이끌고서 출발하려 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 중지했다는 보고이다.

1593년 윤11. 조정은 나라의 방위태세를 정비하고, 임기응변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조정의 중요기관을 양분(分朝)하여 그 일반을 왕세자 광해군이 충청,전라,경상 삼도 전권을 맡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에 따라 설치된 기관을 처음에는 분비변사(分備邊司) 이어 무군사(撫軍司)라 불렀는데, 이름이야 어떻든 분조(分朝;왕권을 선조와 세자 광해군으로 나눔)이었다.

1225일 광해군이 전주에 도착함으로써 무군사(撫軍司)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좌찬성 정탁(鄭琢) 분병조판서 이항복(分兵曹判書 李恒福) 분호조판서 한준, (分戶曹判書) 한성부좌윤 김우옹(漢城府左尹 金宇顒) 등이 이에 소속 되었다.

1594년초에 세자가 전주(全州)에 머무르며 과거를 실시하여 문과에서 윤길(尹咭) 9인과 무과에서 1천여 인을 뽑았다.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도원수 권율 전기, 난중일기, 역사소설 임진왜란)

(합천군수 강석정 010-9335-2528)

 

출처 : 강석정의 사랑방
글쓴이 : 보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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