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남원포유]남원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순례지

강나루터 2016. 9. 7. 07:36

 

 

 

지금부터 118년 전이었던 1894년 갑오년.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가치를 내걸고 동학도와 농민군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왜군과 관군, 민보군의 반격으로 20~30만 명의 무참한 순절자를 뒤로 한 채 역도, 폭도, 비도가 되어 눈보라 휘몰아친 광야와 산야로 내몰리고 숨어 살아야 하게 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고 막을 내리던 해였다.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도 세월이지만 역도로 몰린 동학도와 농민군, 그리고 그 가족들은 행여나 그 흔적이 남아서 다시 잡혀 갈까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료들을 없애버렸다.

우리 남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자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천만다행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휘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하며 싸우다가 살아남으신 유태홍 교구장의 구술을 최병헌 후임 교구장이 기록으로 남긴 「남원군 종리원사 부 동학사」 및 ‘순교약력’이 보존되어 있어 당시 남원의 참상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결과가 전라좌도 농민군의 총 지휘부였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 당시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단 1년간 시작되고 막을 내리긴 했지만 그 부침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과 변화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는 미흡하기 그지없다.


 남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회장 황의동)에서는 전라좌도 농민혁명의 실상을 알리고 그 뜻을 모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역군들이 나서서 기념사업을 활성화 시키고 계승 발전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하늘같다는 것이 남원동학농민운동기념사업회의 바램이다.

그러면서도 역점을 두었던 것은 어차피 자료를 찾아내고 발굴하기가 어려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유적지라도 찾아내고 이를 알려야겠다는 데 착안하면서 그림을 그려 본 것이 오늘에 이르러 있다. 뜻밖에도 뚜렷한 동선이 일목요연하게(현재 확보된 연구결과) 그려졌고 이는 확실한 벨트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1년에 한 두기씩이라도 표석을 세워 순례 벨트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으로 금년에 이르러 아홉번째인 얫 북문성터인 구남원역사에 표석을 세우게되었다.

그 과정에서 암초도 많았고 넘지 못한 벽도 많았지만 이에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의 순례벨트를 따라가며 어떤 역사적 의의와 자국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교룡산성

교룡산


교룡산은 풍수상 남원의 객산이라 하여 그 역사성과 상징성에 비해 남원인의 의식에서 조금은 소원된 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룡산은 그 위용과 준엄한 모습에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산이면서 특히 그 험준함에 의지한 교룡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된다.

백제인들의 축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룡산성은 고려 말 왜구의 침공을 격파해 황산으로 몰아내 황산대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정유재란 당시 관군은 교룡산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고 했고 모든 군수품과 무기를 옮겨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명나라 장수 양원의 고집으로 애써 수축한 성을 우리 손으로 무너트리고 남원성에서 대적하여 처절한 패배를 당한 만인의총이 만들어지게 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의 주둔지였으며 농민군의 군량, 무기, 화약 등이 이 성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남원성 안의 지휘부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는 농민군이 활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선국사 마루밑에서 승의병장의 인장이 나와 정유재란 때 승군이 주둔했던 것을 입증하 듯 농민혁명 당시에도 그랬을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전봉준 장군이 김개남 장군을 설득하기 위하여 약 8일간 남원에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 중 많은 시간을 이 교룡산성과 선국사 안에서 회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2. 동학의 성지 은적암

교룡산성 안에는 선국사의 암자로 덕밀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선생은 1860년 득도하여 포교를 시작했으나 관아로부터 활동중지 명령을 받고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하려하자 피신하게 되는데 남원으로 잠입한 수운선생은 이 덕밀암으로 들어가(1861)년「은적암(隱跡庵)」이란 현판을 붙이고 피신하면서 경전을 짓고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는 수운선생이 경상도를 떠나 머문 오직 한 곳이 남원이면서 동경대전의 주요 경전 중 많은 경전들이 이 곳에서 쓰였고 특히 ‘동학론(東學論)’이라고도 하는 ‘논학문(論學文)’도 이 은적암에서 쓴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 수운선생은 서학(西學 : 천주교)과는 달리 ‘東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밝혀 이후 농민혁명도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수운선생은 피신 중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학문과 설법을 듣고 교도가 되었고 선생은 몸소 포교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신변의 위태로움을 느껴 6개월 남짓만에 고향 경주로 돌아가게 되는데(1862년) 이후 얼마지 않아 관아에 체포되어(1863) 사형 당한다.(1864)

수운선생이 은적암에 거처하면서 교룡산에 올라가 검가를 부르고 칼춤을 추면서 심신을 단련하였는데 그 검가는 보존되어 있고 칼춤은 거의 복원단계에 있다고 한다.

동학(천도교)에서는 경전의 대부분이 쓰인 이 은적암을 성지(聖地)로 떠받들고 있는데 암자는 없어졌고 아직 복원하지 못한 상태이며 표지판을 천도교에서 세워두었다. 사적지 안이어서 본 사업회에서 표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후 한국 불교 선구적 개척자이면서 3.1운동의 33인 중 한 분이신 백용성 스님이 최초로 출가한 암자이기도 하며 남원의 산신단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 산신산에서 채화된 불이 일본 도자기의 상징인 심수관씨에게 전달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3. 통한의 남원성 북문지 구 남원역

구 남원역 부지에 대해서는 해야 할 얘기가 너무나도 많다. 축성시기부터 말썽이 있던 남원성, 그 중에서도 북문은 그야말로 통한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성문인데 이 북문은 구 남원역의 부지 안에 있었다. 이 북문을 헐어내고 일제가 남원역을 만든 것이다.

남원성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유년 남원성 전투인데 다 아는 바와 같이 1만여 명이 순사하고 만인의총을 남긴 전투다. 그런데 이 1만 명의 대부분이 순국한 자리가 북문 근방이었으며 그래서 만인의총의 본 무덤이 남원역 부지 바로 옆인 충렬사에 있었다. 이 한 건만으로도 통한의 북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또 한 차례 패전이 있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좌도 농민군을 총지휘하던 김개남 장군이 한양 진격을 목표로 떠난 다음에도 남원에는 1만 여명의 농민군이 있었고 이 농민군은 경상도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운봉으로 진출해야했는데 이것이 방아치 전투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참패한 농민군은 남원성으로 퇴각하여 주둔하였고 승전한 운봉의 민보군은 남원성을 다시 공격하였다. 이에 다시 패배한 농민군은 마지막으로 남원성을 내주고 도망가야 했는데 이 성문 역시 북문이었다.

11월 28일(음)의 패전이었는데 전라좌도 농민군이 막을 내렸다고 해야 할 최후였다.

이 자리에 일제는 성문을 헐어내고 남원역을 만들었는데 이는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얘기는 좀 복잡해서 생략하도록 한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다시 건축하였고 이제 역을 이전하였으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4. 남원부관아 구 남원군청 부지

남원시 하정동 194-1번지 구 군청부지는 호남 제 1의 객사 용성관과 함께 남원시가 보존해야 할 남원부 관아자리다. 이런 연유로 군청이 그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남원의 정치, 행정, 군사, 경제, 법집행이 모두 여기에서 계획되고 집행되었으며 관리, 감독되었다.

이제 시의회 회의실을 비롯한 몇 단체의 사무실만 남고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어 어떤 역사적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춘향전의 절정을 이룬 암행어사 출도와 기생점고, 춘향이 고문 및 매 맞던 자리이기도 하다.

이곳은 군청이 자리를 비우기까지 남원의 심장이어서 어떤 방법으로든 복원되어야 함은 물론 남원의 전반적인 역사가 안내되어야 할 곳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과의 관련은 1894년 6월 김개남 장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라좌도 총지휘부를 이 자리에 꾸렸고 대도회소 및 집강소를 두어 남원은 물론 충청도의 진잠에서 전남의 순천, 광양까지를 장악하고 지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엮은 표석이 세워지려면 이는 본 사업회의 일이 아니라 남원시에서 해야할 일이고 이를 몇 번 협의해 보았으나 아직도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남원의 향교 앞에 진강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이 누각은 남원부 관아의 정문이었다. 관아의 건물을 헐고 새로 지으면서 옮겨 놓은 것인데 아직도 이 진강루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5. 오작교 아래의 서형칠약방

광한루원은 원래 광한루의 누각과 삼신산을 비롯한 연못과 오작교 외에 좁은 부지가 있었을 뿐이다. 이를 확장하고 공원화하기 위하여 주변의 많은 땅을 확보하였는데 남원의 성밖시장도 이때 광한루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남부시장(성안시장은 현 교육문화회관 자리)이라고도 했던 성밖시장은 동학과 농민혁명의 중요한 연고지이다.

옛 시장터에 있었던 호석 현재는 시장터가 광한루확장공사로 광한루 경내로 편입되었다.

우선 1861년 수운선생이 남원으로 잠입해 들어와 최초로 머문 곳이 ‘광한루 오작교 아래 서형칠의 약방’이다. 수운선생이 피신을 하면서 수제자 최자원에게 귀한 약재를 노자로 받아 최중희와 함께 왔는데 약재를 돈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으로 추정된다. 이후 서형칠의 생질 공창윤의 집으로 옮겼다가 은적암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수운선생의 교도가 된다.

또한, 농민군이 궤멸한 다음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체포된 농민군들이 사형 당하게 되는데 그 인원이 수 십 명에 달하고 그 대부분이 저자거리에서 참형된다. 이 저자거리 즉 시장이 성밖시장이며 지금의 광한루원 월매집이나 그 인근으로 추정된다.

본 사업회에서는 이를 알리는 표석을 세우려 시도해 보았는데 광한루원이 사적지로 지정되어 문화재 관리국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행하지 못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도 유분수다. 원래의 사적지를 광한루원으로 끌어들인 것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입장객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입장객들에게 새로운 역사를 알려주면서 볼거리를 보태는 것인데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인근이라 해서 역사적 사실을 묻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6. 농민군의 훈련장 요천

요천변

농민군들이 관군과 맞서기 위해서는 관군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더구나 전라좌도를 관장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은 성격이 괄괄했으며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훈련을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대의 편성도 치밀했었다.

교룡산성이 농민군 주둔지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산이 험하고 비탈이 심해 훈련장으로 쓰기는 부적절한 곳이며 인구 밀집지역인 시내와 접근성이 떨어져 훈련장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다.

대규모 군사 훈련장소를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어 농민군은 요천에서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원형을 완전하게 잃어 짐작하기조차 어렵게 되었으나 고무보 아래의 요천을 보면 옛날의 요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변 여기저기서 훈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를 드높이는 시각적 효과 때문에 남부시장 인근의 요천을 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하천부지 사용건으로 어찌나 까다롭게 하던지 현 위치를 확보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요천을 넘어다 보며 문안을 읽을 수 있도록 머릿돌을 만들지 않았다.

 




7. 방아치 전투 주둔지 쪽뚤

쪽뜰

 


김개남 군의 정예부대가 남원을 떠난 뒤에 남은 1만여 명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운봉을 공격하기로 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백두대간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다. 이 진지를 구축하는데 적이 혼란을 겪게 하기 위하여 여원치와 방아재의 갈림길에 진지를 만들었는데 이곳이 바로 이백면 남평리 일대였다.

들이 넓고 평탄하면서 수확기를 완전히 끝낸 음력 11월이어서 많은 농민군이 마음 놓고 얼마든지 주둔할 수 있는 곳이다. 14일 새벽이 되기 전인 인시(3~4시)에 공격을 시작했으니 12~13일에는 집결을 완료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은 악전고투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남원에서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사기는 하늘을 뚫었을 것이다.

 





8. 가장 확실한 유적 깃대바위

사업회에서 쪽뚤 표석을 세우려 일을 진행하던 중 뜻밖의 정보를 입수했다. 농민군 주둔 때 쓰였다는 깃대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절명돼버린 것으로 알고 있던 남원지방의 동학과 농민혁명의 유물유적에 이런 것이 남아 있다는데 대한 탄성이었다.

깃대바위


이 깃대바위가 보존 될 수 있었던 것부터가 졸묘했다. 88고속도로가 4~5m만 내려와 만들어졌어도 이 깃대바위는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또 새로운 88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10~20m만 뒤로 밀려났어도 원형을 보존하기가 힘들게 되었을 것이다. 현 도로와 새 도로 사이에 옹색하게 끼어있는 것이 현재의 상태이지만 원 위치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 해도 지금은 감사할 뿐이다. 바위를 처음 보는 순간 ‘저건 고인돌인데?’하는생각을 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고인돌 위에 공적비를 만들어 세우는 세상에 고인돌에 깃대를 세우는 장치를 했대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여기는 고인돌이 만들어 질 수 없는 지형이다 싶었고 인근 주변을 아무리 확인해도 고인돌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천혜의 자연석이 하나 덩그렇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위로는 경사도가 가파라진 여원치 오름길이 있고 앞으로도 광활한 쪽뚤이 펼쳐져 있다. 승용차 크기의 바위였다. 위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둥그런 구멍이 뚫려 있는데 용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대한 기둥의 아래를 깎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로 파놓은 구멍임을 확인했고 크고 작은 기를 게양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두 개의 기가 어떤 기였을지를 지금으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다.

오래전부터 주민들은 이 바위의 내력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자리는 고속도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쪽뚤을 한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여기에 깃대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드높이고 승리를 다짐했을 농민군의 함성이 드리는 듯했다. 쪽뚤에 펼쳐진 수많은 농민군들의 천막들과 흰옷을 입은 열혈 젊은이들, 단계별로 지휘부의 목청을 전달했을 그 우렁찬 목소리에 화합하고 호응했을 함성들...

그러나 지금은 앞뒤로 가로막은 88고속도로에 막혀 소음의 공포에 질린 작은 곤충의 웅크림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88고속도로는 영·호남, 동·서 화합을 위해 전두환이 대통령 재임 때 만든 도로다.

 


 


9. 통한의 방아재


11월 13일(음) 밤까지도 승전을 의심치 않았을 농민군은 달리 밝았을 14일 새벽고기전의 달빛을 밟으며 운봉지방 공격을 감행하였다. 가파르기는 하지만 최근거리 공격 코스였다. 일시에 영남지방 공격의 교두보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기(知己)만 충천했지 지피(知彼)를 몰랐다. 영남지방의 관료 토호들은 농민군의 진출을 막기 위하여 운봉의 수장 박봉양에게 병력, 무기, 군수물자 등을 지원할 수 있는데까지 공급하고 있었다.

더구나 적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방어했고 농민군은 아래에서 위를 향하여 공격해야 했다. 게다가 결정적인 실수는 삼국시대 백제, 신라 분쟁시 방학산에 축조해 놓은 석성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박봉양의 민보군은 방아재의 소나무에 돌을 매달아 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 돌을 묶은 끈을 끊어 농민군을 패퇴시켰다하고 농민군은 이 바위 같은 돌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장태를 동원하고 부엌문을 뜯어다가 방패로 사용해 이후 부절리에는 나무 부엌문이 없어져 버렸다고 하나 이는 실상을 모르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방학산성은(합미성, 할미성, 장교리 산성이라고도 함) 산동면 방향의 북쪽 성벽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성이다. 언뜻 보면 지형이 하도 사나워 성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바로 그 아래는 방아재를 넘어가는 길이 있고 이 길이 농민군의 진군로이었을 것이다. 운봉 민보군은 돌을 나무에 매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있는 돌을 굴러 내리면 질풍노도가 되는 무기가 된 것이다. 이 전투는 15일 진시에 농민군이 퇴각함으로 막을 내리는데 꼬박 하루하고도 몇 시간을 더한 쉼 없는 전투였고 민보군의 희생자도 없지 않았으나 일방적으로 농민군이 치명타를 입은 패전이었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수 백인에서 수 천 명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농민군 측에서는 숫자를 줄이고 있고 관군 측에서는 불리고 있는데 황현 선생의 오하기문을 참고 한다면 아무리 적어도 1천 여명 이상은 희생되지 않았나 싶다. 사업회에서는 추정인원보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 지역의 지표조사를 하고 싶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10. 남원 농민군의 상징 류태홍의 묘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의 역사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는 것은 류태홍 선생과 최병헌 선생에 의해서다. 류태홍 선생은 농민혁명 당시 지휘부에서 활동하셨고 이후 굶주리 이리처럼 살벌하게 초토화를 시도했던 감시망을 피하여 연명하셨고 일제,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까지를 겪고 난 다음에 돌아가셨다.

이 과정에서 제자이며 신도였던 최병헌 선생에게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과정을 구술하여 「남원군 종리원사 부 남원동학사」를 쓰게 하시어 그 저작이 발굴됨에 의해서 남원은 동학과 농민혁명의 역사를 되찾게 되었다.

농민혁명 당시 20대 초반이었으나 방아치 전투에 지휘부로 참여하셨고 남원성전투시 패전한 농민군 500여 명을 이끌고 순천, 하동에서 활동 중인 김인배 장군을 찾아가려 했으나 도중에 김인배의 농민군도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군대를 해산한 다음 지리산으로 들어가 목숨을 연명하셨다.

그러나 일경에게 체포되어 첫 번째 옥고를 치렀고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천도교 남원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중 가장 먼저(3월 2일) 거사의 연락을 받고 의거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류석과 함께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암울한 일제시 요시찰 감시대상이 되어 힘겹게 살면서도 천도교를 지키며 남원의 신간회를 구축하시어 지하에서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남원건국준비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좌·우익의 갈등에 낙심하여 1달만에 사직하셨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항년 82세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 일생을 반봉건, 반외세와 독립운동에 이어 통일된 조국을 그토록 염원하였으나 전란 속에 영면하셔야 했던 근세 조선의 살아있는 역사였고 근대와 현대 역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전설 같은 주인공이시다.

 



11. 비극과 희망의 능선 백두대간

백두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남원지방으로 접어들면서 거대한 U자형으로 꺾이어 지리산에 이르게 된다. 이 U자형이 시작된 지점에서부터 백두대간은 남원지방을 관통하게 되는데 U자형 안은 운봉고원이며 그 밖은 남원평원이 펼쳐진다.

남원평원과 운봉고원을 가르는 백두대간은 해발 500m 이상의 능선으로 점철되는데 이 능선은 삼한시대의 가야와 마한, 삼국시대의 신라와 백제 국경이 되어 끊임없는 갈등의 능선이 되었다. 후기 신라에 이르러 이 국경의 갈등은 해소 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면서 다시 전운이 드리워진다.

남원평원의 김개남 농민군과 운봉고원의 박양봉 민보군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영남지방의 운명을 걸고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관군에 의해 전라좌도의 농민군 전투는 방아재의 농민군 패전과 우금치 전투의 농민군 패전 및 청주성의 김개남군까지 패전함으로써 장렬한 종식을 거두게 되지만 만약의 경우 농민군이 운봉고원을 확보하였고 우금치의 농민군과 청주성의 김개남군의 패장들이 운봉을 통하여 지리산으로 피신 했을 경우 농민군의 항전이 얼마정도는 지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한스러움이 남기도 하는 전투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이 이를 추측하게 해주기도 한다. 이 비극의 능선을 희망의 능선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것은 운봉고원과 남원평원이 그런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해도 전쟁이 끝나면 한 살이 되고 한 고장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휴전선이 그렇다. 60여 년을 허리가 잘린 분단 상태로 지속되고 있지만 통일이 된다면 한반도는 다시 한 살이 되어 한민족으로 대동단결하게 됨을 백두대간에서 배우게 된다.

이념과 권력의 갈등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설 수 없다. 한 핏줄, 한 민족을 이념과 권력으로 잘라 놓은 것은 잔인한 일이며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반드시 통일은 오게 될 것이며 그때는 국토와 민족을 분열시키고 피 흘리게 한 이념과 권력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백두대간 표석을 민보군 박봉양 공적비가 있는 운봉읍 서천리 당산에 세우려 했었다. 민보군과 농민군의 화해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서천리 당산의 서장승이 문화재라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우는 위의 이유로 충분히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여원치 정상에 세우게 되었다.

 




12. 버려졌던 박봉양 불망비

운봉 민보군을 이끌었던 박봉양의 공적을 치하하는 비는 두 곳에 있다. 운봉면 서천리의 당산에는 큰 규모의 공적비가 번암면 대론리에 작은 규모의 불망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비는 모두 버려져 있었다. 운봉의 것은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번암면의 것은 도로를 개조하면서 제대로 치우지 않은 채 풀숲이 된 도로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번암면에 있는 불망비는 표면이 곰보가 돼있다. 노인 등에 의하면 어렸을 때 다니면서 장난삼아 돌을 던져 맞추기를 해서 그렇게 되어다는데 어른들이 보고도 말리지 않고 웃으며 지나갔다고 한다. 빨래판이 되어 방망이에 맞고 장난삼은 돌세례에 얻어 맞고...

역사적 심판이 아니었을까?

수년 전에 사업회에서는 이 불망비를 발굴했으나 남원시의 지원을 받아 일을 하고 있는 사업회에서는 다른 군에 있는 유물에 힘을 보탤 수 없어서 미루다가 2010년에서야 이 불망비를 현재의 19번 국도변으로 옮겨 세우고 자그마한 표석을 자비 부담으로 세웠다. 인근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종중의 협조를 얻고 밀양박씨들의 선산에 옮겨 세울 수 있었다.

농민군의 적이었다 해도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이 지난 지금 적과 아군을 가릴 세월이 아니다. 그 보다는 피차간의 용서와 화해와 상생의 길로 가야하는 시점이 된지 오래이고 한 점의 유물유적이라도 소중한 이때 이를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어서 번암면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복원할 수 있었다.

 




13. 또 다른 과제들

수 년 동안 우리 사업회에서는 동학과 농민혁명 유적의 순례코스를 염두에 두고 일해 오면서 참으로 난감한 일들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문화재, 사적지이거나 그 인근이어서 이행할 수 없었던 것은 앞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도로부지 점용허가며, 하천부지 이용허가 등의 벽도 만만치 않은 장애였고 꼭 표석을 세우고 싶은 자리가 개인 소유 일때에는 매입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려움은 행정구역이다. 전라좌도 동학혁명을 지휘한 수장은 김개남 장군이었으나 이 김개남장군을 정읍에서 남원으로 초빙 해 온 사람은 당시 남원대접주 김홍기 선생이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거의가 남원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선생의 묘는 임실군 삼계면에 있다. 우리는 아직도 김홍기 선생의 묘나 입구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 농민혁명 당시에는 임실군 삼계면이 남원이었고 그래서 남원대접주였으나 행정구역이 바뀌어 버리고 우리 사업회는 명칭이 남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이고 남원시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장수군 번암면 박봉양의 불망비가 입증한다. 어떤 타개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유치(柳峙)도 그렇다. 여기는 장수군과 남원시의 경계지역이므로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고개를 농민군들이 넘나들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경남의 안의에까지 들어가 군량을 확보하려 했을 때 이 고개를 이용했을 확률이 높고 운봉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소규모의 전투들이 있었는데 이 때 유치에서의 전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입증할 자료가 없다. 좀 더 연구를 하고 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병헌 선생의 묘는 주천면 주천리에 있다. 선생은 남원군 종리원사와 남원동학사를 쓰셨지만 농민혁명과는 관계가 없는 분이어서 아쉽지만 열외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방아재 고갯마루에 표석을 세우고 싶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보류하고 있다. 돌라 하기가 어렵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농민군을 패퇴하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석전(石戰)이었고 이 돌은 방학산 성돌임에 틀림이 없다. 이 방학산성은 백두대간이어서 많은 백두대간 주자들이 지나는 길목이다. 여기에 표석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방아치 전투지의 지표조사다.

이 지표조사를 통하여 당시의 석전 실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석전에 이용된 돌들도 성돌인 것이 입증될 것이다. 또한 전투 후의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시 어떤 무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와 어떤 도구를 이용하여 방어했는지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본 사업회에서는 지표조사를 시도해 보려 했으나 경비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 계곡은 골이 깊고 접근성이 나빠 현장보존이 퍽 좋은 상태로 파악되고 있다.

또 하나 꼭 이루어야 할 사업은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을 함께 조명할 수 있는 조그마한 소공원 설치다. 가장 적합한 장소로는 교룡산 국민관광지로 은적암 입구이면서 교룡산성 입구인데다가 공지여서 뛰어난 상징성과 접근성을 갖춘 장소인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하루 빨리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협력하여 나머지 사업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본 사업회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해 왔던 남원동학과 농민혁명 순례벨트는 특히 시내권의 경우 남원 정신문화 순례코스와 거의 일치하여 남원을 선양하고 남원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거양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여서 정치․ 행정적 지원과 추진이 시급하다고 본다.

다행스러운 것은 만복사지를 제외하고는 중복이 없는 일선 상에 있으면서 구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어 순례벨트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외로 나간다 해도 일선상에서 1km를 벗어난 경우가 거의 없다. 번암면의 박봉양 불망비와 여원치, 그리고 운봉의 박봉양 공적비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원이면서 자산이다.

남원시정 관계자들이나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 관계자들이 하루 빨리 이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시어 남원과 농민혁명 기념사업에 기여하고 향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제공: 남원포유

 

출처 : 남원사이버홍보단
글쓴이 : 가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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