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ㆍ이억기에겐 꽤나 비판적인데 구사직은 후하게 점수를 줬다. 그런데 동갑에 동기인 충무공에 대해선 평가가 애매하다. 영웅적인 면을 평가하면서도 용모는 ‘웅혼한 기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썼다. 그렇다고 일부러 용모를 깎아내린 것 같진 않다. 그는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죽은 통제사가 산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쫓아냈다’고 극찬한다. 원문을 해석한 동양대 강구율 교수는 “객관적인 글”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록이 장군의 얼굴을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구국의 영웅’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공의 친구인 류성룡이 자신의 글 『징비록』에 남긴 “얼굴이 단아하여 수양 근신하는 선비 같다(容貌雅飭. 如修謹之士)”란 기록이다. 그런데 이는 선비를 묘사하는 상투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수준은 높다는 평가를 받고 큰 공을 세운 공신의 영정은 공식적으로 그렸음에도 장군 생전 초상이 없는 것은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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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에 그린 상감행실도에는 전사한 이순신이 배에 누워 있는 그림이 있는데 아쉽게도 인물화가 아니다. 19세기 것으로 몽골 장수를 닮은 충무공 모습의 그림(동아대 박물관 소장)이 있다. 『삼국지』의 장비를 닮은 일본 판화 그림(1854년)도 있다. 20세기 들어와 18, 25, 29, 33년 영정이 꾸준히 양상됐다. 이때까지 이순신은 전형적인 무골로 그려졌다. 전립을 쓰고 눈매가 날카롭고 얼굴이 길면서 각진 턱, 팔자수염 등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얼굴이 선비처럼 고와졌다. 복장도 무인의 전립 대신 사모관대 차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49년, 51년 등에 당대 최고의 인물화가 김은호가 사모관대나 갑옷차림의 영정을 그렸지만 여전히 얼굴은 고왔다.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장군의 영정은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2~53년 그렸다. 가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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