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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화풍에 대한 소고

강나루터 2016. 10. 15. 09:40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화풍에 대한 소고| 생각의 샘(칼럼)

박희영 | 조회 81 |추천 0 | 2007.12.29. 21:26


추사 김정희의 학문과 화풍 계보


추사 김정희의 화풍 계보


조선전기의 북송화풍

  조선 초기 회화는 북송의 곽희파 화풍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나름의 새로운 양식으로 개성있게 창조한 화가 안견에 의한 안견파 화풍이 주류를 이루면서 명대의 원체 화풍절파浙派 화풍의 유입과 이상좌에 의한 남송의 마하파馬夏派류화풍이 전개되었고 이장손과 서문보의 그림에서 보이는 미법산수화풍 米法山水畵風도 보인다.


  조선 시대의 회화 발달과 관련하여 맨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초기, 그 중에서도 세종 때를 중심으로 한 15세기가 된다. 이 시기에 이미 안견강희안을 비롯한 거장들이 배출되어 격조 높은 한국적 화풍을 성취하고, 후대의 회화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이 때에 형성된 한국 화풍의 전통은 초기의 성종 때를 거쳐, 명종 초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로도 중기 회화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이 다수 전승된 것 외에, 연경을 중심으로 한 명과의 회화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주요 학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먼저 북송의 이성과 곽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소위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이, 두 번째는 남송의 화원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을 위시한 원체화풍이, 세 번째는 명대의 원체 화풍이 전래되었으며, 네 번째는 절강성 출신인 대진을 중심으로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이, 다섯 번째는 북송의 미불, 미우인 부자에 의해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등에 의해 발전된 미법 산수화풍이 전래되었다.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철저히 소화하고 수용하여, 중국 회화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특색있는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몇 가지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산수의 형태는 더욱 다듬어지고 공간은 더욱 넓어지며, 필벽(筆癖)은 토속화되는 한국적 준법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6세기의 화가들은 이미 한국화된 15세기의 화풍에 집착하는 전통주의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종 때 이래의 조선 초기의 문화가 뿌리를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또한 조선 초기에는 금강산도, 삼각산도 등이 화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제작되어 실경산수의 전통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중기에서 후기시대의 남종화풍

  중국회화를 명대의 동기창막시룡 등이 당대 선종의 남북 분파에 따라 구분지은 데서 생긴 명칭이다.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높고, 학문이 깊은 선비가 수묵과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여 그린 간일하고 품격높은 그림을 말한다.  원말 이후로는 남종호가구도나 준법 필법 수지법 등에서 일정한 화법사의 형식화 되어졌으며 이것을 문인화가 뿐 아니라 직업화가들도 본받아 그렸었다.)


   본래 남종과 북종의 구분은 명말 동기창 등의 남북종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남종화왕유를 기조로 하여 형호, 관동, 이성, 범관, 미불부자, 목계, 옥간, 원사대가, 명대의 오파 이어지는 문인화계를 말하고, 북종화란 이사훈을 기조로 하여 곽희, 이당, 마원, 하규, 명대의 절파로 이어지는 채색공필화직업화가들의 그림을 말한다.


   이것이 중국에서는 계통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했지만은 조선사회에 전래되어 수용될 때에는 그 계통이 어느정도 무시화 되고 그 표면적인 외형의 표현들의 중신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조선초기에 남종화풍에 속하는 미법산수를 받아들인 이들은 서문보, 이장손, 최숙창 등 화원 중심이었고, 반면 당대의 문인이요, 지식인 강희안절개파를 따랐다. 또 한편 남종화풍과 절파풍을 함께 따른 심사정, 북종과 남종의 절충 화법을 구사한 이인문, 화원으로서 조선후기 남종화를 그린 김유성, 이재관, 등 그 내용은 자뭇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남종화풍의 수용과 유행은 큰 줄기로 볼 때에 조선 중기에 소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여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의 모태가 되었고, 말기에 더욱 형식화, 정형화되었으며 김정희에 의해 드디어 체계화 된 이론을 갖게 되었다. 특히, 겸재파의 진경산수화풍의 발전에 화법상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남종화풍의 중대한 의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18세기의 남종화가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능호관 이인상은 조선 후기 선비화가들 중, 가장 깔끔한 남종화풍을 이룩한 사람으로서 고아하며 문기가 높았던 시서화의 삼절이다. 그의 그림으로서 설송도, 송하관폭도 등이 있고 높은 화품은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강세황은 당대의 높은 식견의 감식안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적극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심사정, 이인상과 함께 18세기 화단의 남종화풍을 정착시켰다. 그의 기행사경인 송도기행첩은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았으며 중국전통 남종 문인화가를 소화하여 자신의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심사정정선의 제자로 알려졌으나 그의 그림은 중국화풍의 기초아래 발전한 것으로 대개 남종화풍을 따랐다.

자하신위, 윤재홍 등의 격조높은 이색적 화풍도 남종화에 속한다.



   다음으로는 19세기의 남종화풍이다.

이때에는 김정희라는 걸출한 인물의 영향으로 18세기의 서민예술이 완전히 쇠퇴하고, 남종화 일색이 되어버렸는데, 김정희는 전형적인 남종문인화의 경지를 개척하여 화단의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실학과 금석학의 업적이 높은 지식인이요, 문기와 서권기가 가득했으니 묵란도, 새한도 등을 남겼고 그를 따르는 소위 김정희파를 낳았다.

김정희파에는 조희룡, 허유, 전기 등이 있었다.


   한편, 18세기 윤재홍에서 시작한 간담하고 맑고 깨끗한 수채화적 묵법의 이색화풍이 이어졌으니, 이 역시 남종화풍에 속한다. 김수철, 홍새석, 조규정 등이 이에 속한다.

   이와같이 조선시대의 남종화는 한때 조선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되, 갈수록 외형적 양식에만 치중할 뿐 이론적인 체계화된 화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형식화, 타락의 길을 걸었으며 오히려 화단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사대주의적 복고풍을 조장하여 18세기의 진경산수, 풍속화, 민화 등 서민예술 쇠퇴를 불러왔다. 이것은 한국 회화의 근대화에 있어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는 것이다.


◈ 조선의 화풍 계보도

안견(북종화) 

  정선(남종화) -심사정

        김홍도(도화서파) - 김득신  신윤복 - 백은배. 유숙 유운홍 - 장승업

        김정희(김정희파) -


◉ 변상벽<본관 밀양. 자 완보(完甫). 호 화재(和齋). 숙종 때 화원(畵員)을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다.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해서 변고양이[卞猫]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영모(翎毛) ·초상화에도 뛰어나 국수(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작품에는 《추자도(雛子圖)》 《묘작도(猫雀圖)》 《춘일포충도(春日哺蟲圖)》 《군학도(群鶴圖)》 《계자도(鷄子圖)》 등이 있다.



◉김수철<본관 김해(金海). 자 사앙(士盎). 호 북산(北山). 산수(山水)·화훼(花卉)를 잘 그렸으며, 필치는 거칠고 간략하나 점과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담채(淡彩)를 써서 특이한 화풍을 보였다.

작품으로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산사만종도(山寺晩鐘圖)》 《강산매림도(江山梅林圖)》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 등이 있다.


◉허유(허련)<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노치(老癡).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생. 후에 연(鍊)으로 개명하였다.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그림·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茆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고람(古藍)전기(田琦) <본관 개성(開城). 자 위공(瑋公)·기옥(奇玉). 호 고람(古藍)·두당(杜堂). 초명 재룡(在龍).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추사파 중에서도 가장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의 경지를 잘 이해하고 구사한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서와 시문에도 뛰어났고 그림은 송·원나라 때의 남종파(南宗派) 화풍을 계승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산수화는 거의 고요하고 쓸쓸하면서도 정답고 담백하다.

작품으로 《연도(連圖)》 《수하독작도(樹下獨酌圖)》 《자문월색도(紫門月色圖)》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추산심처도(秋山深處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기향하처도(騎向何處圖)》 등이 있다.>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본관 평양(平壤). 자 치운(致雲). 호 호산(壺山)·우봉(又峯)·철적(鐵笛)·매수(梅叟). 경기도(현재 서울) 출생.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생. 1813년(순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1844년(헌종 10) 박태성(朴泰星) 등 41명의 전기를 수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를 편찬했다. 시문에 뛰어나고, 서화에도 능해 글씨는 추사체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그렸다.

그림으로 《동파립극도(東坡笠屐圖)》 《홍매도(紅梅圖)》《강안박주도(江岸泊舟圖)》 《수묵산수도(水墨山水圖)》 등이 있다. >


◉이후의 제자 - 허형, 허건, 허백련


추사 김정희의 학문 계보

◉ 성리학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 퇴계 이황 - 야당의 정치 이론 =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중종·명종기 척신·외척정치하에서 평생 정계를 주도한 적 없는 재야 세력·야당 - 당시 정국을 부정적으로 인식

○기(氣)보다 이(理)를 우선하는 그의 이기이원론, 이가 기를 지배해야 한다는 주리론(主理論)은 이런 시대 상황속에서 형성. 그의 눈에는 훈신과 척신들이 지배하는 정치 상황은 열등하고 부도덕한 기(氣)가 고귀하고 도덕적인 이(理)를 억압하는 잘못된 현실이었다. 훈신과 척신은 열등하고 부패한 존재인 칠정(七情)이자 기(氣)였던 반면, 사림은 고귀한 존재인 사단(四端)이자 이(理)였던 것이다. 현실 세상은 기(氣)였고 이상 세상은 이(理)였다.

그는 사단이 칠정을 지배해야 한다고 딤은 것처럼 사림이 훈신과 척신을 몰아내고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理)가 기(氣)를 이끌어야 하는 것처럼 사대부인 사림들이 일반 농민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고귀한 도덕이자 이상이 천박한 욕망과 현실에 지배당하는 세상은 그에게 극복 대상이었다. 이황의 주리론은 이런 세계관, 이상론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황은 재야의 입장, 야당의 입장에서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해석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신하가 되어 공물을 바쳐야 했던 남송의 비참한 정세 속에서 나온 것이 중국 민족의 중세적 세계관인 성리학이었듯이, 부패한 훈구파에게 고결한 사림들이 억압받는 조선의 정치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 이황의 이기이원론이었던 것이었다. 여진족의 억압과 훈구파의 억압이라는, 기가 이를 억압하는, 본질에서 유사한 정치 상황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남송의 주희와 조선의 이황을 같은 이기이원론으로 이끈 것이다.


율곡 이이 - 여당의 정치 이론 =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이는 주리론적 이기이원론이 아니라 주기론적 이기일원론을 완성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차이는 두 사람의 세상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기보다는 두 삶이 처한 현실의 차이였다. 이이의 주기론적 이기일원론은 주희의 성리학을 조선화시킨 것으로서 이황의 사상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는 성리학에 대한 조선 사림의 오랜 이해 과정이 완결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한국 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이황과 이이가 각각 주리론과 주기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양자는 모두 이가 기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이이보다 35년 연상이었던 이황이 처한 정치 상황과 이이가 처한 정치 상황의 차이가 두 사람 사상의 부분적 차이점을 가져오게 한 원인일 뿐이다. 이황이 사람이 탄압받는 시대의 정치가라면 이이는 사림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의 정치가였다. 이황이 재야나 야당의 입장에서 현실 정치를 바라보았다면, 이이는 집권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본 것이었다. 이황의 주리론이 현실 비판을 중요시한 데 비해 이이의 주기론이 현실에 대한 구체적 개혁 방안을 중요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림파가 집권한 상황에서 이이는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황의 주기론적 이기이원론은 그에게 극복 대상이었고, 그는 연구를 거듭해 이를 극복한 주기론적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것이다. 이런 이이의 태도가 동인들에게는 불만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학문 계보도


사림 동인 -김효언 유성룡 이산해 이발 우성전 최영경 (조식,이황계열의 영남학파)

               북인 - 이산해 정인홍 (조식계열)

                       대북

                          골북 - 이산해

                          육북 - 홍여순 이이첨

                          중북 -

                        소북

                          청소북 - 남이공(남당)

                          탁소북 - 유영경(유당)

                 남인 - 우성전 유성룡 이양원 이원익 정경세 이준 이성구 이광정 한준겸  이덕형 김성일 (이황계열)

                      

         서인 - 심의겸 박순 윤두수 (이이,성혼계열 기호학파)

                 노론 - 송시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제

                      호파 - 충청노론(개화사상으로 발전)

                      낙파 - 서울노론 (북학파 실학 애국개몽사상으로 발전)

                          박지원 - 박제가 - 김정희-


선배 및 동년배; 자하(紫霞)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權敦仁)·조면호(趙冕鎬)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

손아래 제자


신헌(申櫶)<본관 평산(平山). 자 국빈(國賓). 호 위당(威堂). 초명 관호(觀浩). 시호 장숙(壯肅). 금위영대장(禁衛營大將)으로 1849년(철종 즉위) 헌종(憲宗)이 위독하였을 때 사사로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는 죄로 섬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54년(철종 5) 무주(茂朱)로 이배(移配)되었으며, 1857년 풀려났다. 그 후 1862년 통제사(統制使), 1864년(고종 1) 형조 ·병조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江華)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후 좌참찬(左參贊) 겸 훈련대장을 지냈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68년 어영대장(御營大將) ·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874년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강화 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일어나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서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각각 체결하고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다.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문장에도 뛰어나고 묵란(墨蘭)을 잘했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33인의 한 사람인 세창(世昌)의 아버지이다. 중인(中人)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淸)나라에 왕래, 신학문에 눈을 떠서 《해국도지(海國圖誌)》 《영환지략(瀛環誌略)》 등 서적을 들여와 친구인 유홍기(劉鴻基)에게 읽게 하고,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하여 개화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1869년 통정대부, 1873년 가선대부, 1875년 자헌(資憲)대부가 되고 이듬해 한학당상역관(漢學堂上譯官)으로 좌의정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나라의 문호개방을 주장, 병자수호조약(丙子條好條約: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877년 숭정(崇政) 대부를 거쳐 숭록(崇祿) 대부가 되었다. 수호조약 체결 이후에는 흥선대원군의 위협을 받았다.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이 많아 중국의 것을 수집하였고 글씨는 전자(篆字)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편서(編書)에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 있다.>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본관 용담(龍潭). 자 정보(正甫). 호 구눌(口訥) ·눌인(訥人). 평양(平壤) 출생.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우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특히 고법을 임모(臨模)하는 데 특출하였고 행초(行草)는 유석암(劉石菴)과 같았으며 예서(隸書)는 장수옥(張水屋)을 닮았다. 쾌재정(快哉亭) 편액(扁額)의 글씨가 그의 예서였는데 중국 사신이 보고 크게 놀라 한 번 만나보기를 청하니 죽었다고 하자 섭섭히 여겨 100본을 찍어 갔다. 당시의 명필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눌인서첩(訥人書帖)》이 있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본관 우봉(牛峯). 자 혜길(惠吉), 호 우선(藕船). 역관(譯官)을 지낸 집안의 서얼(庶孽) 출신. 벼슬은 온양군수(溫陽郡守)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2차례에 걸쳐역관으로 중국을 왕래, 오숭량(吳崇梁) 등 중국 문인들과 교우를 맺고 중국에서 시문집까지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며 특히 현종도 애송했으므로 그의 문집을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고 이름했다.

그 밖에도 고완[古玩]·묵적(墨滴)·금석(金石)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현종 때 교정역관(校正譯官)이 되어 《통문관지(通文館志)》 《동문휘고(同文彙考)》 《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속간했다.>


소당 김석준<조선 후기의 문신·서도가(書道家). 본관 선산(善山). 자 희보(姬保). 호 소당(小棠)·묵지도인(墨指道人). 북조풍(北朝風)의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지두서(指頭書)에 뛰났고,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이르렀다.>


                 소론 - 윤증 한태동 유봉휘 이광좌 조태구 최석항

                      준소

                      완소

                      청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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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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