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스크랩] 같은 詩(시), 다른 글씨

강나루터 2017. 1. 7. 06:59

  同 詩 異 書 

같은 詩(시), 다른 글씨

 

 

  登 鸛 雀 樓 

鸛雀樓(관작루)에 오르다

[王 之 煥(왕지환)]

 

 

 

 

              저녁 해는 산 넘어 사라져 버리고

              黃河(황하)는 아득한 바다로 흘러드는구나

              내 눈이 보이는 끝까지 千里(천리)를 보자 하면

              다시금 다락 한 층을 올라야겠네

 

 

 ※ 王之煥[왕지환 : 688~742]

     唐(당)나라 때의 詩人(시인)으로 흉금이 넓고 포부가 매우 컸

     다고 전하며, 학식과 재능이 출중했지만, 벼슬 길은 순탄치 않

     았다. 한때 모함을 받아 울분을 못 참고 벼슬을 내던져 버리고

     15년간 숨어 지냈다. 뛰어난 시를 썼으나, 『全唐詩(전당시)』

     에 겨우 6편만 수록되어 지금에 이른다.

 

 ※ 鸛雀樓 : 중국 蒲州[포주 :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 성마루에 있

     는 삼층 누각으로, 鸛雀(관작) 새가 깃들어 붙인 이름이다. 황

     하 기슭에 자리잡아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 黃河入海流 : 본래 "黃河流入海"로 해야 문법에 맞다.

     지은이는 이를 어기고 "黃河入海流"로 한 것은 운율을 맞춰야

     하는 것과 황하의 세찬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流"자를

     뒤로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曹 全 碑[조전비 : 185년] 

 

매우 아름다운 이 비석은 "禮器碑(예기비)"와 함께 漢碑(한비)의 雙璧(쌍벽)이다. 어떤 멋 모르는 書家(서가)들은 너무 여성적이라 붓끝의 기교가 두드러진다 하여 낮추어 씨부리는 "머저리"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같은 지저귐이다.

이 때에 이르러 漢(한)나라도 말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정통적인 隸書(예서)도 점차 사라져 가는 경향이었다.

그럼에도 이렇듯 우아한 波勢(파세)를 구사한 大家(대가), 名筆(명필)은

"神秘(신비)"스럽기조차 하다.

"禮器碑(예기비)"와 더불어 "漢碑(한비)"의 한 떨기 꽃이라 할 수 있다.

 

 

 

 

 

 

 

  趙 之 謙[조지겸 : 1829~1884] 

 

이 書家(서가)를 중국에서는 "천재"로 떠받든다.

楷書(해서)와 行草(행초)를 다 잘 썼고, 篆書(전서)와 隸書(예서), 篆刻(전각)도 볼 만한 것이 제법 있다.

이 書家(서가)는 맨 처음 顔眞卿(안진경)을 배웠는데, "龍門造像(용문조상)"을 本(본)으로 하였다. 用筆法(용필법)은 包世臣(포세신)의 "逆入平出(역입평출)"을 충실히 따랐으며, 行草書(행초서)도 이 用筆(용필)을 따랐다. 篆書(전서)는 鄧石如(등석여)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멍청한 우리나라 書家(서가)들 중에는 이 사람의 글씨를 익히려 하는 이들이 많은데, 공부 좀 제대로 하라고 일러 주고 싶다.

중국인들이 왜 이 사람 글씨를 특히 더 떠받드는 것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趙之謙(조지겸)의 글씨를 살펴보면 秋史(추사)를 본뜬 것이 대부분이며, 이 사람 역시 우리나라의 秋史(추사)를 상당히 추앙한 사람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아사다 마오"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우리 "김연아"의 우아한 天上(천상)의 솜씨를 죽어도 못 따라오듯이.

이러한 사실을 간파한 중국인들은 이 사람의 글씨를 우리 秋史(추사)보다 웃길에 놓기 위해 갖은 찬사를 다 퍼붓다시피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고 엉터리 運筆(운필)을 하며 아까운 먹과 종이만 내버리는 것들이,

"趙之謙(조지겸), 趙之謙(조지겸)……!"

하는 것이다.

 

學古房이 보기에는 솔직히 趙之謙(조지겸)은 秋史(추사) 발 밑으로 들어와 꿇어앉아 먹[墨]이나 갈면 딱 알맞은 인물인 것이다.

 

 

 

 

 

 

 

  孫 過 庭[손과정 : ?~?] 

 

唐(당)나라 초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虔禮(건례)"라고도 불린다. 측천무후 시대 사람으로 書(서)와 문장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아깝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이 사람의 글씨는 "王羲之(왕희지) 父子(부자)"의 筆法(필법)의 正脈(정맥)을 매우 잘 계승하였다. 書家(서가)라면 한 번 쯤 매료되었을 『書譜(서보)』글씨는 그야말로 寶物(보물)이다.

그러나 이 『書譜(서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힘[力]" 안배를 매우 조심히 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모양새만 따라 하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묘한 마력이 숨어 있는 글씨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배운 스승을 만나면 근심거리가 되지 않지만, 세상이 어디 그러한가! 엉터리 사이비들이 스스로,

"내가 大家(대가)요……!"

하며 사기 치는 세상인 것을.

集字(집자)를 한 글씨임에도 그 氣脈(기맥)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이 學古房은 10여 세를 갓 넘겼을 무렵, 이 글씨에 매료되어 한참을 헤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王 鐸[왕탁 : 1592~1652] 

 

이 書家(서가)는 明末淸初(명말 청초)에 걸쳐 가장 걸출하고 뛰어난 大家(대가)이다. 董其昌(동기창)보다 조금 뒤의 인물이지만, "連綿草(연면초) 작가"의 두목 격이라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이 사람의 글씨를 가만히 살펴보면 매우 기괴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울퉁불퉁한 점, 획은 소위 "정통파"의 안목으로 보면 아마도 무슨 "怪物(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書聖(서성)"으로까지 추앙 받고 있는 "王羲之(왕희지)"라는 페닉스는 이 王鐸(왕탁)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찬 불길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비록 그 형식은 좀 다르다 하나, 王鐸(왕탁)을 감동시켜 붓을 휘두르게 한 인물은 오직 "王羲之(왕희지)"만이 있을 뿐이다.

 

 

 

 

 

 

 

 

 

출처 : 서정한문서예교실
글쓴이 : 서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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