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운봉읍 풍수설화

강나루터 2011. 5. 8. 20:22

<운봉읍 주민썬터 누리집>에 실려있는 운봉읍의 풍수설화는 다음과 같다.

 

1. 유평마을 벗들

이 마을은 함양박씨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처음 마을의 이름은 낙안리(洛雁里)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외지에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 둘 씩 떠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고향을 망각하고 영영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을 선비들은 이것을 고민 끝에 마을 명칭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고 하여 명칭을 '벗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를 한문으로 하면 유평(柳平)이다. 이유인즉 버들은 번식력이 강하고 적응성이 다양하여 물가에나 들, 노변 할 것 없이 어디에나 심으면 가장 잘사는 식물 중의 하나였다. 그 이후로 떠나는 사람들이 줄어 들었다고 한다.

 

2. 용산마을

이 마을의 동쪽에는 해발 1,150m의 덕두산이 있고, 남쪽에는 바래봉과 함께 지리산 줄기의 일부분이 산의 험준함을 비기어 산내면 구역이 되고 이 산을 분수령으로 서쪽에는 계곡물이 흘러 모두 동천으로 흐른다. 그런데 덕두산 중턱의 '용마름산'은 산이 내려가듯 움직였으나 어느 도사가 칼로 산줄기를 잘라 그곳에 석축을 쌓아 산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사실 이것은 산을 자른 것이 아니라 풍수설에 의하면 용(龍)의 목을 자른 것이다. 그래서 용이 멈춰서 산을 이룬 곳이라 하여 용산(龍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3. 장동마을 노루젖재 꿀바위

예전 운봉 여원재에는 주막이 성업을 이루었다. 그 곳은 운봉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남원 시장으로 나뭇짐이나 겨우내 짜놓았던 베옷 등을 팔러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별을 보면서 집을 나선 사람들은 이 여원재 주막에서 아침 요기를 하고 반나절이 걸리는 남원 시장길을 떠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침 요기마저 걸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방고개에서 진수러기를 지나 노루젖재로 통하는 지름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노루젖재라 부르는 이유는 운봉에서 남원이 바라보이는 장교리의 낮은 고개를 넘으면 작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두 개의 도랑 합류점에 불룩한 봉분이 있고 그위에 누군가의 묘를 써서 그 형국이 마치 노루의 젖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하루는 꿀장수가 이른 새벽길을 타고 노루젖재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머리에 이고가던 사기 꿀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꿀통은 발밑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바위는 꿀을 뒤집어 쓰는 꼴이 되었다. 그후 지나다니던 나뭇꾼들이 바위의 꿀을 핥아먹곤 하였다 해서 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는 벌떼가 꿀을 보고 날아들었다하여 벌바위라고도 하고 기름장수가 기름통을 깨뜨렸다해서 기름바위라고도 부른다.

 

4. 행정마을 도깨비 혈

운봉 행정리 마을 앞 도로 건너에는 창녕 조씨 효자 정문이 있다. 효자비가 세워진 시기는 비문이 오랜 풍우에 마모되어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다. 1922년에 발간한 운성지(雲城誌) 기록에 의하면 효자 조석상(曺錫祥)은 창녕 사람으로 본도 선비의 추천을 받아 윤허를 얻어 정려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어 건립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5대 손 조윤근(58세)씨에 의하면 5대 조 조석상씨의 모친 동복 오씨가 고질병에 걸리자 본인의 허벅지 살을 베어 인육봉양으로 병을 낫게 하여 효자 교지를 받았다 한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비만 서 있는 이곳에 창녕 조씨 가문에서는 풍우로 인한 비문의 마모를 막기 위해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부락에 재난이 일기 시작하였다. 원인 모를 이유로 친족들이 연이어 비명횡사하고, 부락에 잇단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8채가 불타는가 하면, 밥을 지으려 마루에 내어놓은 쌀바가지에서 쌀이 벌레처럼 기어나가고, 병든 아이의 병이 낫기를 빌던 떡시루가 날라가 처마밑에 붙었다 떨어지고, 저녁밥을 푸기 위해 솥뚜껑을 열려고 하자 솥뚜껑이 밑으로 빠져 밥을 푸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자 동네 사람들은 비각을 뜯어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영험있는 무당을 통해 원인을 알고 보니 그 비석을 세운 자리가 도깨비 혈인지라 집을 지으면 도깨비들을 노하게 하여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행정 마을은 도로를 경계로 비석이 서 있는 도로 동쪽에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5. 연동마을 말 무덤이 있는 장승백이

나찰귀(羅刹鬼)란 몸이 검고 눈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악한 귀신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어느 고을에나 중요 지점에 나찰귀탈의 화상을 새긴 키가 9척 이상인 목신(木神)을 세웠는데 이른바 장승이다. 운봉 소재지에서 여원치 쪽으로 5리 되는 국도 옆 장교리 연동 입구 부근을 '장승백이'라 부르는데 남원에서 여원치를 넘어 운봉을 지날 경우 장승이 서 있는 이곳을 지나게 된다. 장승백이 뒤편을 '갈마지기'라 부르는데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갈마음수혈'이란 명당이 있다고 하나 실은 길 떠나는 우마차나 길손이 이용하던 말들의 목을 축이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지금도 말에게 물을 먹이던 맑은 샘이 있고 간혹 죽은 말을 묻는 말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딴집이 있는 그곳을 '몰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운봉에는 목장승은 존재하지 않으나 석장승은 8기(남원관내 총18기)가 있다. 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된 서천리 석장승 2기와 권포리 4기, 북천리 2기가 그것이다.

 

6. 연동마을과 노승

과거 인월역을 출발한 역마가 운봉을 지나 연재에 당도하기 전 연동 앞 장승백이를 지날 때면 으레 인마(人馬)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맑은 샘물에 목을 축이고 쉬어가던 곳이 바로 지금의 갈마지기다. 그래서 이곳을 말무덤, 몰모둠(말을 모아두던 곳 또는 말 매던 곳)이라 부른다. 조선 초기,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 홍정승 행렬이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일행이 잠시 쉬고 있는 사이 홍정승이 타던 말이 보이지 않았다. 역졸들이 황급히 찾아 사면팔방을 두루 헤매다가 겨우 말의 행적을 찾아보니 말은 약 1km 떨어진 지금의 연동 마을터에 누워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상서로운 일이라 여기고 이 터가 명당터라 여겨 홍대감이라 일컫는 홍씨 일가가 말이 누운 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서 연동리 입향조가 되었다. 그 전에도 마을 주변이 모두 명당터인지라 권세있는 집안에서 쓴 묘가 많아 산에 막을 치고 3년 상을 치르는 시묘살이가 끊이지 않아 연동의 옛이름이 바로 '산막'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연동 한가운데는 커다란 연꽃 방죽이 있어 마을 이름을 연동(蓮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전국의 사찰과 스님들은 수난을 치르게 되었다. 어느날 연동리에 찾아든 스님 한분을 괘씸하게 여긴 홍대감은 스님을 잡아다 대테를 틀게 하였다. 대테란 옛날 대나무를 쪼개어 나무그릇이나 오지그릇을 매는데 쓰던 것으로 대나무 대신 넓은 보자기에 콩을 길게 말아 스님의 머리를 꽁꽁 동여맨 뒤 보자기 속의 콩에 물을 부어 콩이 점점 불어나면서 머리를 조여 고통을 주는 일종의 고문인 것이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스님은 홍대감에게 대면을 청하여 말하기를 자신을 풀어주면 이 마을에 대대손손 복을 누리는 처방을 알려주겠다고 제의를 하였다. 방법인즉 연동리 앞을 가리고 있는 작은 야산과 대감집 뒷산을 트면 온갖 명예와 재복(財福)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 홍대감은 이를 믿고 노승을 풀어준 뒤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스님의 말대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홍씨 일가를 망하게 하는 노승의 분노였다. 홍씨 일가는 날로 기울어지는 가문을 바로 세우고자 다시 마을 앞에 독뫼(동산)를 세우고 집 뒷산을 원래 모양으로 메우고자 흙 한 짐에 한 냥씩하는 일꾼을 사서 액운을 막고자 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결국 홍씨는 연동 마을을 뜨고 말았다. 지금도 마을 뒤 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홍씨들이 많은 돈을 들여 메운 곳이라 하여 돈구뎅이라 부르고 있다.

 

7. 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형국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8. 공안마을과 와우혈

풍수지리에 의하면 공안리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다. 즉, 소가 누워 쉬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세걸산 '투구봉'에서 멍에를 지고 '쇠등어리'를 타고 내려오던 소가 '사구실'에서 소죽을 먹고, '코뚜레논'에서 코뚜레를 벗고, '원앙봉'에서 쇠풍경을 뗀 다음 유평과 가장리 사이의 '와우명당'에서 누워 쉰다는 말이 전해와 이곳 마을 사람들은 성실히 노력하면 고진감래의 결실을 얻는다고 한다.

 

9. 서하마을 봉낙골집 며느리

때는 그 지독한 기묘년(1939) 흉년, 일제의 피맺힌 수탈과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를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배를 주리며 보릿고개를 간신히 지탱하고 여름 한낮 땡볕에 땀흘려 겨우 지은 농사는 가을걷이를 끝내기가 무섭게 공출로 모두 빼앗기고 사람들은 이제 짓던 농사도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 해마다 피와 잡초만 무성한 논밭이 늘어 가니 당연히 요구하는 공출량은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운봉 주재소에서 파견한 일본 순사는 근동에 사는 면서기를 대동하고 부족한 공출을 메꾸기 위해 숨겨둔 곡식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독에 벼를 넣어 몰래 뒤안 땅 속에 묻어 둔 비상 식량을 쇠꼬챙이로 쑤셔 파내가거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무고한 동네 사람을 다짜고짜 잡아다 매질을 하여 숨겨 놓은 잡곡을 토해내게 하는 등 당시 일제의 모진 수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하루 하루를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한숨만 짓던 주민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톱과 낫을 들고 산으로 올라 아름들이 소나무를 마구 베어 넘기고 소나무 껍질의 속살을 벗겨내어 식량을 대신하였다. 소나무 껍질도 큰 소나무 껍질이 덜 질겼다. 이렇게 산에서 벗겨온 소나무 속살을 솥에 삶아 빨래 방망이로 몇차례 두들겨 떫은 물을 울거내어 바싹 말린 다음 돌절구에 찧어 얼게미(체)에 쳐서 만든 생키가루로 조금씩 죽을 쑤어먹고 덜 빻아져 체에 남은 것은 다시 물에 불겨 방망이로 더 두들긴 다음 다른 잡곡과 함께 국을 끓여먹곤 하였다. 또한 험한 지리산 앞산에 주린 배를 끌어안고 종일 주워모은 도토리를 햇볕에 말려 디딜방아에 찧어 쑥과 함께 시루에 쪄 먹거나 무우에 섞어 밥을 해먹곤 하였다. 그러니 자연 사람들은 부황이 들어 얼굴은 붓고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봄철 보리마져 흉년이 들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 수였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운봉읍 장교리 진씨 집안에 계모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는 복실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친모는 복실이와 아들 둘을 낳았으나 막내를 낳고 나서 산후 조리가 부실하더니 시름시름 앓기를 몇 해, 복실이가 10살 되던 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맏딸인 복실이는 슬픔은 컷으나 천성이 착하여 홀아버지와 어린 동생 둘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엄동한설에 냇가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는가 하면 남의 집 일을 돕고 밥을 얻어 두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에도 불행은 겹쳐 어느날 첫째 동생은 산에 칡뿌리를 캐러 갔다가 친구 아이가 잘못 휘두른 괭이자루에 뒷퉁수를 맞아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상처에 약 한번 써 볼 형편이 아니었다. 덧난 상처로 시름 시름 앓던 동생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둘째는 장마철 운봉국민학교에서 돌아오는 도중 선두숲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 밥 굶기를 밥 먹듯하여 야윈 몸에 빈혈과 함께 그만 불어난 물쌀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뒤 아버지는 새 엄마를 얻어 아들 둘을 낳았다. 식구가 둘이 늘었다. 계모는 14살 복실이를 권포리 봉낙골 산지기 박씨집으로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말이 좋아 시집이지 친정에서는 어려운 살림에 밥 한그릇이라도 줄여보자는 심산이고, 시집에서는 힘든 살림 일손이나 늘려보자는 심산이 궁핍한 시절의 일반적인 사정이었을 것이다. 복실이는 시집에서 시부모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시댁도 다른 여느 가난한 집처럼 살기가 힘이 들었다. 집에 있을 때보다 굶주림은 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처녀 때보다 할일은 더 고되고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는 서툴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복실이는 야위어가더니 어느날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한끼 먹기도 어려운 때에 그나마 몸져누워 남편과 시부모에게 여간 죄송한 게 아니었다. 죄송하다기보단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댁도 어려운 처지는 마찬가지였으니 약 한첩 쓸 수 없어 병은 더욱 깊어가기만 하였다. 그런 어려운 중에도 남편은 복실이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남편은 복실이가 모져 눕자 지친 자신의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혼신을 다해 병간호를 하였다. 없는 살림에 시댁 식구 모두가 병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다 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복실이가 병으로 눕자 시댁의 살림은 더욱 쪼달리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시름에 잠긴 복실이는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친정이 그리워지고 아버지가 보고싶어 눈물만 흘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시댁 식구 모두가 집을 비웠다. 시부모는 같은 마을 노인이 상을 당하여 그 집에 가고, 남편은 둿산에 놓아둔 토끼덫을 살피러 간 것이다. 복실이는 결심을 하고 아픈 몸을 겨우 가눈 채 장교리 친정집으로 향했다. 더이상 시집에 짐이 되기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처지가 덜 부담스런 친정집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겨울의 살을 에이는 추위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치고 한나절이 다 지나 가까스로 장교리 친정 집에 당도하였다.

 

병이 들어 집에 돌아온 복실이를 계모인들 달가울 리가 없었다. 계모는 출가외인이라는 명분으로 시댁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하였다. 채 하루도 쉬지 못한 복실이는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시름에 잠겨 시댁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눈 속을 헤치고 가까스로 독골재 새방죽까지 당도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개 마루에서 산속 외딴집 시댁의 희미한 호롱불빛이 멀리서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복실이는 죄스런 마음에 시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던 길은 깜깜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하루종일 굶어 지친 복실이는 시댁 불빛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신부의 영혼을 달래기나 하듯이 하얀 눈이 밤새 내렸다. 복실이의 주검은 며칠 뒤 아랫마을 나뭇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땅히 묘를 쓸만한 자리가 있을 리 없는 시댁에서는 어린 복실이가 죽은 그 자리에 흙을 파고 묻었다. 그 후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이 복실이의 깊은 마음을 애도하여 무덤 옆에 던진 돌이 쌓여 성황단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홀아비 박씨는 몇년을 홀로 살았다. 박씨는 슬픔이 너무 커서 새장가를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박씨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나타난 복실이는 박씨에게 말하였다.'서방님 제 할일을 못하고 먼저 간 저를 용서하세요. 후일 저승에서나마 서방님을 다시 만나 지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신 이승에서 새 배필을 만나게 해드리겠으니 따르도록 하세요.'

 

권포 마을에는 산동면 달매(월산리)에서 시집 온 강씨 며느리가 있었다. 그 며느리는 남편의 잦은 바람끼 때문에 산동면 달매로 자주 친정 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친정을 갈 때는 봉낙골을 지나야 되었다. 어느 봄날 오후 마루에 앉아 잠시 쉬던 박씨 모친은 설음에 겨워 친정집으로 가는 강씨 며느리를 보았다. 소문을 들어 그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박씨 모친은 그날 따라 강씨 며느리와 세상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집 앞에서 강씨 며느리가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박씨 모친은 잠시 쉬어가기를 권했다. 바쁠 것도 없는 강씨 며느리는 박씨 모친이 이끄는 대로 방안에 들어가 한탄하듯 늘어놓는 강씨 며느리의 세상 푸념을 들었다. 어느덧 저녁해는 서산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나무하러 간 아들 박씨가 돌아왔다. 한숨을 쉬며 그만 가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강씨 며느리를 박씨 모친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한사코 말렸다. 그날밤 박씨 모친은 아들 박씨와 강씨며느리를 한방에 밀어넣어 문을 잠가 며느리로 삼았다. 그 뒤 박씨 부부는 금슬이 좋아 몇 년 동안 살림을 불리더니 전주로 이사하여 부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제 할일을 다하지 못하고 성황단에서 굶어 죽은 복실이가 시댁에 못다 한 복을 저승에서나마 베풀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봉낙골 고개 위 성황단 묘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10. 가산마을 개구리 혈

500여년 전, 성종 10년(1479) 곡부(曲阜) 공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가산 마을은 50여 가구의 비교적 아담한 마을이다. 현재 입향조인 공씨들은 떠나고, 광해군 11년(1619) 서산 유씨와 경주 이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주하여 살고 있다. 가산리 북쪽 번암면 사치(모래재) 부락만 해도 과거 백제의 영토여서 신라 영토인 가산리와는 국경을 마주하는 분쟁지역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가산산성을 쌓아 국경을 감시하며 경비와 방어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좋은 터인지라 지금껏 많은 전란 중에도 큰 재앙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이 절터라고 부르는 용암사우터가 용바우골에 있고 성 남쪽 아래에 태종 10년(1410) 운봉에 최초로 세워졌던 향교터가 있으며, 운봉 10경 중의 하나인 병암망월의 풍치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마을이 번성하던 때는 아랫마을, 가운데마을, 용바웃골 세 곳으로 나누어졌다.

 

어느 때인가 포목장수로 갑부가 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명당터를 찾아 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었다. 김부자는 아랫마을에 터를 잡고 5채가 넘는 큰 저택을 지었다. 그런데 집을 짓고 산 지 얼마되지 않아 겉보기에 호화롭게 보이는 이집에 도둑이 들기 시작했다. 열 사람이 한사람 도둑 못 지킨다 했듯이 집요하게 달려드는 도둑을 막을 수가 없었다. 김부자는 집안에 많은 사람을 들여 집을 지키게 할 궁리를 하였다. 그래서 매일 집에 동네 사람들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여 집안에 사람이 끓게 하였다. 마침 끼니가 어렵던 사람들은 너도 나도할 것 없이 김부자 집으로 모여들었고, 심지어는 소문을 듣고 멀리 타관 사람들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 중에는 학식있는 사람과 도술에 능하다는 사람들까지 찾아왔다. 이렇게 찾아와 묵게되는 사람들은 학식 있는 사람에게 예를 갖추어 글배우기를 청하고 그 청에 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넓은 김부자집은 도둑이 근접할 수 없는 훌륭한 서당이 되었다. 학식을 갖춘 훈장의 가르침을 받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매일 끊이질 않게 된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자집에 마이산에서 득도했다는 이도사가 찾아왔다. 이도사는 사람의 심령을 다스리는 도를 터득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는 사람의 마음을 꾀뚫어 보는 심미안을 지녔으며,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는 역학에 능통한 도사였다. 이도사는 식사도 보통사람과 달리 마이산에서 익힌 생식을 하였다. 이도사에게 푹 빠진 김부자는 이도사에게 도술을 배우고 싶어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도사는 아무나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거절하였다. 김부자는 단념하지 않고 매일 이도사가 기거하는 방에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도사도 김부자의 간절한 청을 더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흘렀어도 김부자에게는 득도의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다. 김부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도사는 매일 솔잎과 함께 적은 양의 음식으로 생식을 하며 생활하였다.

 

어느날 밤 몰래 김부자는 이도사 방을 몰래 훔쳐보게 되었다. 혹시 다른 비법이 있으면서 자신에게는 가르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를 얻는다는 것은 오랜 고행을 인내하며 사심을 버려야 하거늘 김부자의 욕심은 도를 그르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훔쳐보던 김부자는 이도사가 종이에 싼 약가루를 물에 타마시는 것을 보았다. 다음번에 봤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부자는 이도사의 비법이 그 가루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도사가 산행으로 자리를 비웠다. 김부자는 '이때다' 하고 그 약을 훔쳐내게 되었다. 그 약은 아무나 복용할 수 없는 비상이었다. 김부자는 이 비상을 득도의 중요한 비술로 여겨 치사량이 넘는 비상을 물에 타 마시고 말았다. 이도사가 산행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은 온통 초상집 곡성으로 가득찼다. 김부자가 죽은 것이다. 김부자가 죽자 기거하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서당은 자연 폐쇄되고 말았다.

 

이도사는 이러한 액운의 원인을 가운데마을의 개구리혈로 보았다. 간데말에서 하마정으로 흘러가는 개천이 사행천으로 어찌나 구부구불한지 마치 뱀이 기는 모습이었다. 이를 두고 풍수들은 하마정 뱀이 개구리 혈인 간데말을 향해 먹이를 먹기 위해 헤엄쳐오는 형국이라 했다. 그래서 간데말은 뱀에게 먹히는 형국이라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액운을 막기 위해서는 동네 입구 개천에 큰 바위를 세워 뱀의 목을 눌러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동네 사람들은 뒷산에서 길다란 바위를 끌어다 마을 앞 개천에 수구맥이 비보석(裨補石)을 세워 마을의 액운을 막았다. 그 후 지금까지 가산 마을은 별다른 액운이 없이 평안하게 지내오고 있다.

 

 

 

  

출처 : 無人山房
글쓴이 : 南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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