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溟大師의 자비사명대사의 탄생과 출가위승 사명대사의 행적을 담은 허균이 지은 석장비문(石藏碑文)에 의하면,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의 해산하던 날 꿈에 흰구름을 타고 머리에 누런 두건을 쓴 금빛나는 사람(金人)을 데리고 만길이나 되는 높은 대(臺)에 올라가니 그 위에 백발의 신선이 앉아 있으므로 백발의 신선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리고 나서 사명대사를 탄생하였다고 한다. 역시 석장비문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점점 자라면서 희롱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허튼 소리를 하지 않으며, 뭇 아이들과 냇가에서 즐겁게 뛰놀 때도 모래로 탑을 쌓기를 좋아하고, 돌을 세워놓고 부처님이라 하면서 부처라는 돌 앞에 꽃을 바치고 혹은 밤을 주어다 제단을 차려 예를 갖추기도 했다. 고기 잡는 사람이 그물로 자라를 잡은 것을 보고는 자비심을 일으켜 밤을 모아 주기로 약조하고 자라를 사서 못에 방생을 하니 뭇 아이들이 감동하여 주운 밤을 모두 사명대사의 앞에 놓았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아이들에게 꼭같이 밤을 나누워 주고 자신은 밤 한알도 취하지 아니했다.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안 동리 사람들이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 이 모두 역대조사의 탄생과 어린시절과 같은 모습이다. 석장비문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일곱살 때의 일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사략을 배우고, 열세살 때는 거유(巨儒) 황유촌여헌선생(黃柳村汝獻先生)에게서 맹자를 배웠는데, 어느날 밤, 사명대사는 맹자의 책자를 덮고 홀로 탄식하기를, “세속의 학문은 그 됨됨이가 천하고 더러운지라, 속세의 온갖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가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인가! ”하고는 남몰래 짐을 꾸려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당시 15세의 나이였다. 사명대사는 출위승하여 비로서 불전(佛典)으로서 처음으로 선문의 전등록(傳燈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책장을 펴자 그 오묘한 뜻을 깨달았으므로 당시 직지사의 나이 많은 승려들이 이해 못하는 부분이나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도리어 사명대사에게 그 뜻을 물어 배웠다 하니, 이 모두 사명대사가 전생에서 부터 공부한 승려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불철주야 대장경과 선문의 서적과 참선공부를 하더니 18세 되는 해(1561년) 명종임금 시절의 신유년에 서울 봉은사에서 시행한 승과시험에 선과(禪科)에 장원급제의 광영을 얻었다. 18세의 나이에 승과에 장원급제한 사명대사 조선조는 고려말의 일부승려들의 폐단을 절감하고, 새로운 개국의 종교정책에 의해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펴왔는 바, 사명대사가 승과시험을 치룰 수 있는 당시 정치상황은 성종조에는 성종이 어명으로 승려들의 도첩제(度牒制)를 폐지 당하고, 더욱이 폭군 연산군의 불교계에 대한 만행의 암흑기를 거쳐 중종조에 이르러 불교의 맥이 기진맥진한 상황이 되어버린 시대였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불교계에 지옥에서 관음보살을 만나듯 호불(護佛)의 왕후를 만났으니, 작금의 인기제일의 SBS의 TV사극의 ‘여인천하’에 나오는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는 12세에 임금에 자리에 오른 명종의 정치를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섭정하면서 막강한 권력의 중심이 되자 무엇보다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대원력을 품고 은밀히 각 도의 수령방백에게 불교를 중흥시킬 고승을 추천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명종 4년에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이 인제 백담사에서 수행하는 보우선사(普雨禪師)를 천거했다. 문정왕후는 보우선사를 인견하여 불교중흥의 대안을 듣고는 보우선사를 기용하여 폐지되버린 선·교(禪敎) 양종의 수사찰(首寺刹)을 다시 일으키고 승과와 도승첩(度僧牒)을 부활시키고 승려의 출가를 허용하였다. 사명대사는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으로 부활된 승과중 선과에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불교, 기독교, 회교 등 종교의 중흥에 있어서 언제나 믿음깊은 여인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문정왕후는 조선불교 중흥에 있어서 위대한 여성이었다. 사명대사가 약관 18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하니 불가의 칭송은 물론이요, 그 당시의 학사대부(學士大夫)와 시인들로서 사암 박순(思菴朴淳),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제봉 고경명(霽峰高敬命), 가운 최경창(嘉運 崔慶昌), 하곡 허미숙(荷谷 許美淑), 백호 임제(白湖 林悌), 손곡 이익지(蓀谷 李益之)와 당대의 유교 명사들이 앞다투워 사명대사와 더불어 즐거히 교유하여 시를 주고 받았고, 그 시문이 책자로 조선천지에 유포되니 도처에 사명대사에 대한 칭송이 우레와 같이 높았다. 앞서 열거한 명사중 하곡(荷谷)은 허균의 형이다. 하곡이 사명대사의 총기를 시험하기 위해 사명대사를 찾아와 중국의 명문장가인 한유(韓愈)의 문장 가운데 가장 긴 문장을 한번 보고 외울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사명대사는 주저 없이 한유의 긴 문장을 받아들고 척 일별 하더니 이내 글자 한 자도 틀림없이 외워 보였다. 하곡은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감탄하고 평생지기로 교유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당대의 거유(巨儒) 기고봉(奇高峯)은 사명대사를 향해 이렇게 충고했다. “재주만 믿고 부지런히 더욱 더 학문에 정진하지 않으면,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결국 공(公)을 그르치게 되면 가석(可惜)한 일이 될 것이오.” 기고봉의 이러한 충고를 받은 사명대사는 내심 크게 깨닫고, 기고봉으로부터 더욱 부지런히 가르침을 구하고, 소재정승 노수신(蘇齋相 盧守愼)에게 사자(四子-노자, 장자, 문자, 열자)를 배우고 또 이태백의 시와 두보의 시도 배웠다. 이로부터 문장이 날로 더욱 나아가 불경도 열심히 일어 연구하여 깨달음을 더 하였다. 사명대사의 유불선(儒佛仙)의 학문이 높아지니 선비들과 젊은 승려들이 사명대사가 있는 산문에 구름같이 모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서산대사를 만나 제자가 되다 사명대사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니 32세가 되는 을해년에는 사부대중들이 사명대사에게 선종(禪宗)의 수사찰에 주지가 되기를 청원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를 첫 상면을 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서 비로서 전생의 스승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고 제자가 되었다. 서산대사의 마음의 그릇과 기개를 짐작할 수 있는 서산대사의 시를 소개한다. 만국도성은 개미둑 같고/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은데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 창에 비치는 밝은 달이 청허의 베개에 비치고/한없이 부는 솔바람은 운이 고르지 못하도다 사명대사는 인기상승하여 조선의 승려로써는 자신이 제일이라는 자긍심을 가졌는데, 소문을 들으니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에 비하면 서산대사는 태양이요, 사명대사는 달 정도의 수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사명대사는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만나 법거량(法擧揚), 즉 선문답을 하여 서산대사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홀로 간단한 행장을 꾸려 묘향산을 향해 길을 떠난 지 여러날에 마침내 서산대사가 있는 산문에 이르렀다. 사명대사가 산문을 들어서려니 한 어린 동자승이 다가와 합장하여 절하면서 “어서 오십시요. 기다린지 오랩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사명대사는 의아하여 물었다. “ 너는 내가 누군데 기다렷더라는 말이냐? ” “ 네. 큰스님인 서산대사께서 오늘 휼륭한 스님이 이곳에 오신다며 마중을 나가라 하셨습니다. ” 사명대사는 놀라운 가슴이 되었으나 다시 태연히 말했다. “네가 기다리는 스님이 내가 아닐 수도 있느니라. ” “ 아닙니다. 서산대사께서 오늘 이곳에 오시는 휼륭한 스님이 산문에 당도하면 시냇물이 역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스님이 오가시는 가운데 유독 스님이 오시니 저렇게 시냇물이 역류하지 않습니까.” 과연 동자승이 가리키는 대로 시냇물을 보니 기이하게도 역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문이 헛되지 않다 하더니 과연 서산대사는 앞 일을 환히 내다 보시는구나. 사명대사는 감탄하면서 동자승을 따라갔다. 때마침 큰 법당에서는 부처님전에 사시불공을 마악 끝내고 대중이 법당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서산대사도 법당 밖으로 나오려는 중이었다. 이때 사명대사가 벽력같은 음성으로 “서산대사님!”하고 불렀다. 일순 대중은 일제히 사명대사에 주목하였다. 사명대사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향해 일순 휘저으니 손바닥으로 새 한 마리를 잡아 쥐었다. 사명대사는 새를 손에 쥐고 벽력같이 물었다. “ 서산대사님! 제 손안에 든 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 사명대사는 서산대사가 새가 살았다면 죽여 보일 것이요, 죽었다면 파르르 살아 날아가게 할 속셈이었다. 대중은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선문답의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을 알고 일순 숨을 죽이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를 지켜보았다. 그 때 서산대사는 한 발은 법당 밖에 나와 있고, 한 발은 아직 법당 안에 있는 상태였다. 서산대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사명대사에게 되물었다. “ 내가 지금 법당 밖으로 나갈려고 합니까,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까? ” 서산대사 역시 사명대사가 법당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면 법당 안으로 들어 갈 것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법당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이었다. 사명대사의 얼굴에 패색이 일면서 크게 소리내어 웃으니, 역시 서산대사도 크게 웃어보였다. 잠시후 사명대사는 방장실에서 서산대사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무례를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서산대사를 좀 더 시험해 보려는 마음이 남았다. 사명대사에게 오공(午供)의 공양밥상이 나오자 밥상을 물리면서 서산대사에게 특별한 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제안하면서 발우에 물을 담아서는 바늘을 넣어 국수를 만들기 시합을 청했다. 그런데 사명대사가 만든 국수는 절반은 바늘이요, 절반은 국수일 뿐이었다. 서산대사는 바늘이 모두 맛있는 국수로 변화했다. 그외 여러차례 서산대사를 시험하든 사명대사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되었다 한다.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3년간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불철주야 수행정진하여 비로서 불교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명대사가 임진난 때, 승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고, 정치적 외교를 한 것도 모두 스승인 서산대사로부터 백성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사명대사의 열반 사명대사의 문제자 해안(海眼)이 사명대사가 열반에 든지 31년째 되는 인조(仁祖)18년에 지은 사명대사 행적(行蹟)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들어가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임금은 여러번 약을 내리셨다. 경술년 가을에 임금이 염려하시고 서울에서 치료하게 하려고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치송케 하라 하였다. 그 해 8월 26일에 사명대사는 모든 승려들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네가지 요소(地,水,火,風)으로 이뤄진 이 몸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엇하여 번거로이 오고가고 하면서 이 허깨비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지금 죽음에 들어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면서 시자에게 몸을 씻게 하고 간 뒤에 조용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세속나이는 67세요, 법의 나이는 53년 3개월이다.’ “저 선비를 살려 돌아가게 하라” 그러나, 사명대사의 열반에 대해서 전해오는 의문의 이야기가 있다. 사명대사가 어명으로 일본국에 갈 때와 돌아올 때도 각도 수령방백은 부산포에까지 와서 전송하고 마중을 했다. 그런데 동래부사 송상윤(宋象允)은 사명대사가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떠날 때 병을 핑계하고 전송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명대사가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동래부사는 병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생들과 가무속에 술을 마시고 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명대사가 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다시 부산포로 돌아올 때도 동래부사는 역시 칭병하여 나와보지 않았다. 동래부사는 마침 영양대군의 제삿날인데도 불구하고 역시 기생들과 가무속에 대취하여 놀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이러한 탐관오리 때문에 임진난 때 백성이 죽어갔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를 일벌백계로 징치하기 위해 동래부사를 잡아오게 하여 준엄히 이렇게 꾸짖었다. “나, 송운(松雲=사명대사)은 부덕한 몸으로써 일본에 가게 되어 모든 도의 수령과 방백은 와서 환송하였는데, 오직 홀로 동래부사 송상윤은 만리바다를 건너갈 때도 병으로 나오지 않고, 또 만리 길을 다녀올 때도 나오지 못한다 하니 그 병이 무슨 병이기에 그다지 몇 만리보다 길다는 말인가. ” 사명대사는 이어서 말했다. " 그대 같이 나라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기생들과 놀려고만 하는 자가 수령으로 있기 때문에 임진난에 무고한 백성이 죽어갔다.나라와 백성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특명대신의 명으로 그대의 목을 베어 관리의 경계를 삼겠노라!" 사명대사는 나장들에게 추상같이 명을 내려 동래부사의 목을 베게 하고, 임금께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참(斬)을 당한 동래부사 송씨의 친족들은 사명대사에 대한 복수심으로 사명대사의 사적을 모두 불사르고 마침내 사명대사를 시해하는 자객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사명대사가 홍제암에서 병환에 누워 있을 때, 어떤 선비가 사명대사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홍제암에 찾아왔다. 그 선비는 사명대사의 병을 치료한다는 구실로 주위를 물리치고 누워 신음하는 사명대사의 중원(배)에 큰 침을 찔러서 그 침 끝이 등에 까지 나오도록 깊숙히 찔렀다. 그제서야 사명대사는 선비가 의원이 아닌 자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명대사는 침을 뽑으면 자신이 즉사한다는 것을 알고 침을 뽑지 못하게 하고, 선비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는가?" 선비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대사가 참수한 전임 동래부사가 나의 부친이요. 자식으로써 어찌 부친의 원수를 갚지 않겠소?" "오-, 그러한 인과로군. 그러나, 그대의 부친이 잘못한 것은 깨닫지 못하시는가?" "나는 오직 원수를 갚았을 뿐이오. "그대에게는 우국충정은 기대할 수 없겠군. 그러나, 나는 그대를 살려주고 싶소. 또 하나의 인과를 맺고 싶지 않은거요. 침을 뽑지 말고 어서 달아나시오. 내 제자 가운데는 범같은 제자들이 있으니 선비를 해칠까 두렵소. 어서 도망가시오." 사명대사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각오한 선비는 사명대사의 자비에 황급히 절을 올리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사명대사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사명대사는 자초지종을 말해주고 “ 대의로 행한 일도 인과는 피할 수 없다 ”면서 제자들을 일깨우고 달아나는 자객을 추포하지 말것을 엄명했다. 제자들은 통분 속에서 정신없이 달아나는 자객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제자들의 애도의 통곡속에 가야산 해인사에 열반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명대사가 둥래부사를 선참후계한 사적자료는 유몽인감난록(柳夢寅勘亂錄)에 있다. 사명대사의 비석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눈물이 흐른다 전생의 인연따라 어려서 출가위승하여 불철주야 공부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고, 나라와 백성이 위급할 때는 하산하여 적병과 싸웠고, 멀리 일본에 까지 가서 포로를 데리고 오면서 그 명성을 떨치고, 노년에는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서 은거 하면서 하루 한시인들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고 사랑하지 않는 날이 없는 사명대사인데, 속좁은 송씨의 후예는 대의 보다는 개인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서 의원를 빙자하여 사명대사를 죽이고 말았다.우리는 여기서 우선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가? 우국충정으로 부패한 관리를 참수했지만, 생명을 죽인 인과응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오직 이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크신 지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걱정이 되면 사명대사가 열반에 드신 곳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 부도전에 봉안된 비석과 고향인 밀양 표충사에 봉안된 비석에서 사명대사의 눈물 같은 물이 흐른다고 한다. |
출처 : 일촌 불
글쓴이 : 목우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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