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논산기행②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본산 돈암서원(遯巖書院)

강나루터 2017. 6. 12. 06:06

 

논산기행②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본산 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임리(林里)에 있는 서원으로 

1634년(인조 12) 창건.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泰斗)이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적통인 대유학자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60년(현종 1)에 사액(賜額)된 호서지방

(충청도)의 대표적인 서원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기호산림(畿湖山林)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선현의 제사와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 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은 인조 12년(1634) 현재의 위치에서 1.5km쯤 떨어진 하임리(숲말)에 건립되었으나

돈암서원이 창건된지 240여년이 지난 고종 17년, 경진(庚辰 1880)에 이르러서 서원 앞의 사계천

(沙溪川)이 서원의 담장을 침식(浸蝕)해 들어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서원이 붕괴의 위험에

이르게 되자, 사림(士林)에서는 돈암서원의 남쪽에 자리한 현재 위치에 터를 잡아 이건(移建) 

하였다.

 

사우(祠宇)는 구 서원(舊 書院)의 재목(材木)을 실어다가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나머지 건물은

대체로 재목을 바꾸어 고쳐 지었는데, 제도(制度)는 일체 옛 건물(建物)의 규례(規例)에 따랐다.


                                                                                                                - 광산김씨 유적보감 上권 참조 -

 

 

                  

                    ▲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

 

               서원의 영역은 홍살문에서 시작된다. 홍살문은 서원 영역으로 진입함을 

               알리는 상징적인 출입문으로 좌우 양쪽의 기둥을 석주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 옆에 하마비가 비스듬히 서 있다. 사실 사진의 구도를 잡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앵글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돌리면 쓰레기 더미와 허물어진

               축사가 흉물스런 모습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국도에서 서원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다.

               이 또한 지정문화재의 격에 맞는 도로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느낀 점이다.

 

 

 

  ▲  산앙루(山仰樓) 정면

 

 외삼문 앞에 있는 누각으로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정면 5칸 측면 2칸의 큰 누각인데, 주련에

 써 넣은 글을 선택하신 분은 중국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본명은 옹(雍)]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신 분인 것 같다. 그의 詩 세한(歲寒)의 4귀절과 청야음(淸夜吟)의 4귀절 중 2귀절을

 적어 놓았는데, 세한(歲寒)의 3,4연이 뒤바뀌어 걸려있다.

 아마도 주련을 달면서 생긴 착오라 여겨지지만 확인을 요하는 대목이다.

 

 

 세한(歲寒)

 

 松栢入冬靑(송백입동천)   소나무 잣나무는 겨울에 들어 더욱 푸르니

 方能見歲寒(방능견세한)   비로소 추운 겨울이 온 것을 볼 수 있네

 聲須風裡聽(성수풍리청)   소리는 모름지기 거친 바람 속에서 들어야 하고

 色更雪中看(색경설중간)   그 빛깔은 눈 속에서 보아야 새로워 진다네

 

 

 

 청야음(淸夜吟)

 月到心處  (월도천심처)  달은 하늘 중간에 떠 있고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  바람은 물결 위에 찰랑인다.
 一般淸意味  (일반청의미)  이러한 맑은 기분을  
 料得少人知  (요득소인지)  아는 이 적으리라

 ▲  서원에서 본 산앙루(山仰樓)

 

 

 ▲  돈암서원 외삼문

 외삼문(外三門)은 솟을 3문으로 이름은 입덕문(入德門)이다.

 

 

 ▲  응도당(凝道堂) 정면

 

학문을 연마하던 강당인 "응도당"은 최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여 보물 제1569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7월 10일 대한민국정부 관보 제16789호 81쪽에서 82쪽에 실린 보물지정사유는 이러하다.

 

"응도당은 당초 서원을 충남 연산면 임리 249번지에 창건할 때 함께 건립한 이후,1881년(고종 8년)

침수피해로 인하여 서원을 임리 74번지로 이건할 때 재정적인 부담때문에 옮기지 못하였다가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하옥제도(厦屋制度)

를 본받아 지어진 건물이다."

 

                                   ※ 여기서 하옥(厦屋)은 이상적(理想的)인 의례용 큰 전각을 의미한다.

 

 

 ▲  응도당 측면 

 

"그 특징은 평면구성에서 중당(中堂)과 동서상(東西廂),중당 뒤에 중실(中室)과 좌우방(左右房)과

동서 실(東西 夾室)을 둔 것이며,지붕은 맞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이 덧지붕의 일종인 영(榮)을 

둔 것이다. 현재 응도당은 내부 바닥 일부 및 창호가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이나 영(榮)

등이 잘 남아있다.

 

응도당은 비록 당초 위치에서 이건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이상적인 고대 예제

(禮制)를 따라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며 현존하는

건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남아있다는 점에서 보물지정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라고

되어있다.

 

 

 ▲  응도당 주련 

 

솔직히 나는 문묘에 배향되는 동국18현중, 그것도 두 집안에서 두 명씩,더 나아가 부자(父子)가

배향되는 전무후무,유일무이한 선현 네 분이 모셔져있는 돈암서원 주련의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응도당의 주련은 중국 송(宋)나라 난계(蘭溪) 범준(范浚)의 "심잠 (心箴)"을 적어 놓았다.

'잠(箴)'은 아픈 데를 치료하는 침(針)이 원래의 뜻으로, 교훈이 될 만한 뜻이 담긴 글을 이른다.

정면 5칸의 6개 기둥 앞면과 양쪽 끝기둥의 측면에 하나씩 모두 8개의 주련이 걸려있는데

심잠(心箴)의 전부를 써지 못하고 아래 파란색 글씨의 내용만 걸어놓았다.

 

茫茫堪輿俯仰無垠 (망망감여부앙무은) 망망한 천지여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끝이 없다

人於其間渺然有身 (인어기간묘연유신) 사람이 그 사이에 있어 가물가물하게 몸을 두고 있다 

是身之微太倉稊米 (시신지미태창제미) 이 몸의 보잘 것 없음이 태창의 한 톨의 쌀이로다

爲參三才曰惟心爾 (위참삼재왈유심이) 삼재에 참여하니 말하기를 오직 마음 뿐이라고 한다

往古來今孰無此心 (왕고래금숙무차심) 옛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겠느냐마는

心爲形役乃獸乃禽 (심위형역내수내금) 마음이 형체에 사역을 당하니 바로 금수로다

惟口耳目手足動靜 (유구이목수족동정) 오직 입 귀 눈 손 발의 동정이

投間抵隙爲厥心病 (두간저극위궐심병) 사이에 의탁하고 틈에 던지니 그 마음의 병이 된다

一心之微衆欲攻之 (일심지미중욕공지) 한 마음의 보잘 것 없음을 여러 욕심들이 공격을 하니

其與存者嗚呼幾希 (기여존자오호기희) 그 더불어 보존된 것이 아아! 드물구나

君子存誠克念克敬 (군자존성극념극경) 군자가 정성을 보존하고 능히 념하고 능히 공경하면

天君泰然百體從令 (천군태연백체종령) 천군(마음)이 태연하고 모든 지체가 천명을 따른다.

 

 

 

 ▲  말간 생얼굴의 미인을 보는 느낌의 세월에 씻긴 목재들이다...

 

 

                  

                    ▲  응도당 내부

 

 

                   

                    ▲  덧지붕(榮)

                    응도당의 두드러진 건축상 특징인 덧지붕. "눈썹처마"라고도 일컫는다.

 

 

 ▲  정회당(靜會堂)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이곳에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

 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후학의 교육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  장판각(藏板閣)·

 

              이 곳에는 김계휘(金繼輝),김장생,김집의 문집인 황강실기(黃岡實記),

                 사계전서(沙溪全書),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등과 상례비요(喪禮備要)

                 판각 2100판과 왕실의 하사품인 사액연(賜額硯),옥등잔(玉燈盞) 등이

                     보관되어 있다.

 

 

 ▲  양성당(養性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인 거경재(居敬齋),정의재(精義齋)

 

  건물의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의 전형적인 서원의 일반 예를 따랐다.

 

 

 

 ▲  양성당(養性堂) 

 

양성당의 주련은 朱子敬霽箴(주자경재잠)을 써서 걸어놓았다.

이 글은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안동의 도산서원에도 주련으로 걸려있다.

주자(朱子)는 본당의 왼쪽에 있는 방을 경재(敬齋)라고 부르고, 오른쪽 방을 의재(義齋)라고 불렀다.

이 잠언은 주자가 지어 자신의 경재에 붙여두고 스스로 경계한 글이다.

경재잠의 일부를 가려 적었는데 걸린 주련의 내용은 아래 파란색 글씨로 된 부분이다.

 

 

正其衣冠尊其瞻視(정기의관존기첨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눈길은 존엄하게 하라.
潛心以居對越上帝(잠심이거대월상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제(上帝)를 대하듯 居하라

足容必重手容必恭(족용필중수용필공) 발 가짐은 반드시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라.

擇地而蹈折旋蟻封(택지이도절선의봉) 땅은 가려서 밟으며 개미집도 피하여 돌아가라

出門如賓承事如祭(출문여빈승사여제) 문을 나설때는 손님을 뵈옵는 듯 단정히하고,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는

                                             듯 정성껏 할 것이며,

戰戰兢兢罔敢或易(전전긍긍망감혹이) 모든 일을 두렵게 여기고 조심하며 감히 소홀하게 하지 말라.
守口如甁防意如城(수구여병방의여성) 입 조심하기를 병과 같이 하고 뜻 방어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洞洞屬屬罔敢或輕(동동속속망감혹경) 성실히 하여 혹시라도 감히 경솔하지 말라

不東以西不南以北(불동이서불남이북) 동으로 간다하고 서로 가지 말고, 남으로 간다하고 북으로 가지 말라.

當事以存靡他其適(당사이존미타기적) 일에 임해서는 마음을 그 일에만 두며, 다른 곳에 두지 않도록 하라.
弗貳以二弗蔘以三(불이이이불삼이삼) 둘이라 하여 마음을 두 갈래로 두지 말고, 셋이라 하여 세 갈래로 두지 말라.

惟心惟一萬變是監(유심유일만변시감)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면 만 가지 변화를 보살필 수 있다.

 

從事於斯是曰持敬(종사어사시왈지경) 이렇게 일삼고 힘쓰는 것을 일컬어 공경(恭敬)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動靜不違表裏交正(동정불위표리교정) 동(動)하나 정(靜)하나 어긋남이 없게 하고 표리를 다 바르게 하라.
須臾有間私欲萬端(수유유간사욕만단) 잠시라도 마음에 틈이 생기면 온갖 사욕이 일어 나니라, 그리되면
不火而熱不氷而寒(불화이열불빙이한) 불이 아니라도 뜨거워지고 얼음 아니라도 차가워지나니
毫釐有差天壞易處(호리유차천괴이처) 털끝 만금의 어긋남이 있어도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어
三綱旣淪九法亦斁(삼강기륜구법역두) 삼강(三綱)이 없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지니라.
於乎小子念哉敬哉(어호소자념재경재) 아아! 소자(小子)여 언제나 생각하고 공경(恭敬)하여라.
墨卿司戒敢告靈臺(묵경사계감고영대) 묵경(墨卿)이 경고할 것을 맡았으니 감히 靈臺(영대)에 고(告)하노라.


        
                        

                     ▲  돈암서원 원정비(遯岩書阮 阮庭碑)

 

                 양성당 앞 자리하고 있는 비로, 서원을 세우게 된 내력과 서원의 구조 

                 및 사계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愼獨齋) 김집(金集)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었다. 서원을 이건(移建) 할 때 함께 옮겨온 것으로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沙溪)와  자상하고 치밀한 신독재(愼獨齋)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비는 높직한 사각 연꽃 무늬 받침대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현종 10년(1699)에 세운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글씨를 썼으며, 비몸 앞면에 전서체로 새긴 비의 제목은 김만기의 글씨이다.

                 

 

 

 

 

 

  ▲  숭례사(崇禮祠)

 

일반적으로 내,외삼문은 솟을 삼문을 만드는게 보통인데, 이곳 돈암서원의 문은 특이하게 3개의

문을 따로 분리시켜 놓았다.

문이 3개인 것은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른 전형적인 예법을 따르고 있는 것인데,동쪽으로 들어
가서 서쪽으로 나옴을 말한다.
가운데 문은 제사를 지낼때 혼령이 지나는 문으로 신문(神門)이라하여 문은 늘 닫혀있다.

 

 

 

 

 ▲  숭례사(崇禮祠)의 담장

 

숭례사의 담장은 전돌을 박아넣고 회칠을 한 특이한 형태다. 그 담장에 사계(沙溪) 선생의 인품과

학문적 사상이 요약된 글씨가 12자 새겨져 있다.

내삼문의 오른쪽 담장부터 그 뜻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지부해함 (地負海涵)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포용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3개의 문과 문사이에 있는 두 곳의 담장에 있는 붉은 글씨는 박문약례(博文約禮)다.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의

박학어문약지이례(博學於文約之以禮)에서 따온 것으로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요약한다면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지식은

넓을수록 좋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그치고 행동과는 무관하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다시말해 현실을 외면 않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 것이다.

 

서일화풍(瑞日和風)

서일상운 화풍강우(瑞日祥雲 和風甘雨)에서 가져온 말이다.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부드러운 바람과 때를 잘 맞추어 알맞게 내리는 단비와 같이

웃음으로 대하고 남을 편안하게 해 주라는 뜻이다.

 

 

 ▲  숭례사(崇禮祠) 정면

 

사우인 숭례사에는 김장생(金長生)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등 문묘에 배향된 선대(先代)의 현인

네 분만을 모시고 있는 보기 드문 선정서원(先正書院)이다 

 

계단 앞 안내판에는 유경사(惟敬祠)라 적혀있다. 현판과 안내내용이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안내판

의 내용중 오자(誤字)가 눈에 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계종택의 종손께 전화로 이 사실을

말하니,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곧 교체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  숭례사 정료대(庭燎臺)

 

                숭례사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 매월의 두번 째 간지(干支)

                의 정(丁)자가 드는 날]제사를 올리는데, 불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

                에서 유서깊은 세월의 깊이를 느낀다. 

                정료대는 일종의 조명장치인 등불인데 야간의 통행이나 짐승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솔등을 모아 불을 밝히던 곳이다.

                관솔은 소나무에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등을 말하는데,

                관솔은 불이 잘 붙고 또한 잘 꺼지지 않으므로 불을 붙여 등불대신 사용하

                기도 하였다. 여기에 붙인 불을 관솔불이라 하였다.

 

 

                  

                     ▲  숭례사와 한국적송

 

                  세월의 비늘을 덮어쓰고 제자리에 꿋꿋이 서 있는 적송과 숭례사를

                  뒤돌아보며 400여년 전 사계 선생이 펼친 뜻을 헤아려본다...........

 

                     사계 선생은 예(禮)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학(禮學)의 근본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17세기 예학(禮學)과 김장생의 사상은 한국의 지성사적 차원에서

                          전통예제의 근간을 이룩했다는 학문적 평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예학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창조성을 발휘하라는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 자료발췌 -

 

 

                                                                          

출처 :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글쓴이 : 들이끼속의 烏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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