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學과 退溪의 天命思想**
-自然과 人間에 대한 ‘敬’-
郭 信 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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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Ⅱ. 天地之道와 萬物之情-辨物의 철학 Ⅲ. 만물의 感應論과 仁의 우주론적 차원 | Ⅳ. 洗心의 哲學-자연과 人間존재에 대한 ‘敬’ Ⅴ. 맺음말 |
Ⅰ. 서 론
淮南子에 “자연을 알되 인간을 알지 못하면 세속사회에서 살아가기 어렵고, 인간을 알되 자연을 알지 못하면 진리의 세계에서 노닐 수 없다.”(知天而不知人則無以與俗交. 知人而不知天則無以與道遊 : 人間訓)고 하였다. 흔히 道家의 莊周는 ‘자연을 알았으나 인간을 알지 못했다.’1)고, 유가의 荀卿은 ‘인간은 알았으나 자연을 알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漢代 초기에 쓰여진 이 책은 그 내용이 대체로 諸家사상의 비판과 더불어 종합 내지 융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유가와 도가사상의 지양을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철학이 변함없이 추구하여온 이상은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행위가 조화 또는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天人合一로 표현되는 이러한 이념의 추구에 있어서 가장 존중되고 애용되는 텍스트는 ?周易?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전하여지는 ?周易?은 占筮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卦라는 도형 및 卦辭라고 불리우는 占辭로 이루어진 經과, 이에 대한 유가철학적 해석인 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傳은 흔히 열개의 날개(十翼)로 불리어왔는데 그것은 글자 그대로 經의 사상을 전파함에 있어서 훌륭한 날개의 노릇을 하였다. 주역의 經에 담긴 사상은 공자의 권위가 실려있는 十翼이라는 날개를 얻음으로써 시공의 제약을 넘어 맘껏 비행할 수 있었다. 즉 역학의 철학적 보편성은 주로 십익에 의하여 획득되었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십익은 공자의 저작으로 통용되어 왔으나 오늘날 이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지 그것이 공자학파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데에는 폭넓은 합의가 도출되고 있다. 근래의 학자들 가운데는 이 傳을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道家의 우주론적 자연철학적 도전을 수용하고 유가철학의 宗旨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또한 易經의 전통적 권위를 빌리면서 체계화해 낸 철학적 업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이루어낸 집단의 계보나 개인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는 아니하나 이 匿名的 집단이야말로 공자 이후 第一代 창의적 신유학자들이라고 평가한다.2) ?주역?에 대한 연구로서의 역학은 그 역사적 유래가 깊은 만큼 유파도 다양하다. 복서적, 종교적 방면의 연구가 있는가 하면 윤리적, 철학적 방면의 해석도 있다.
象數學계통이 있는가 하면 義理學계열이 있고, 儒家의 역이 있는가 하면 道家의 역, 佛家의 역이 있다. 한대의 역이 있는가 하면 송대의 역, 청대의 역도 있다.3) 그러나 역학의 큰 흐름은 역시 傳으로써 經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곧 經의 위치에 올려놓고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4) 철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기, 곧 송대 이후의 중국유학과 고려 후기 이후의 조선의 유학이 대체로 계사전을 비롯한 十翼 및 이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十翼은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 理學의 源泉이요, 道理의 大頭腦處였다.5)
Ⅱ. 天地之道와 萬物之情-辨物의 哲學
?주역?의 經과 傳에는 自然이라는 용어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자연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용어는 적지 않다. 특히 天地의 道(자연법칙)나 萬物의 情(내용)이라는 용어는 자주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역학의 목표로까지 설정되어 있다.
천지의 법칙, 개별적 만물의 실정 등은 우선 복희 八卦로부터 탐구하여야 한다. “복희가 한번 八卦를 그려 우주의 신비를 드러내 보였다.” (伏羲) 또는 “팔괘를 통하여 신명한 힘과 교통하고 만물의 실정을 헤아렸다.”6)고 하듯이 팔괘에 의하여 자연은 그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고 만물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팔괘의 중요성은 그것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체의 물상을 대표하는 전형이라는 데에 있다.
팔괘가 대표하는 물상은 乾 ; 天, 兌 ; 澤, 離 ; 火, 震 ; 雷, 巽 ; 風, 坎 ; 水, 良 ; 山, 坤 ; 地이다. 이들은 각각 特長을 지니고 있다. 說卦傳에 의하면 우뢰는 운동, 바람은 흩어놓음, 비는 적심, 해는 말림, 산은 멈춤, 못은 기쁘게 함, 하늘은 다스림, 땅은 저장함이 그것이다.
풍우란은 팔괘의 물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주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대의 것은 천지이고, 하늘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해와 달, 바람과 우뢰이고, 지상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산과 연못이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물과 불이다. 옛 사람이 이 여덟 가지로 우주의 근원을 삼았다. 그래서 이를 팔괘에 배치하였다.”7) 팔괘에 배당된 물상이 과연 우주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이냐, 그것들이 어떻게 기본적인 요소일 수 있느냐에 대하여 생각하여 볼 여지가 있다.
이 여덟 가지는 팔괘가 그려진 지역의 기후나 지리적 환경의 풍토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8) 이런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팔괘가 그려진 지방이 중국의 서쪽 秦과 晉등의 농경지역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적어도 여기에 바다의 풍물이 등장하지 않음으로 미루어 동쪽 해안지대는 아닐 것으로 본다.9) 팔괘 가운데 乾坤을 제외한 여섯 가지는 모두 음과 양이 뒤섞여 있다. 건과 곤만이 모두 양 그리고 음으로 되어있다. 즉 팔괘의 根幹은 건과 곤, 곧 天과 地이다. 팔괘만이 아니라 역에서 64괘중 건과 곤을 제외한 62괘도 결국 건과 곤에서 나온 것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건과 곤괘는 천지이고 나머지 괘는 만물에 해당한다.
?주역?사상의 핵심은 건괘와 곤괘, 하늘과 땅에 있다. 이 점은 우선 易傳의 저자에게서 확인된다. “건과 곤은 易의 門이다.” “건과 곤이 무너지면 易을 볼 수 없다.” “역을 볼 수 없으면 건과 곤이 그 작용을 멈출 것” 이라는 표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역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천지는 한마디로 진리의 貯藏所요, 진리의 집이다. 이 건과 곤의 문 안에는 만물이 있고, 만물에 상응하는 이치가 있다. ?주역?의 하늘과 땅에서 우리가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사항은 그 공간적 이해이다. 천지는 광대무변하며 만물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공간이다.
?주역?에서의 공간은 산, 들, 호수, 언덕 등 여러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것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어떤 물리학적 관심의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어떤 일의 성사를 위한 조건으로서의 의미가 훨씬 강하다. 따라서 주로 위치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천지가 세워지니 비로소 역의 道가 그 안에서 운행한다.’ 라는 말은 천지가 易이라는 진리의 활동무대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천지는 시간적으로 항구하다. 역은 시간적 무한속에서, 盈虛, 消息의 변화, 感應에 의한 생명의 暢達, 마치면 다시 시작함에 의한 항구성, 變易하는 현상 속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 등을 다루고 있다. 천지에서 파악되는 여러 현상 가운데 하나는 끊임없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현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지는 消息하고 盈虛한다. 소식의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태양이 비치는 시간이다. 차고 또 비고 하는 것은 달의 모양이다. 소식과 영허는 다름 아닌 변화이다. 그리고 변화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참모습이다. 변화는 대립되는 두 성질의 밀고 당김에 의하여 발생한다.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서로 밀고 당김에 의하여 변화가 생긴다.’, ‘한번 닫히고 한번 열림, 이를 일러 변화라 한다.’ (계사전)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변화는 계절 또는 시간에 대한 의식을 일으킨다. ‘천지가 변혁하니 사계절이 이루어진다.’, ‘때와 더불어 소식한다.’ 함이 이를 나타낸다. 변화는 시간에 따라 일어나며 시간은 사물의 변화로 인하여 생긴 의식이다. 변화가 없으면 시간의식도 생기지 않는다.
사물은 때가 되어야만 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근간은 궁극적으로 천지 음양의 작용이다. 변화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이 “역은 변화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다.” 라고 한 것이나 공영달이 “易은 변화를 총괄한 이름이요, 改換의 특별한 칭호이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음양의 운행, 寒暑의 왕래, 일월의 교대, 온갖 만물이 끊임없이 피고 짐, 생장, 쇠락 등은 變化의 힘과 換代의 功에 힘입지 않음이 없다. 역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변화를 의미한다.”10)라고 말하였다. 계사전에서도 “역은 자주 바뀐다.”고 하였으며 또한 사물은 “막히면 변하게 마련이요, 변하면 통하게 마련이요, 통하면 오래간다.”라 하였고, 또한 “낳고 또 낳음을 역이라 한다.”고 하였다. 작역자는 만물의 변화 그 법칙과 변화의 때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하여 사물마다 나름의 변화의 때가 있으므로 그 때를 잘 포착하여야만 형통하다는 처세철학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역학이다. 그러나 盈虛, 消息으로 표현되는 자연의 변화도 인식자가 관점을 달리하면 불변일 수 있다. 宋代의 易學者이자 文人인 蘇東坡(1036~1101)가 읊은 바와 같이 ‘물은 흘러가되 아주 가버리지는 않으며 달은 찼다가 기울되 결코 줄어드는 것도 늘어난 것도 아니 듯이’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천지는 한 순간도 정지한 때가 없지마는 불변자의 관점에서 보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견해는 바로 易이 말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변화로 인한 항구성’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여기서 말하는 항구성이 고정불변이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사물은 끝나면 곧 다시 시작한다. 역학에 따르면 자연의 세계에는 창조의 기점도 역사의 영원한 종말도 없다. 이러한 생각은 출생과 죽음이 곧 처음과 끝이 아니라 類比로 이어진다. 출생과 죽음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요, 또 다른 무수한 변화들 가운데 나타나는 일시적인 모습(容形)일 따름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처음과 끝은 하나의 사물의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太初라든가 영원한 終末은 ?주역?의 세계에는 없다. ?주역?에는 終始論이 있다. 종시론이라 함은 주역에 나오는 “終則有始 天行也”를 주목하여 하는 말이다. 여기서의 종시는 자연의 운행으로서의 元, 亨, 利, 貞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는 뜻이다.
원형이정의 ‘원은 만물의 시초요, 형은 만물의 상징이요, 이는 만물의 완수요, 정은 만물의 완성’ 이라고 풀이된다.11) 통상 이는 그대로 사계절의 순환을 나타낸다. 종시론은 貞元論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마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과 같이 지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한 단위가 끝나면 새로운 단위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학자에 따라서는 역의 종시를 사계절의 순환뿐만 아니라 천지 자의 종시로도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邵康節의 ‘元會運世’나 李珥의 ‘此天地彼天地說’이 그것이다. 천지는 일원을 주기로 한번 개벽한다거나, 현재의 천지가 끝나면 다른 천지가 나타날 것이요, 그 천지에서의 도수는 현재 천지의 도수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과 시작의 사이에는 언제나 큰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대체로 현상유지를 바라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종과 시의 대변혁은 새로운 질서를 낳게 마련인데, 인간은 이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어떠할지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근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역을 지은 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종시를 대하라 그러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역의 도라고 한다.12)라고 하였다. 역에서의 천지는 만물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천지가 만물을 생성 변화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양기와 땅의 음기가 교감 소통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때의 하늘의 양과 땅의 음은 다음과 같은 범주적 분류가 가능하다. 즉 乾 天과 坤 地는 크다/지극하다, 만물이 시작하는 바탕/만물이 태어나는 바탕, 남성/여성, 씩씩하다/온순하다, 쉽다/간단하다, 높다/낮다, 주재한다/이루어낸다 등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처럼 상대자와의 교감 감응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천지가 생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이다. 천지안에 생기로 충만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괘가 바로 復괘 ( )이다. 회복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괘는 한줄기 광명이 흑암의 밑바닥에서 생겨남을 상징한다. 여기서 생겨났다함은 전혀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전에 있던 것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복괘는 회복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十翼의 작가는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고, 이후 많은 역학자들이 이 복괘를 소재로 천지의 무궁한 생명력을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13)
Ⅲ. 萬物의 感應論과 仁의 우주론적 차원
역을 지은 자는 천지의 법칙(天地之道)을 밝히는 일면 만물의 실정(萬物之情), 즉 개별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간의 관계를 밝히는 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 천지가 能産的 자연이라면 만물은 所産的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주역?에서 우리는 ‘辨物’이라는 용어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사물의 속성을 변별하여 내는 것을 의미한다.14) 곤괘 문언에서는 인간사회의 가장 패역한 일에 속하는 하극상 즉 자식이 그 아비를 해치고, 신하가 그 임금을 해치는 일도 일찍 분별해 내야 할 일을 분별해내지 못함에 그 까닭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변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역에서 포괄적으로 규정하여 놓은 사물의 속성은 어떠한가?
64괘는 각각 만물의 실정 하나하나를 나타내는 것으로 384효는 그 만물의 시공간안에서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역?은 우선 팔괘에 등장하는 여덟가지 物象 상호간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즉 하늘과 땅, 물과 불, 우뢰와 바람, 산과 못은 특별한 관계에 있다. 하늘과 땅은 위치의 기준이 된다(天地定位). 우뢰와 바람은 서로 잘 어울린다(雷風相簿). 물과 불은 서로 건져준다(水火不相射). 산과 못은 서로 기운을 소통한다(山澤通氣). 이는 泰괘( ), 恒괘( ), 旣濟괘( ), 咸괘( )에서 볼 수 있다. 그 밖에 萃괘 ( )에서 우리는 만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원리를 볼 수 있다. 만물이 서로 모이는 까닭은 ‘순종하고 기뻐함’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서의 만물이라는 용어는 萬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모이면 어지러워지고, 사물이 모이면 다툼이 일어나고, 일이 모이면 문란하여진다. 그럼에도 만물이 모이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순리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복종과 기쁨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상호감응을 통하여 그 정이 같음을 확인할 수 있고, 모이면 그 정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모이지 않으면 그 정이 같음을 확인할 길이 없고, 만나 감응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그 정이 통함을 알 수가 없다. “천지가 비록 어긋나지만 그 하는 일은 같고, 남녀가 비록 어긋나지만 그 뜻은 서로 통하며, 만물이 서로 어긋나지만 그 하는 일은 비슷하다.”(규괘단사) “세상의 일은 같은 곳으로 귀결되면서도 길은 다른다.”(繁辭傳) 이로 보면 ?주역?은 현상적 차이의 배후에 있는 만물 상호간의 감응과 소통, 만남과 관계의 항구성,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모임 등의 원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는 나란히 있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만물이 함께 자라되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15) ?중용?의 이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바로 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로 어긋나지 않고 서로 해치지 않는’ 역의 자연관은 한마디로 廣大和諧라고 불린다.16) 천지와 만물의 광대한 조화의 이념을 송대의 理學者들은 仁에 대한 역학적 해석을 통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즉 주돈이의 ?通書?, 장재의 ?正蒙?, 정호의 ?識仁篇? 그리고 주희의 ?仁說?등의 저작은 모두 전통적 유가 덕목인 仁과 誠등을 우주론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들이다.
誠이 乾元이라고 함, 사람 섬김을 통하여 하늘 섬김에 이름, 仁을 나와 만물을 일체화하는 氣의 개념으로 이해함, 仁을 천지의 生氣로 규정함 등이 바로 그것이다. ‘천지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생성력이다.’라거나 천지의 덕을 각각 건순 이간으로 규정하여 양자의 교감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덕성론적 우주론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17) 또한 천지 건곤을 부모라고 하고 만물을 그 자식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도 일종의 宇宙類比적인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18) 이러한 사상은 한대의 천인상응설 속에, 그리고 송대의 仁개념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정호는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仁을 알아야 한다. 仁은 천지만물을 한몸으로 한다. ……천지의 작용은 모두 나의 작용이다. …仁이란 천지만물을 한몸으로 여기는 것이니, 따라서 나 아닌것이 없다. 모두가 나의 몸이니 어느 곳인들 가지 못하랴”(識仁篇)라고 하였고, 주희는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그 理는 천지의 理요, 그 氣는 천지의 氣이기 때문이다. 理는 자취가 없어 보기 어렵다. 그러므 氣에서 理를 본다. 仁은 하나의 渾然 溫和한 氣이다.
그 氣는 天地 陽春의 氣요, 그 理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다.”19)라고 하였다. 정호와 주희는 다같이 仁을 氣 또는 生氣의 개념을 빌어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氣는 이미 이전의 한낱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사회적 가치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주론차원의 가치이다.
자연의 생성활동이 仁에 의하여 설명됨으로써 인간은 천인합일의 이상을 자신의 마음 안에서 몸 안에서 이룰 수가 있게 되었고, 이른바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易傳의 생명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유가에 의하여 인을 통한 우주유기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디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이웃과 국가와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확충하여 나아갈 것을 강조한 것은 맹자인데, 송대의 이학자들은 이러한 인사상을 천지의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환원시키고 인간과 만물이 일체가 되는 경지로 이해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덕성의 차원에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철학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Ⅳ. 洗心의 哲學-자연과 인간존재에 대한 ‘敬’
?주역?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간의 심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른바 두려움, 근신, 삼가함, 그리고 믿음이다. 척苦 懼 有孚로 표현되는 마음의 자세는 후일 경의 심법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경의 심법의 정화를 주희와 퇴계에게서 본다. 역의 본령이 점을 치는 것이었다는 데서 우리는 우선 占者의 경건성을 읽을 수 있다. 초기 점의 형태에서 특히 갑골문자를 통하여 우리는 점을 하는 사람이 상제에게 묻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상제에게 물을 때의 자세가 바로 경건이요, 두려움이다. 그런데 후일 상제는 외재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것, 인간의 본성 자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심법의 차원에서 점이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주역?을 洗心經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전통적으로 길흉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귀신의 문제도 상제의식의 약화와 더불어 자연법칙적인 존재 또는 자연의 힘으로 이해되어 갔다.20) 특히 송대의 역학은 鬼神論을 통하여 천지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理學者들은 전통적 의미의 귀신관에서 벗어나 귀신을 자연세계의 법칙으로 또한 德性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귀와 신을 聚散, 屈伸, 昇降작용으로 보는 일면 神明의 존재론적 차원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마음은 神明이 사는 집이며, 이 신명의 집을 깨끗이 하는 일이 바로 ?주역?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규정한다. 그
래서 이들은 ?주역?을 ?洗心經?으로 부른다. ?주역?은 이렇게 하여 유가적 지성들에게 있어서 점치는 책에서 덕을 쌓는(成德)책, 윤리적 수양의 도구로 그 인식의 내용이 바뀌어 갔다. 귀신에 대한 자연철학적 이해와 덕성론적 이해는 상치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역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귀결점은 바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이치’(天人一理)이기 때문이다. 신을 자연의 힘인 동시에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대자연과 인간을 궁극적으로 일체화하는 關鍵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을 한낱 왜소한 개별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우주적 존재로 승화시키며 자기 聖化의 책무를 스스로 지게한다. 神은 자연의 근원 생명인 동시에 인간됨의 극치이다.
퇴계는 18세에 성리대전의 첫권과 마지막권을 읽었으며 20세되던 해에는 ?주역?에 몰두하였는데 이때의 주역공부가 그의 일생 병약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23세 이후에는 늘 ?心經?을 가까이 하고 이를 신명처럼 여기며 공부하였다고 하며, 57세때는 20세 이후로 온축하여온 주역공부를 바탕으로 하여 ?역학계몽전의?를 지었다. 우리는 퇴계의 학문에서 그의 천명도를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가 기고봉과 학술논쟁을 펼칠 때의 주제가 사단과 칠정의 발원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이른바 ‘理에서 발한다.’(發於理) ‘기에서 발한다.’(發於氣)의 문제는 그가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후 사상계에서 호발설과 일도설의 논쟁이 학파간의 논쟁으로 전개되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의 천명사상의 일단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른바 천명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퇴계의 천명사상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퇴계가 수정한 천명도에 나오는 주제들을 보기로 하자. 천명도에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나온다. 12간지, 음양의 소장, 오행, 원형이정, 천리, 명, 기, 두언족방 등등이다. 천명이란 용어를 정치한 철학의 개념으로 화하게 한 단초는 물론 ?중용?의 ‘天命之謂性’의 귀절이다. 여기서 천명은 性과 道와 敎로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천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항시 등장한다. 옛사람은 천명을 알거나 듣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편을 동원하였다.
일관을 시켜 천문을 살피기도 하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주로 제왕가의 경우였고 일반인의 경우는 주로 점에 의존하였다. 왜냐하면 점은 바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그 명령을 듣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을 請命 또는 廳命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학사에서 보듯이 이 점에 의한 請命, 또는 廳命은 일회적이고 또 몹시 번거로운 폐단이 있다. 실존적 인간은 항상 어떤 선택과 결단의 도전 속에 있으므로 일회적인 점에 의한 청명으로는 아무래도 아쉽고, 따라서 이 점은 대사에 큰 의문이 있는 경우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점치는 검과 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없으며 실존적 차원에서 항시 천명을 들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그것이 바로 덕의 수양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신은 천지의 신명이었으나 마음은 인간의 신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신명과 천지의 신명은 본디 하나로 본다. 따라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천지의 신명이 내리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문제는 내 마음의 신명이 올바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의 신명이 올바른 상태에 있기 위하여는 마음이 깨끗하여야 한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洗心을 말하는 것이다. 퇴계의 철학의 핵심은 흔히 그 윤리성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표현보다는 그의 철학이 도덕철학이라고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마음의 바른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데 있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대월상제, 즉 상제를 대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를 우리는 그의 ?성학십도?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역학은 이와 같이 궁리의 학문이자 거경의 학문이다. 辨物이 窮理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洗心은 거경에 해당한다. 그리고 궁극의 목표가 命이라고 표현되는 우주의 최고 원리, 절대자의 명령에 따라 사는데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퇴계는 학문의 시종이 되는 것은 ‘敬’이라고 하였다. 그는 경의 자세는 ‘주체적 사고와 타인으로부터의 학습을 겸하고 (兼思學), 움직일 때와 정지하여 있을 때를 일관하고 (貫動靜), 안과 밖을 합하고 (合內外), 드러난 세계와 은미한 세계를 하나로 하는 (一顯微)’ 도리하고 하였다. 우리는 경험적 세계, 동적인 현상세계, 내면의 심성세계 등 드러나지 않은 세계와 그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에도 관심을 지녀야 한다. 경은 바로 이러한 세계까지를 포괄하는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지닐 자세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궁리와 진성, 그리고 지명으로 이어지는 역학의 본령이기도 하다.
주희와 퇴계가 말한 경은 본디 意志공부였다. 그러나 궁리와 거경이 별도의 공부가 아니고 모든 궁리의 공부에 거경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이요, 거경에 궁리가 그 내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유자의 학문, 그들의 궁리의 대상이 기존의 유교경전만을 절대시하여 그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을 모두 그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자연세계까지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하물며 이전에 비하여 자연세계에 그리고 인간관계의 영역에 포함될 일이 많아진 요즈음 우리가 보다 더 신중하게 이 영역에 경의 자세를 지니고 임하여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기존의 유교경전에 관한 연구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에 부딪히는 여러 사건 사물과 자연현상까지를 포괄하는 만큼 그는 자연세계에 대하여서도 경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세계에 대하여 탐구하여야 할 필요성과 과제가 이전에 비하여 증폭된 오늘날 이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와 노력에서 경의 자세를 보다 강조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논의한 것을 정리하여 본다.
역학의 본령은 천지의 도, 만물의 정을 밝히는데 있다. 역학에서의 천지는 공간적으로 무한 광대하고 시간적으로 항구한다. 끊임없는 생성력을 지닌 천지 자연은 전체가 하나의 생기의 덩어리이다. 이 생명체로서의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를 창출한다.
그리고 이 변화에는 어떤 법칙이 있고 이 변화의 법칙 안에 시간의식의 근거가 있다. 만물은 언제나 광대한 화해속에 존재한다. 역학은 대립자들끼리의 화해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화해가 만물의 본모습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만물은 함께 자라며 해치지 않고 어긋나지 않는, 그러면서 참으로 크고 오래 가는 어우러짐의 관계이다.
인간과 자연의 장벽을 허물어주는 개념이 주역의 귀신이다. 귀신은 자연의 힘이요, 동시에 인간의 신명이다. 역학의 귀신은 물질세계의 장벽을 넘어서는 통로를 제공한다. 더불어 인간과 자연이 근원적으로 다름없는 존재임을 설명하는 틀이다. 역학은 우리에게 자연에 대하여 공포가 아닌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마음, 경건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역학에서의 자연은 하나의 큰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것이며, 무궁한 변화의 현장이며, 거기에는 광대한 조화의 모습과 그 실현의 과정이 있고, 모든 존재의 대연속이라는 이념적 지향이 있다. 그리고 역학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연’이라거나 ‘인간의 이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연법칙의 탐구’라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자체인 인간, 자연의 법칙안에 있는 인간의 측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삶의 공간인 동시에 노동의 대상인 자연을 양자의 괴리가 아닌 일체화 의식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 역학의 자연관이다. 서산 진씨의 “역과 천지와 성인은 하나이다.”(易天地聖人一也)라는 짧은 말속에 이상의 논의를 압축하고 있다. 퇴계선생의 학문의 발단은 바로 천명도설이다. 유학사는 天命의 개념 변천사이기도 하다.
천명을 어떻게 듣는가, 천명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천명을 어떻게 실천하는가가 곧 퇴계선생의 학문적 내용이다. 퇴계선생에게 있어서도 천명은 여전히 지존한 하늘의 명령이요, 인간 각 개인의 존재 근거이다. 이는 때로는 상제의 명령으로 인격의 옷을 입고 나타나고, 또 때로는 인간의 본성으로 변하여 마음과 정으로 나타나서 氣發理乘과 理發氣隨의 분석을 요구한다.
또 때로는 의리로 나타나고 物理 事理로 나타나기도 하여, 격물치지를 필요로 하고 理到說을 제창하게 하여 나의 격물이 미진함이 있을까를 염려할 일이요, 理가 내 마음에 이르지 못할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실존적 일상생활은 언제나 ‘對越上帝’였다. 무엇보다도 퇴계는 洗心의 ‘敬’ 공부로써 이 천명을 놓치지 않으려하고, 오해하지 않으려하고, 그릇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에게 있어서 敬은 天命을 올바르게 듣는 것, 그리고 이를 秋毫의 착오없이 실천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있지 않다. 그의 敬工夫는 마치 점을 치는 순간의 경건성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출처] naver blog ~ 존재와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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