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불교설화(佛敎說話)◑ 보덕굴 보덕 각시와 회정대사

강나루터 2017. 12. 25. 07:51

 

 

    보덕굴 보덕 각시와 회정대사

     

    보덕굴은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 법기봉 중턱 만폭동에 있는 절이다. 627년에 보덕이 수도하기 위하여 자연굴을 이용해 절을 창건했다.

    그 뒤 보덕의 후신인 회정대사가 중창하였다.

    1540년에는 조선조 왕실에서 이 절을 중수하였으며, 1808년에 율봉이 다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깎아지른 벼랑의 돌출 부분 위에서 쇠사슬을 아래로 내려 그 밑을 쇠기둥으로 버티게 해서 지은 절이다.

    그 쇠기둥 위에 판자를 얹었고 판자의 다른 부분을 쇠사슬로 엮어 바위에 기대게 하였다. 본전인 관음전에 들어서면 마루가 흔들리는데 그 밑으로 천길 낭떠러지가 내려다 보인다.

    그것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관음상을 봉안한 관음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암벽의 서쪽을 파서 뚫은 인공굴인데 백색의 관음상을 모셨다. 이 관음상은 금강산 내에서는 가장 영험있는 보살상으로 유명하다. 또 굴의 입구를 덮은 지붕 용마루에는 탑을 안치하였는데 지금은 기단부가 없어지고 상륜부 일부와 2층탑신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희귀한 양식으로 탑의 조각에는 본생담이 1편 음각되어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독특성이 있다.

    회정대사가 이 절을 중창한 데는 기막힌 설화가 전해 내려 온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송라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다. 이 암자에 회정스님이란 분이 주석하면서 기도에 전념했다. 회정은 하루에 4분정근으로 새벽과 오전과 오후와 저녁 네 때에 걸쳐 관음기도를 봉행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원을 세웠다.

    회정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대략 1080년경에 태어나 1150년경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니까 회정이 보덕굴을 중수한 것은 그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을 때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기도했다. 겨울은 추웠지만 여름은 아무리 무더운 삼복 때라도 금강산은 항상 시원했다. 세계 제일의 명산인만큼 빼어난 기암괴석과 수려한 산수, 자연경관이 주는 환희로움에 저절로 기도가 되는 곳이었다.

    회정은 거의 3년이 걸리는 천일기도를 봉행하면서 매일같이 천수대비주를 3백 번씩 봉독했다. 대비주 3백 번의 봉독이라면 적어도 15시간은 걸리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회정은 매일 15시간씩 기도를 한 셈이다.

    "관세음보살님, 관음진신을 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견성하여 성불하려면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해야 가능하다고 하옵기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그는 천일기도를 회향했다. 그리고 30만 독의 천수대비주를 봉독하였다.

    실로 엄청난 시간을 기도정진에 투자했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지친 몸을 쉬고 있던 중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어떤 여인을 만났다.

    환갑을 넘었을 성싶은 품위 있는 여인이었다.

     "회정스님, 스님이 가장 소원하는 게 무엇이오?" 회정이 대답했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하는 것입니다.

     제 소원은 오로지 그것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하시지요." "어떻게 말이옵니까?"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의 해명곡으로 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몰골옹이고 또 한 사람은 해명방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여인으로 보덕 각시라는 낭자일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우선 몰골옹을 찾아뵙고 다음에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관음진신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뵙게 될 것입니다. 어서 떠나시지요." 말을 마치고 문득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회정이 놀라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선명하여 그는 꿈에 들은 대로 행선지와 만날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기록했다.

    그는 바랑을 챙겼다. 발우와 가사,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넣고 송라암을 떠나 양구군을 찾았다.

     회정은 양구군에 들어가 다시 방산면을 물었다. 사람들은 쉽게 가르쳐 주었다. 방산면에 도착하여 그 마을 사람들에게 해명곡을 물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지나가던 촌로가 멈취서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아마 초행이신가 보지요? 어디를 찾으시는데요?" "예, 해명곡이란 골짜기를 찾습니다." "해명곡이라! 굉장히 깊은 산골인데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혼자서 가시는 것은 아무래도 좀 위험한데요." "워낙 산중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이력이 나서 혼자서도 잘 다닙니다.

    가르쳐만 주십시오, 처사님." 촌로는 손을 들어 해명곡이 있다는 곳을 가리켰다. 먼 데서 봐도 엄청난 산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금강산이었는데 구름이 산허리를 감돌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촌로는 걱정이 되는지 회정에게 말했다.

     "아무리 스님이시기로, 거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데다 산짐승들이 대낮에도 활보하는 엄청난 산골입니다.

     그리고 예비 식량이 넉넉하신가 모르겠네요."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습니까? 나는 수도자니 부처님이 돌보아 주시겠지요." "듣고 보니 스님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하여간 이 길로 곧장 가십시오." 회정은 길을 재촉했다.

     아침에 송라암을 출발했는데 벌써 석양이 산마루에 걸리고 있었다.

     이제 금방 어두워질 것이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그 깊은 산중에 오막살이 한 채가 오똑하니 앉아 있었다. 이미 땅거미가 어둠 속을 스멀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회정의 볼을 간지럽혔다.

     "계십니까? 객 문안입니다." 집 뒤편에서 웬 노인 한 분이 꾸부정하니 허리를 굽히고 나오며 물었다.

     "뉘신데 이 밤에 오셨습니까?" "예, 금강산 송라암에서 기도하던 회정이라는 중입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갔으면 합니다만 가능하시겠는지요?" "방이 한 칸밖에 없어서 그렇소만, 이 늙은이 하고 같이 잘 용의만 있으시다면 그렇게 하시구려. 자, 어서 들어갑시다. 방이 워낙 누추해 놔서..." 노인은 회정의 등을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군불을 지폈는지 방바닥이 따스했다.

     매캐한 연기도 방안을 수런거렸다.

    노인이 말을 걸었다. "그래, 어쩌다 예까지 오셨소? 그리고 어디로 가시는 스님이시오?" 회정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송라암에서 천일기도를 봉행한일이며,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싶다는 말이며, 꿈속에서 어떤 귀부인이 해명곡의 몰골옹과 해명방을 찾아가라고 한 말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몰골옹이라! 내가 바로 몰골옹이올시다." 회정은 노인이 그가 찾던 분 가운데 한 분인 몰골옹이라는데 깜짝 놀랐다. "아, 그러하십니까? 초면에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회정은 일어서서 큰절을 올렸다. 노인이 맞절로 받았다.

     노인의 허연 머리카락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은 아름답긴 했으나 노인의 풍채를 오히려 이상하게 만들었다. 왜소한 키와 땟국이 줄줄 흐르는 옷, 얼굴에 얼룩진 콧물과 눈꼽 때문이었다.

    다만 흰 머리카락과 허연 수염만이 자랑할 만할 뿐, 어디 하나 존경할 만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머리카락과 수염도 불결해 보였다. 노인은 회정의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말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시로써 노래하신 것이 있지요. 만약 외모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닦는 자 마침내 여래는 보지 못하리. 그런데도 요즈음 사람들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회정은 뜨끔했다. 뭔가를 훔쳐 먹다 들킨 기분이었다.

     회정은 잠자코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노인이었다. 도저히 곱게 보아지지가 않았다.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싶다고 했소?" 느닷없이 물어오는 노인의 말에 회정은 정신이 퍼득 들었다. 그는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장. 노인장께서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싶습니다."

    회정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공손하게 말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겼다.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면 나와 해명방을 찾으라고 했지요? 그 부인이 가르쳐 주긴 바로 가르쳐 주었구먼, 그나저나 해명방을 만나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오두막 맞은편 산을 넘어가야 하오, 하여간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쉬고 내일 가도록 하시구려. 아, 참! 회정스님이라고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회정입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스님께서는 아직 저녁공양 전이시겠구려?" 회정은 노인의 물음이 너무나 반가웠다.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던 말을 노인이 물어 주니 다행이다 싶었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아직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송라암을 떠난 뒤로는요. 뭐 먹을 것이 좀 있을런지요. 있으면 제가 손수 찾아 먹겠습니다."

     "아이구, 손님이신데. 내가 찾아올 테니 가만히 계십시요." 노인이 부엌으로 나가고 회정이 혼자 방에 남았다.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어둠침침한 등잔불이 방안을 더욱 칙칙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바퀴벌레나 거미가 기어나올 것 같았다.

    잠시 있으려니 노인이 도토리묵을 깨진 바가지에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손때와 세월의 이끼로 실밥이 이미 새까맣게 되어버린 그런 바가지였다.

    배는 고프면서도 막상 달려들어 먹고 싶지가 않았다. 회정이 멍하니 앉아 있으니 노인이 도토리묵 바가지를 들며 말했다. "저녁을 자신 게로군. 그럼 내일 아침에 드시도록 하시오."

     "아, 아닙니다. 몰골옹 어른. 아주 맛있어 뵈는데요. 지금 먹겠습니다." 도토리묵을 입에 넣어 보니 바가지보다 도토리묵 맛이었다. 참으로 향굿한 음식이었다. 회정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도토리묵 한 바가지를 뚝딱 먹어치웠다. 회정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주무시지요." 회정은 잠자리에 누웠다. 지친 몸이어서 금방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았다. 몰골옹은 벌써 일어났는지, 밖에서 군불을 지피고 도토리묵을 만들고 있었다. 부엌 뒷꼍에 보니 패다만 장작이 있었다.

     "어디 한 번 몸이나 풀어 볼까." 회정은 저고리를 벗고는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삼십대 초반의 건장함을 노인 앞에서 뽐내보고도 싶었다. 그가 송라암에서 해온 솜씨대로 도끼날이 모탕에 떨어지는 순간 이미 장작은 두 조각으로 튕겨져 나갔다. 특히 굴참나무는 도끼발을 잘 받았다.

    "어휴, 젊은 스님이 장작을 패시는구려. 이제 그만 들어와 공양이나 하오." 언제 왔는지 노인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다 놓고 식사하라고 했다.

    회정은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친 후 상 앞에 앉았다.

    식단이라곤 여전히 도토리묵에 간장을 얹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땀을 흘린 탓인지 맛이 좋았다. 몰골옹이 다짐하듯 물었다. "해명방을 찾으신다 했수?" 노인의 물음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해명방을 찾으려거든 저기 보이는 앞산을 넘어 한 십 리쯤 가면 또 하나의 깊은 골짜기가 있을 것이오. 거기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조금만 들어가면 조그마한 초막이 있소. 거기에 해명방이 살고 있소." 회정은 아침 공양을 끝내고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앞산을 넘었다.

    금강산은 천하의 절승이었다.

    바위의 생김새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보였다. 곰처럼 생겼다 하고 보면 영락없는 곰이고, 사자처럼 생겼다 하고 보면 틀림없이 사자처럼 보였으며, 두루미처럼 생겼다 하고 보면 그것은 분명 두루미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같은 바위를 놓고도 어떻게 생각하고 보느냐에 따라 바위는 곰도 되고 사자도 되고 두루미도 되었다. 금강산의 기암들이 모두 그랬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금강산은 풍악산에서 개골산으로 점점 탈을 바꾸고 있었다.

    풍악산은 단풍이 들어 온 산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라면 개골산은 단풍이 지고 기암괴석이 그 본래의 형태를 드러낼 것이었다. 어떤 모습이든 금강산은 이래저래 좋은 산이요 아름다운 산이었다.

     금강산 들어갔네 금강산일세 삼불동 들어가니 완연한 삼불바위 합장한 듯 세웠는가. 좋고 좋고 좋은 경치 이 아니 극락인가. 사해팔계 벗님네야 극락세계 구경하소. 적선하면 극락이요 유죄하면 지옥이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숲 사이로 초막이 한 채 아스라이 보였다.

    집 뒤 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층을 이루어 띠를 두르고 있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 개울물이 제법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회정은 멈춰서서 길 아래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다가 문득 타령 한 수를 중얼거렸다.

    천하 명산 어디메뇨. 천하 명산 구경갈 제 동해 끼고 솟은 산이 일만 이천 봉오리가 구름같이 버렸으니(벌려섰으니) 금강산이 분명코나. 장안사를 구경하고 명경대에 다리 쉬어 마군대를 올라가니 마의 태자 어디 갔노. 바위 위에 얽힌 꿈은 추모하는 누흔뿐이로다... 봄은 봉래산이요 여름은 금상산이며 가을은 풍악산이요 겨울은 개골산이라 하여 봉래산과 풍악산을 제일로 친다지만 회정의 눈에는 금강산도 좋고 개골산도 좋은 듯싶었다.

     "계십니까? 주인장 계십니까?" 초막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녀린 여인의 음성이었다. "뉘시온지요?" "금강산 송라암에서 온 회정이라 하는 운수올시다. 여기가 해명방 어른 댁이 맞습니까?" 그제서야 문이 열리며 묘령의 낭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정은 그녀를 보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렇습니다만 어인 일인지요?" 회정은 여인에게 도취되어 여인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 예? 방금 뭐라 하셨는지요?" "여기가 해명방 어른 댁이 맞습니다. 한데 지금은 산에 땔나무를 구하러 가시고 안 계시는데요. 이를 어쩌지요?" 회정은 겨우 정신을 차였다.

    "아! 괜찮습니다. 기다리지요, 뭐." 회정은 봉당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우뚝 솟은 봉우리 위로 흰 구름 한 떼가 머물러 있었다. 여인이 뒤에서 말했다.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봉당에 앉아 계시니 제가 괜스레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해명방 어른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이십니까? 그리고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 어른은 소녀의 아버지시고요, 아마 점심때쯤이면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저의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시기로 소문난 분입니다.

    천성은 한없이 착하시지만 일단 화가 나셨다 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저의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더라도 절대로 대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격이 급하다는 말에 회정은 퍼득 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난폭하십니까?" "난폭이라! 그렇지요. 난폭한 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인내하고 복종하셔야 합니다.

     잘 알아들으셨죠?"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낭자는 실례지만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낭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여자가 무슨 이름이 더 있겠습니까?" "여자라고 이름이 없을 수는 없지요. 시집이라도 가고 나면 남편을 따라 이름이 없어진다고 하겠지만 아직 미혼이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보덕이라 지어주셔서 남들은 보덕 각시라 부르고 있습니다." 얘기를 하는 도중 회정은 보덕 낭자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상기하면서 물었다.

     "보덕 낭자께서는 방금 전에 제게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제 목적이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데 있음을 아셨습니까? 행여 낭자께서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타심통을 얻으셨습니까? 이를테면 독심술 같은 거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아니 나는 그냥 해본 말인데...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스님." 회정이 보덕 낭자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던 초막하고는 전혀 달랐다. 너무나 깨끗했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몰골옹의 집과는 정반대였다. "역시 아름다운 여인이 계시는 집이라 다르군요. 참 깨끗하게 해놓고 사십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집안 살림은 여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을 하고 나서 회정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자 앞에서 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보덕 낭자께서는 이곳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하도 산세가 좋아서 말입니다." "네, 제가 태어난 곳도 이곳이요, 자란 곳도 여깁니다.

    아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저는 별로 좋은 줄 모르겠는데 그렇게 이곳이 좋으세요? 스님께서 계시던 송라암도 금강산에 있지 않습니까?"

    그때였다.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나뭇짐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나 봐요." 말을 마치자 그녀가 먼저 달려나갔고 회정도 엉거주춤 일어나 방문을 나서려는데 낭자의 아버지인듯한 노인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젊은 처녀가 혼자 있는 방에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이냐? 오라! 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남의 딸을 넘보려는 중놈이 분명하렷다?" 노인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나이는 흰 머리가 절반쯤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순 이쪽저쪽이었다.

     "나오너라, 이놈. 당장 혼쭐을 내주겠다.

     이 망할 자식아." 노인은 헛간에 있는 지게 작대기를 움켜 쥐었다. 비록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그의 체력은 젊은 사람 대여섯은 당하고 남을 만큼 왕성해 보였고 체격도 일곱 자는 되어 보였다.

     새치가 약간 있는 구레나룻이 노인을 더욱 험상궂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회정이 마당으로 나서며 변명을 하려는 찰나였다. 노인이 잡고 있던 작대기로 회정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회정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마당에 뒹굴었다.

    그런데도 노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고 옆구리고 다리고 가릴 것 없이 작대기로 보리타작하듯 패대는 것이었다.

    회정은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물벼락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회정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내하고 복종해야 한다던 보덕 낭자의 말을 생각했다. 노인이 소리쳤다.

     "이놈! 썩 나가거라." 회정은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노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뭣이 어쩌고 어째?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그래 이놈! 무엇을 잘못하기는 했나 보구나. 잘못이 없는 놈이라면 잘못했다는 말도 용서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노옴!" 보덕 각시가 옆에서 보다가 말렸다.

     "아버지, 이 스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제게 있어요. 제가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아,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할 수 있어야지요.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고 해서..." 노인은 보덕 각시의 얘기를 듣고 나서 성미가 약간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너는 어느 절에 사는 작잔데 나를 찾아왔느냐? 용건이 무엇이냐?" 보덕 각시가 계속 거들었다.

    "예, 아버지. 이 스님은 금강산 장안사 아래 송라암에서 천일관음기도를 봉행한 뒤 꿈에 어떤 귀부인을 만나 이곳으로 해명방 어른, 즉 아버지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왔다 합니다.

    이미 몰골옹 어른을 뵙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천일관음기도를 하고 관음진신을 친견하겠다? 옛다 이놈! 관음진신 친견하기가 그리 쉬울 것 같으면 세상에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만일기도라면 또 모르지만... 여러 말 필요 없다.

    송라암이든 어디든 가서 만일기도를 하고 오든지 말든지 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명방은 다시 몽둥이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회정도 작정한 바를 관철시키기 위한 고집이 있었다.

    발길로 차고 주먹과 몽둥이로 때리고 온갖 행동을 다했지만 회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노인이 힘이 빠졌는지 조금 수그러졌다. 회정이 해명방 앞으로 조금 다가서며 말했다.

     "소승 업장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해명방 어른께서 저의 두터운 업장의 구름을 걷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해명방이 껄껄 웃으며 시로써 노래하였다. 만일 누가 부처님의 경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라. 망상과 온갖 갈등을 멀리 여의고 그 마음 언제나 걸림이 없게 하라. 해명방의 노래를 들으며 회정은 환희에 젖어 들었다.

    그때였다. "여보게 회정, 자네가 만일 관음진신을 친견코자 한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 조건만 수락한다면 관음진신을 친견하기란 어렵지 않네." 해명방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조건이란 말에 회정은 귀가 번쩍 띄었다.

     '도대체 저 어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언제는 길길이 뛰고 야단이더니, 어떻게 저렇게 차분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바뀔 수 있지?' "무슨 조건이신지요? 관음진신을 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건이라도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내 딸 보덕과 혼인을 해야 되네. 우리 보덕과 말일세." '그러면 그렇지. 어째 부드럽게 나간다 했더니.' "하지만 소승은 출가한 몸, 어찌 계를 파하고 혼인할 수 있갰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이노옴!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때 보덕 각시가 해명방 옆에 있다가 회정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무슨 말이든 다 수용하라는 뜻이었다.

    회정은 갈등을 느꼈다. 절에 산 지 거의 20년이 가까워 오면서 아직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보지 않은 그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자신에게 장가를 들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에 관음진신을 친견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건이라도 다 수용하겠다고 했었다. (어떠한)이라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한편 생각했다. 진리란 출세간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세간과 출세간을 넘나들며 어디나 존재하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해명방의 비위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성한 몸으로 나가기는 힘들 것이었다.

     만일 몸이 없다면 제아무리 좋은 불법이라도 소용이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좋습니다. 해명방 어른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너는 이런 말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러면서 해명방은 시로 노래하였다. 불법이 세간에 있나니, 세간 떠나 깨달음 없네. 세간과 출세간이란 다만 이 마음에 있을 뿐 해명방은 회정에게 마당을 쓸게 했다.

    그리고 거적을 거기에 깔았다. 보덕 각시는 동이에 물을 길어왔다.

    두 사람은 물동이를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 갈라섰다. 해명방이 집사를 했다. "대자대비 부처님과 천지의 신명이시여, 오늘 신랑 회정군과 신부 보덕양은 부처님과 천지신명을 우러러 새로운 부부가 될 것을 고하나이다.

    이들 두 사람에게 행복과 사랑, 축복이 함께 하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신랑에게 묻노니 어떠한 경우라도 보덕을 아내로 맞아 사랑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겠느가?" "네." "신부에게 묻노니 보덕은 회정을 남편으로 맞아 어떠한 경우라도 고락을 함께 하겠느냐?" "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생각보다 달콤한 신혼생활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보덕 각시는 성불구자였다. 이름만 부부일 뿐 실제로 부부생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정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불행이기도 했고 다행이기도 했다.

    부부로서의 참맛을 모르니 불행이었고 계를 파하지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해명방 어른이 나를 윽박질러 자기 딸을 맡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못된 늙은이 같으니라구,' 하지만 부부생할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덕 각시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그는 젊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보덕이 성불구자인 줄 알지 못했을 때는 그토록 그의 손목을 잡고 싶었는데, 막상 그녀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나니, 마치 내시를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징그러운 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해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그 느낌을 도저히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장인인 해명방을 따라 땔나무를 해다 팔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나무를 팔아 먹을 양식을 사고 입고 쓸 옷과 일용품을 사오기도 했다. 회정은 그러한 단조로운 삶에 서서히 귄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틈만 나면 해명방에게 물었다. "장인 어른, 관음진신은 언제쯤이면 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해명방의 대답은 똑같았다.

     "관음진신의 친견? 거 좋지. 헌데, 그런 성현을 친견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닐세. 적어도 10년은 나와 함께 지내야 할 거야." 그렇게 묻고 답하기 3년이 지났지만 3년 전이나 3년 뒤나 대답은 항상 10년이었다. 견디다 못한 회정이 하루는 다짜고짜 말했다. "해명방 어른, 아니 장인 어른. 장인 어른께서는 제 물음에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관음진신을 친견하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놓아 주십시오. 답답해 미칠 것만 같습니다. 장인 어른, 그리고 보덕 각시가 어디 여자입니까? 여자 구실이나 제대로 하는 여자냐구요. 세상에, 딸 시집 못 보낼까봐 저를 강제로 협박하여 사위로 삼아 놓고 제 소원은 본 체 만 체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원, 통 재미가 있어야지." 해멍방은 느닷없는 회정의 공격에도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너를 묶었더냐? 놓아 달라느니, 답답하다느니 하게. 그리고 내 딸 보덕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느냐? 그렇게 불평과 불만이 많으면 너 좋은 대로 하면 될 게 아니겠느냐? 이놈아, 인생을 어찌 재미로만 사느냐? 고얀 놈 같으니라고." "장인 어른, 그럼 저는 이만 장인 어른 곁을 떠나겠습니다.

    송라암도 그립고 옛날 중 노릇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허! 이놈, 중 노릇이 뭐 별거더냐? 하기야 별것이라면 별것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놈의 몰골옹인가 보현인가 하는 늙은이를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구먼, 공연히 참한 젊은이를 가라 마라 해서 번거롭게 하다니." 회정은 그러나 해명방의 이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해명방의 (몰골옹인가 보현인가 하는 늙은이) 란 말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회정은 바랑을 챙기고 속복을 벗었다. 그리고 승복으로 갈아 입었다. 하긴 승복이 속복이었고 속복이 승복이었다. 재단이 똑같은 승복과 속복은 색깔만 다를 뿐이었다.

    그는 다시 제 손으로 머리를 깎았다. 곁에서 보덕 각시가 거들어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작별을 고한 회정은 다시 산을 넘어 몰골옹이 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3년 만에 다시 보는 옛 길이 정겹게 느껴졌다.

    몰골옹 노인이 있는 곳에 이르니 노인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더 늙어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회춘이 되지도 않았다. 몰골옹을 보자 그 옛날 도토리묵을 손수 끓여다 주던 일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았다. 몰골옹은 신을 삼고 있었다. "몰골옹 어른,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소승 회정이라고 합니다. 한 3년 전쯤 어른께 하룻밤 신세를 졌던 사람입니다.

    저를 알아보실 수 있으십니까?" 몰골옹이 대답했다. "알아보다마다, 기억이 생생한 걸." "그러십니까?" "그래 해명방 어른은 뵈었으며, 보덕 각시는 만났는가. 아! 그리고 관음진신은 친견하였는가?" 회정은 3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대충 얘기했다.

    한참 회정의 말을 듣던 몰골옹이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자네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네." "그게 무슨 말슴이십니까?" "그 해명방 어른이 곧 문수보살이요. 보덕 각시가 관음진신인데..."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는 3년 동안이나 보덕 각시와 자리를 함께 하면서도 그녀가 관음진신인 줄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그 해명방 어른이 문수보살의 화현이란 걸 모르고 지냈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자네를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쯧쯧." 회정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럼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나는 보현보살의 화신이지. 문수와 관음에게 길을 인도한 보현보살이야." 회정은 보현보살이라는 말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와 문수보살의 진신인 해명방의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회정은 몰골옹에게 삼 배를 드리고 즉시 돌아섰다. 보덕과 해명방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몇 걸음 가다가 몰골옹이 '나는 보현보살의 화신이지'라고 한 말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던 몰골옹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초막도 보이지 않았다. 회정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참으로 나는 박복한 중생이구나. 보현보살이 (나는 보현보살의 화신이다) 라고 한 말을 듣고도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아! 어리석은 중생이여! 회정이여!' 회정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러다가는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와 문수보살이라던 해명방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달음에 해명방과 보덕 각시가 머물던 초막에 이르렀다. 그러나 거기에는 초막도 없고, 해명방과 보덕 각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덕 각시 곁을 떠난 지 불과 한 점(2시간)밖에 안 된 그런 짧은 순간이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더니 회정은 결국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꼴이 되었고 결국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하는 격이 되었다. 둘러보니 보덕 각시가 빨래하던 바위와 냇물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모탕에은 어제까지만 해도 패던 장작이 남아 있었다.

     푸른 하늘도 허허로히 회정을 비웃고 있었다. "보덕 각시, 보덕 각시이! 해명방 어른, 해명방 어르은!" 회정의 부르는 소리는 먼산까지 갔다가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메아리는 이처럼 되돌아오는데 그 두 부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문수와 관음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언뜻 언뜻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회정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천지간에 홀로 떨어진 그런 외로움이었다 사람이 정을 붙이고 살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외로움이구나 싶었다. 회정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 나는 죄업의 업장이 얼마나 두터우면 3년씩이나 관음진신을 데불고 문수보살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보현보살의 진신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으니, 이 어리석은 중생을 어이 제도할꼬?' 회정은 송라암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량을 말끔히 청소하고 다시 백일관음기도에 들어갔다. 어차피 내딛은 발걸음이니 끝장을 봐야 할 것이었다. 문수와 보현과 관음을 친견하고도 그들이 문수와 보현과 관음의 진신임을 깨닫지 못한 무지를 참회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재도전하여 관음진신을 친견키 위함이었다. 보현과 문수도 만나야 했다.

     인생은 항상 무지와 몽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인간을 중생의 범주 속에 넣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생이란 무명업장에 자성을 가리워 바로 보지 못하는 그러한 존재일진대, 인간은 분명코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런 것이다.

     재도전하는 백일기도는 철저하였다. 처음 송라암을 떠나기 전에는 천일기도를 봉행했지만 때로 피곤하면 잠자리에 들기도 했는데 이번의 백일기도는 정말이지 피나는 수행이었다. 이윽고 백일기도 회양이 점차 다가왔다.

    백일이 되는 새벽에도 그의 기도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렸는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또다시 지난번에 만났던 귀부인을 만났다.

    "이보시오, 회정스님. 어찌하여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셨소? 스님은 관음진신인 보덕 각시를 데불고 3년간이나 지냈으면서도 그녀가 관세음보살임을 알아보지 못했소. 문수보살과도 3년동안이나 함께 나무하고 장작을 패고 저자에를 다니고 했으면서도 해명방이 바로 문수보살의 진신임을 몰랐소. 게다가 내가 처음 일러준 몰골옹이 보현보살의 진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오. 내 이제 그대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다시 일러 주겠소. 오늘 낮 기도회양을 하는 즉시 만폭동으로 가시오. 거기서 보덕 각시, 즉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회정은 귀부인의 말을 듣고 물었다.

    "감사합니다. 하온데 당신...?" 회정이 고개를 들어 귀부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꿈을 깨고난 회정은 생각보다 선명한 꿈속의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회향기도를 앞당겨 봉행했다. 한낮이 조금 지나 만폭정에 이르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에 잠시 도취되어 있는데, 폭포 위 바위 위에 한 여인이 머리를 감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하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회정은 걸음을 빨리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분명 보덕 각시였다. 3년간이나 같이 살았던 여인을 몰라볼 리 없었다. 울컥 그리움이 솟구쳤다. "보덕 각시! 소승 회정이올시다." 여인이 회정의 음성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우유빛 고운 피부가 회정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회정은 저도 모르게 보덕 각시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이었다. 잡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신기루였다. 그것은 구름이었고 바람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찰나 사이에 사라져 버렸고 대신 그 자리에서 난데없는 오색찬란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새는 천친히 아주 천천히 날았다.

     회정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새가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쫓아갔다. 문득 새를 놓쳐 버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회정은 또 하나의 폭포 위에 허공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거기에 하얀 옷을 입은 보덕 각시가 서 있었다.

     그녀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놓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폭포수 아래서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회정은 절벽 위를 타고 올랐다. 그녀 가까이 갔을 때 그녀의 뒤로 자연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보덕 각시가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굴은 내부가 제법 넓었으며 거기에는 경상과 경책, 불기, 촛대, 향로 등이 놓여 있었다 회정이 물었다. "이 굴은 언제부터 있었으며 여기에 있는 이 기물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보덕 각시가 말했다. "바로 전생에 스님께서 쓰시던 유물입니다. 스님은 전생에는 보덕화상이라 일컬은 고승이었지요. 이제 여기서 수도정진을 하십시오.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온 데 간 데 없이 없어졌다.

     그 순간 회정은 크게 깨닫고 보니 보덕 각시만이 관음진신이 아니라 회정 자신도 바로 관세음의 진신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한 떨기 풀잎도 한 그루의 나무도 모두가 관음진신이었다. 보이는 모습은 모두가 관음의 자비로운 성상이었고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풀벌레소리 바람소리가 모두 관세음이 내는 묘음이었고 해조음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환희에 젖어 강종강종 뛰고 싶었다. 회정대사는 바위 위에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새겼다. 진신으로서의 관자재보살 보덕 각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기 머물다. 회정은 그 후 강화에 보문사를 창건하는 등 관음도량을 개설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회정의 1차 전생은 마랑이었고 2차 전생은 보덕이었다. 즉, 보덕에서 마랑으로 마랑에서 회정으로라는 연계적인 생의 순환을 거듭하였다. 그러면 우선 시대적으로 보아 빠른 시기가 되는 보덕을 살펴보도록 하자.

     

    보덕화상의 생몰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강 영양왕(590--617재위) 대에서 영류왕(618--641재위)을 거쳐 보장왕을 끝으로 멸망하기 전 완산주 고달산으로 자리를 옮겨 여생을 보낸 것으로 추정한다.

    보덕화상이 백제의 땅인 완산주로 옮긴 때는 650년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9년이었고 백제 의자왕10년이었다.

    보덕화상은 젊은 시절을 금강산의 보덕굴에서 보냈다. 그는 거기서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정진하다가 관음의 진신인 보덕 각시를 친견하게 되었다. 보덕화상은 보덕 각시를 한 번 본 뒤에 스스로의 호를 보덕이라 고치고 자신이 정진하던 천연동굴도 보덕굴이라 불렀다.

     보덕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보덕화상은 금강산을 떠나 평양의 반룡산 연복사로 자리를 옮겨 후학제접과 중생교화에 힘을 쓰니 그의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고구려 제27대 영류왕 때에 고구려는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으로부터 도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받아들인 지 불과 250년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다.

    그러나 불교가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고구려 국민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었는데, 다시 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자 불교계에서는 자연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보장왕은 도교의 독실한 신봉자로서 불교를 배척하고 도교를 숭상하는 숭도배불의 정책을 펴 나갔다.

     불교의 사원을 폐지하여 도교의 사원을 만들었고 도교의 도사들만을 우대하였으며 도교의 경전만을 강설토록 하였다.

    그때, 일본으로 건너간 고승들이 었었다. 그들은 혜자, 혜관, 승륭 등이었다. 이들의 행적도 그들이 사원을 압수당하자 국내에 발붙일 곳을 잃고 외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보덕화상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보장왕을 알현한 보덕화상이 말했다.

    "우리 고구려는, 제17대 소수림왕께서 즉위 초인 소수림왕2년에 불교을 공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화합정신, 그리고 평등호혜의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백성들은 복되고 화목하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도교만을 숭상하시고 불교를 배척하고 계시옵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고승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 망명을 했고 백성들의 원망도 점차 높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두미교'라는 제도까지 마련하셨으니 참으로 문제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민심은 분열되고 고구려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하옵니다." 보장왕은 보덕화상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장왕이 말했다.

     "듣기 싫소. 내가 시행하는 정책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싶다면 보덕화상이 이 나라를 떠나시오. 어차피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오. 음식도 한 가지 음식만를 섭취할 수 없고 옷도 때와 장소에 따라 바꿔 입는 것이 좋소." 보덕화상은 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아! 고구려 28대 700여 년간의 역사가 끝날 것인가? 나라가 어지러우니 임금의 눈도 흐려지는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나라는 불교의 평등과 자비사상을 배척하고는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떠나야겠구나!' 궁궐을 빠져나온 보덕화상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혜관, 승륭 같은 고승들이 망명한 것에 대해 한때는 보덕화상도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적접 당하고 보니 그들의 망명에 동정이 갔다. 부처님은,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 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제 갈 길을 걷지 못할 때 진정한 불자라면 더욱 불교를 사랑하고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백제도 신라도 모두가 조선의 땅이다. 다른 곳에서도 불법은 일어날 수 있다. 인연의 터를 잡아 뿌리를 내려야 한다. 보덕화상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걷던 중 반룡사에 이르렀다. 보덕화상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고자 한다.

    그대들은 이사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 그대들 중에 수도하기 알맞은 도량을 보아둔 자가 있느냐? 주저하지 말고 말해 보라." 제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제가 몇 년 전 백제 땅 완산주 고달산을 찾았었는데 그곳이 수도 도량으로는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부터는 그곳에서 수도를 할 터이니 그리들 알고 있거라." "여기서 완산주까지는 천 리가 넘사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먼 거리를 하룻밤 새에 갈 수가 있겠사오며 절을 누가 짓습니까?"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가서 푹 좀 쉬도록 하라." 제자들이 돌아간 뒤 보덕화상은 반룡사를 그대로 완산주 고달산으로 옮겼다. 이튿날 새벽, 제자들이 일어나 도량석을 하고 예불을 하면서 보니 살던 절은 그대로인데 주변 경관은 영 달랐다. 아침 공양을 하며 제자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큰스님, 절은 분명히 반룡사인데 산이나 계곡 등 주변 경관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옵니까?" 보덕화상이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더냐? 평양의 반룡사를 이곳 완산주로 옮기겠다고. 말한 그대로이다. 고구려는 이제 국운이 다하여 얼마 후에 멸망할 것이다.

    불교를 신봉하지 않는 나라는 쉽게 망하게 되어 있다. 나는 너희들이라도 마음 놓고 수도에 전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도 도량을 백제 땅으로 옮겨온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나 다 같은 조선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니더냐?" 보덕화상이 반룡사를 그대로 고달산으로 옮겨온 때는 고구려 보장왕9년, 즉 650년의 일이었다. 보덕화상은 특히 '열반경'에 능통하여 열반종의 종조가 되었으며 나중에 원효스님도 이 보덕화상에게서 '열반경'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보덕화상은 후학들을 제접하고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고승이 완산주에 왔다는 말을 듣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지에서 수많은 납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마다 보덕화상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 고향 사람들이니 잘 대접해 보내도록 하라." 제자들은 큰스님의 말씀을 따라 납자들을 잘 대접해 보냈다.

     처음에는 정말 고향이 같거니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토록 수많은 납자들을 한결같이 '내 고향 사람'이라 하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한 제자가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오는 납자들마다 '내 고향 사람들이니 잘 대접해서 보내라'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들 모두를 고향이 같다고 하십니까. 정말 큰스님과 고향이 같다면 당연히 저희들이 신경을 써야겠지요." 그러나 보덕화상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더 말이 없었다. 제자들은 납자들을 붙들고 큰스님과 고향이 같냐고 물었다.

    하지만 보덕화상과 고향이 같은 납자들은 거의 없었다. 지객을 맡았던 스님은 보덕화상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보덕화상이 마침내 그 의심을 풀어주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알 수 없는 것에서 왔다. 그러니 고향이 같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으면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것도 똑같으니 이것이 또한 고향이 같은 소치가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한 고향에서 태어나 한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또한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따른 법의 형제들이니 어찌 차별하여 대접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어느 누가 찾아 오든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정성껏 대접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이 말에 제자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는 보덕화상의 '모두 내 고향 사람'이라는 말에 의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 회정의 1차 전생에 대해 살펴보자. 보덕화상은 열반에 든 뒤 150여 년 뒤 마랑이라는 이름을 갖고 환생하였다. 그것은 마치 서장의 달라이라마의 환생과 같은 것이었다. 마랑이 머물고 있는 마을에 어느 날 아름다운 미인이 나타났다.

    고운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칼, 미끈한 몸매, 잘 발달된 가슴, 어느 하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온 곳을 알 수 없는 이 젊은 여인은 그 이름을 보덕이라 했다. 보덕 낭자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 보덕 낭자와 한번 만나 보길 원했다. 보덕 낭자가 거처하고 있는 집에는 연일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많은 남정네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청혼을 해오는 총각들도 있었다. 그때가 신라 헌덕왕8년(816)이었다. 수백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자 보덕 낭자는 한 가지 안을 제시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감은 하나인데 신랑감은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안을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보덕 낭자를 차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면 큰 싸움이 벌어질 게 뻔합니다. 안을 제시하신다니 좋습니다. 어떤 안인지요. 혹 무술을 겨루기라도 할 겁니까?" "아닙니다. 무술 시합을 하게 되면 그중에는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됩니다.

    그래서 소녀가 여러분에게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한 권씩을 나누어 드릴 터이니 내일 이 시간까지 외워오는 사람은 낭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와!"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고 묘안이라고 했다. 그들은 '보문품'을 한 권씩 받아가지고 돌아가 열심히 외웠다. 다음날 그 시각 많은 사람들이 모여 보덕 낭자 앞에서 '보문품'을 외웠다.

    모두 50명이나 합격했다. 송경 대회가 끝나자 보덕 낭자가 말했다. "단 하루 만에 '보문품'을 외워 합격한 분이 50명이나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 생각도 해주십시오. 50명을 모두 낭군으로 맞이할 수는 없잖습니까? 해서 다시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보기에도 건장했고, 또 양 볼을 타고 흐르는 구레나룻에서는 남성적인 야성미가 두드러졌다. "무술은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태껸이나 팔씨름, 또는 씨름으로 함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자신이 있는데..." 보덕 낭자가 말했다. "시험 문제는 제가 냅니다. 여러분은 시험을 치르는 응시자의 입장에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구레나룻의 젊은이는 무안한 듯 자리로 돌아가 섰다. "여러분, 이번에는 '보문품'에 비하여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금강경'으로 하겠습니다. 시간은 역시 만 하루 동안입니다. 거기서 합격을 하는 분은 저의 낭군이 되겠습니다."

     젊은이들은 '금강경'을 한 권씩 배부받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고 가는 시간이 아깝다 하여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식사 문제는 그들의 부모와 친척이 해결해 주었다. 다음날 그 시각에 시험은 다시 치러졌다. 거기서 다시 열 명의 젊은이가 합격을 했다. 보덕 낭자는 다시 '법화경'7권 28품을 일주일 동안에 다 외우는 자와 혼인하겠다고 했다. 경쟁률은 10대1이었다.

     한 주간이 지나자 다섯 명이 시험에 응시했다.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법화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시험감독관이 각자 한 사람씩을 맡아 송경 대회를 치렀다. 거기서 두 사람은 탈락을 했고 세 사람이 합격했다. 참으로 장한 젊은이들이었다. 세 사람으로 좁혀지긴 했으나 이들 세 사람을 모두 남편으로 맞이할 수가 없었다.

    보덕 낭자는 다시 '열반경'30권을 내어 주며 20일 동안에 이 경전을 다 외우는 자와 혼인하기로 했다. '열반경'30권은'법화경'7권의 두 배에 가까운 양이었다. 경전의 두께와 분량을 가늠하며 세 젊은이는 모두 자신만만했다. 이 경전의 절반 분량인 '법화경'도 한 주간 만에 외웠는데 그 경전의 두 배 분량이라면 두 주간이면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보덕 낭자는 20일간의 여유를 주었던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은 '열반경'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을 읽고 외웠다. 마침내 20일이 다 되어 시험장에 두 사람이 응시하였다. 한 사람은 탈락하기도 전에 미리 기권을 했기 때문이었다.

    경쟁률은 3대1에서 갑자기 2대1로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열반경'을 외워 나갔다. 그들의 머리는 가히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저장하고 있었다. 장장 하루 동안 시험을 치러서 두 사람 모두 '열반경'송경 대회를 마쳤다. 감독관이 마침내 두 사람의 성적을 비교해 보니 한 사람은 세 군데서 건너뛰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한 글귀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모두 외웠다. 합격한 사람은 마랑이었다. 마랑은 뛸 듯이 기뻤다 보덕 낭자 또한 그를 장한 청년으로 생각했다.

     보덕은 마랑을 보고 말했다. "도령은 이름이 무엇이오니까?" "마랑이라고 합니다. 성이 '마'이므로 마랑이란 마 도령이란 뜻입니다." "참 장하시군요. 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약속한 대로 최종의 한 분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택일을 하여 우리는 혼인을 할 것입니다. 여기 마 도령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시험 광경을 보러 왔던 탈락자들과 수많은 구경꾼들은 마랑에게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혼인 날짜는 그 자리에서 한 파수 뒤로 잡혀졌다. 준비가 거의 끝나고 마침내 예식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신랑 마랑은 벌써부터 혼례장에 도착하여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하객들은 마랑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혼례 시간이 다 되고 또 얼마가 흘렀건만 신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해진 하객들이 신부가 머물고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댓돌 위에 신발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부가 분명히 있기는 했다. 잠시 후 방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방문을 열어 젖혔다. 신부가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얼굴빛은 하얗게 되어 있었다. 의원을 불렀다. 그러나 의원이 도착하기 전 보덕 낭자는 마랑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마랑은 보덕 낭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한데 이상하게도 방안에는 이름 모를 향기가 가득했고 어디선가 모르게 풍악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풍악소리는 분명히 방안에서 나는 것이었는데 연주하는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곡은 '영산회상'이었다. 영산회상이란, 옛날 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하늘 사람들이 연주했다는 하늘의 음악이었다. 마랑과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보덕 낭자의 시신을 선산에 고이고이 묻었다. 결혼식장이 장례식장으로 변했고, 결혼 음식이 장례 음식으로 변한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곧 현실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기도 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간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 온갖 천지만물 중에 영원히 변치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일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무덤을 다 만들고 나서도 사람들은 돌아갈 줄 몰랐다. 며칠 후, 젊은이 마랑이 보덕 낭자 무덤 앞에서 아쉬움을 달래며 울고 있는데 웬 선풍도골의 스님 한 분이 석장을 짚구 지나다가 마랑에게 물었다. "젊은이는 지금 거기서 뭘 하는가?" 마랑이 대답했다.

     "제 신부 보덕 낭자가 여기에 묻혔습니다. 혼인하는 날 예식이 진행되기 앞서 그만..." 노승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죽게 마련일세.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운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도 아니잖는가?"

    "스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어떻게 제 슬품 앞에서 그런 말씀을..." "미안하이. 그러지 말고 그 무덤을 파 보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일세." "넷? 특별한 일이 있다구요? 그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하여간 무덤을 파헤쳐 보게나." 그 말을 마치고 노승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마랑은 하도 이상해서 집에 돌아와 조금 전에 있었던 얘기를 하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다시 무덤으로 갔다.

    이 얘기가 삽시간에 퍼져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덤으로 모여 들었다.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자 거기서 금빛 광명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금동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 한 분이 나타났다. 분명 보덕 낭자를 묻었는데 보덕 낭자의 시신은 없어지고 대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합장을 하고 '나무 관세음보살'을 합송했다. 그때 문득 한 노승이 나타나 말했다.

    그 노승은 조금 전 마랑에게 무덤을 파헤쳐 보라고 한 스님이었다. "여러분, 보덕 낭자는 관세음보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랑, 마 도령은 전생에는 보덕화상이었지요. 나는 보현보살이고 보덕 낭자의 어머니는 문수보살이었습니다. 이 보덕 낭자는 관음진신인데 중생의 업장이 두터운 것을 가엾이 여기고 그 업장을 녹여주기 휘해 짐짓 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문품'과'금강경''법화경''열반경'등을 읽게 하여 불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심을 일깨우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관세음보살의 자비화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노승이 말했다. "마랑은 내생에 다시 이 보덕 낭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부부의 연을 맺어 함께 도를 닦는 도반의 모습을 보일 것이고, 마랑은 보덕 낭자로 인해 관음 신앙의 뿌리가 더욱 깊이 내리게 될 것입니다. 부디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노승은 석장을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그 석장이 사자로 변했고 노승은 사자를 타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관세음보살의 화현과 보현보살의 화현에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감격하여 합장한 손을 내리지 않았고 염불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그 뒤 천주 땅의 찬화상이 보덕 낭자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아름다워라, 관세음이여! 아! 숙녀 중 숙녀였네. 수많은 남자들 이 낭자 사랑하여 법화, 열반, 금강경를 독송하였네. 중생의 무명업장이 송경 공덕에 모두 녹으니 관세음의 크신 방편이 이와 같음을 뉘 알았으랴. 황금보살상 남기고 돌아간 뒤 밝고도 고운 용태여! 다시 누구의 집에 떨어졌는지 아! 정녕 아는 자 없구나.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출처 : 흘러 흘러 저절로 흘러
글쓴이 : eagl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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