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영주의 전설, 소지왕과 벽화

강나루터 2017. 8. 19. 04:52

 

소지왕과 벽화

소지왕(479~500)은 신라 21대 왕이고 벽화는 영주의 옛이름인 날이군의 통치자였던 파로의 딸이었습니다. 당시 소지왕은 예순이 넘은 나이였고 벽화는 열여섯 살 난 낭자였지요.

벽화가 살았던 날이군(지금 영주)은 고구려로 통하는 죽령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요충지였습니다.

소지왕은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국경 최일선인 날이군에 두 차례나 행차해 백성들 위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오늘날 지방자치제와 같은 지역의 토착지배세력을 이용한 통치를 하였는데 벽화의 아버지 파로는 바로 지배세력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는 소지왕이 날이군에 행차할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의 딸 벽화를 소지왕에게 바치기로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소지왕이 날이군으로 행차하던 날, 날이군민(郡民)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던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는데요.

그 중에 아릿따운 낭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벽화였으며 국색이었다고 합니다.

파로는 소지왕을 이틀간 극진히 대접하였고 변방 순시를 마치고 떠나는 날 벽화를 곱게 단장 시켜서 색비단 포장수레에 실어 왕에게 헌납하였습니다.

왕은 먹는 것인 줄 알고 포장을 열어 보니 뜻밖에도 앳된 낭자가 들어있었는데 왕은 놀랍기도 하고 괴이히 여겨 받지 아니하고 환궁길에 오르게 됩니다.

환궁길에 오른 소지왕의 머릿속은 이미 벽화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소신료들의 눈도 있고 해서 가까스로 욕망을 억제하고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소지왕은 궁궐 정원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달을 쳐다봐도 벽화의 얼굴이 떠오르고 별의 수만큼 그리움이 몰려왔다.

참고 또 참았지만 벽화가 보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어 결국 호위병 몇 명만 거느리고 변복을 하여 궁궐을 빠져나와 날이군으로 향하게 됩니다.

왕이 날이군에 도착하자 파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을 맞이했고 소지왕은 그토록 그리던 벽화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소지왕은 걸핏하면 정무를 팽개치고 날이군을 다녀오곤 하였지요. 그러자니 이 소문은 대궐 안은 물론이고 백성들 사이에도 입소문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변복을 하고 날이군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고타군 (지금의 안동땅)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는데,

임금은 집주인 노파에게“요즘 백성들이 왕을 어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노파는 “지금 왕은 날이에 있는 벽화에게 반해 변복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용이 물고기 옷을 입고 다니면 어부한테 잡히는 법인데 천승지족 즉, 높으신 몸으로 자신에 신중하지 못한 왕을 어찌 성군이라 하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노파로부터 일장 훈계를 들은 소지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요.

영주지방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소지왕이 노파의 말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내기고을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내기고을의 벽화는 다시 오기로 약속한 왕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다 지친 나머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왕의 무신(無信)함을 원망하다 서귀대 위에 탑을 쌓아 ‘무신탑’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주 왕실에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소지왕이 정사를 팽개치고 날이군으로 벽화를 만나로 간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벽화를 몰래 궁궐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후 소지왕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후궁이 된 벽화는 왕자를 낳았는데 왕위는 잇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순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순장이란 고대의 장례에서 주인이 죽으면 생전에 부리던 하인이나 시종, 그리고 가축까지도 함께 매장하던 제도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경주에서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 고분에는 금관, 은관을 비롯해 2만 4천 9백점의 유물이 나온 경주 98호 고분인데요. 이 고분의 주인공은 신라 21대 소지왕이며 왕과 함께 순장한 여성은 왕의 총애를 받던 후비 벽화라는 학설이 발표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골편은 60세의 남자와 15세 가량의 여성의 것」이라는 발굴단의 해부학적 보고를 바탕으로 「삼국사기」소지왕조 문헌기록을 분석한 결과 소지왕과 벽화의 순장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문헌에 의하면 소지왕의 뒤를 이은 지증왕이 순장제도를 폐지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벽화의 슬픈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처 : 초암 이야기
글쓴이 : 초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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