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농민군(農民軍)
동학농민혁명 당시 우리 농민군이 입었던 평상복
0. 개틀링 기관총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미국에 6문 주문하였고,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하며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조선군이
개틀링 기관총 11문을 장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0. 완문(完文)
전라남도 장성 서이면 거주의 기양연(奇陽衍)이
사람의 종장(宗匠)으로 동학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절대로 침탈하지 말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주부사(羅州付使) 초토영에서 발급하였다.
0. 완문
전라남도 해남군의 백포는 해남윤씨의
세거지(조상대대로 살아오는 곳)로 유림이 본받을 것이 있으므로,
절대로 침탈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0. 신호적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사곡리에 살던 이광범이
62세 때 작성한 것으로 결혼한 두 아들 내외와 손자 등
모두 7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 호적은 갑오개혁 이후 건양 광무연간(1897~1907)에 사용된
새로운 형태의 것으로, 조선시대 때 작성하던 그 양식이 달랐다.
호주의 직업, 집의 형태를 적는 것은 신호적제도가 도입된 이후의 일이었다.
0. 유회성책(儒會成冊)
1894년 11월 청면(靑面) 천동(泉洞)의 유회(儒會)에서
갑오농학혁명에 참가했던 자와 참가하지 않았던 자
그리고 참가했으나 뒤에 완전히 결별한 자를 구분하여
작성한 마을단위 조사서이다.
주목되는 것은 유학뿐만 아니라
속오군에 대한 조사도 아울러 진행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조선후기의 신분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유회성책은 완의(完議)의 일종인데,
완의란 단체 구성원 사이에 합의된 내용을 기록한 문서로
대개 종인(宗人)이나 동중인(洞中人) 또는 계원(契員) 등이 모여
공동의 관심사를 의논하고 합의한 후 작성하였다.
완약(完約), 입의(立議) 또는 조약(條約)이라고도 하였으며
문서 끝에 합의한 사람들이 서명하는 경우도 있다.
0. 향약장정(鄕約章程)
완산초안국(完山招安局)에서 동학농민혁명 진압 직후 간행되었다.
목적은 향약을 재조직하여 동학혁명이후 흐트러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조선중기 이후 실시된 향약 4개조(德業相勸, 禮俗相交, 過失相規, 患難相흘)를
전통적 유교이념의 재확립, 동학농민군의 체포와 처벌 등
현실 상황에 적극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0. 오통절목(伍統節目)
완산초안국에서 동학농민혁명 진압 직후 간행되었으며,
목적은 동학농민군의 색출, 민심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오통은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준말로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어
호구조사, 범죄자 색출, 세금징수, 부역 동원, 인보(자체순찰)의
자치조직 구성 등에 이용되었다.
0. 전봉준 공초록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에 대한 일본측의 심문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전봉준은 1894년 12월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 후 모두 5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심문내용은 농민혁명의 전개상황과 기병목적, 농민군의 규모, 전봉준의 동학입도 의도와
농민전쟁에서 역할, 대원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정치적인 내용에 대하여는 일본 영사가 직접 심문을 하였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농민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0. 장태
닭을 키우는 둥지로 동학농민군은 황룡촌전투에서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만들고 그 속에 많은 짚을 넣어 굴리면서
경군의 총알을 피했다고 한다.
0. 계량기구
말(斗)은 물건의 양을 재는 단위나 혹은 그 그릇을 일컷는
우리 말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계량기구는 으레 통나무로 만들어 지는데,
결합 부위는 구멍을 내어 서로 엇갈려서 끼우는 식으로 처리하였다.
0. 동고리
음식을 담아서 옮기거나 옷이나 책의 보관, 혼사나 제사 등의
큰 일을 치를 때 떡이나 엿을 담는 용도로 활용하였다.
형태에 따라 동그랗게 생긴 것을 동고리라 하고,
약간 모가 난 것을 모재비라고 한다. 대나무줄기나 버들가지로
촘촘히 엮어 만들기 때문에 떡이나 엿을 담아도 밑으로 새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0. 벽채
나무 자루에 반달 모양의 쇠날을 끼운 농기구로
광산에서 광석을 캐내거나 굳은 땅을 파낼 때, 약초를 캘 때 사용한다.
0. 필통(筆筒)
보통 문갑 위에 올려져 사용되는데,
학문하는 선비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문방 도구였다.
재료는 나무, 대나무 등이 많이 이용되었다.
참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주칠(朱漆)을 하였고, 별다른 장식은 하지 않아
단정한 멋과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0. 필가(筆架)
붓을 보관하기 위한 기구로는 필통, 필가 또는 연상의 서랍 등
붓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이 유물은 주로 큰 붓을 보관하기 위해 마든 필가로 필격이 라고도 한다.
받침대는 원형이고, 위쪽에는 원반모양의 회전반이 있고
회전반 테두리에는 여러개의 붓을 걸기 위한 꼭지가 달려 있다.
제작연대는 유물의 상태를 보아 크게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0. 지통(紙筒)
보통의 필통보다 조금 큰 글씨와 그림을 그릴 한지 또는 색자를
꽃기 위한 것으로 나무를 만든 것과 백자로 만든 것이 있다.
이 지통은 대나무를 가운데로 갈라 잇대어 틀을 만들고,
바닥에 연꽃무늬를 새긴 나물를 사용하였다. 대나무 표면에는
학, 소나무, 사슴 등을 새겨 넣어 장식하였다.
0. 전봉준 운명시(殞命詩)가 담긴 도자기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된 뒤 서울에서
다섯 차례의 심문을 받고 사형이 확정되어 1895년 3월 30일 새벽에 형이 집행되었다.
형 집행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시를 남겼다고 한다.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불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爲國丹心誰유지 (위국단심수유지)
때를 만나서는 하늘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 있으랴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0. 천안 전씨 병술보(丙戌譜)
이 족보는 1886년 병술년에 발간된 것으로
전봉준은 철로(鐵爐) 그이 아버지 전찬혁은 기영(基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봉준은 가계 및 출생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0. 이춘선의 교지(敎旨)
이 교지는 광서 15년 고종 26년(1889년)에 이춘선을
선략장군 입암산성 별장으로 임명한다는 임금의 명령서이다.
동학놈민혁명 당시 입암산성 별장이었던 이춘선은
태인 전투 패전 후에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고, 1894년 11월 29일
입암산성으로 피신해온 전봉준을 하루 머물게 하였다.
0. 겸산유고(謙山遺稿)
이 문집은 이병수(1855~1942)의 것으로 겸산은 그의 호이다.
이 책은 전남지역 농민군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특히 제 10책에 수록된 금성정의록에는
나주와 장흥지역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것이 기록되었다.
그 내용은 나주목사 민종열의 향약 실시와 마부 관군의 수성상황
나주지역의 동학접주 오선권과 최경선 등의 활동상, 장흥, 영암 등지의 후기 농민군의 활동상 등이다.
0. 갑오실기(甲午實記)
이 책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주요내용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 청일전쟁, 갑오개혁 관련 기록이다.
작자미상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0. 불랑기 4호
15세기 경 포르투갈 등 서구에서 제작된
대포의 이름으로서 유럽에서 만들어진 불랑기가 동양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초 유럽 상서이 중국 광동을 출입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이전인 명종조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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