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스크랩] 단이와 풍이 만나러 찾아 든 지리산!

강나루터 2019. 1. 17. 14:05

 

 

 

 

단이와 풍이 만나러 찾아 든 지리산!

 

 

 

 

일 시 : 2013년 10월 9일 ~ 11일

 

장 소 : 전남 순천시 낙안읍과 경남 지리산 벽소령 계곡 일원

 

 

 

 

 

10월은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Autumn Leaves의 계절이기 때문에 이제 서서히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단이와 풍이를 만나러 떠나는 10월과 11월의 여정이 바로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낙엽(Autumn Leaves)를 보러 다니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그러는 거냐고 묻지는 말아 주시기 바란다. 그것은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 왜 사는 걸까.

마음 먹은대로 한번도 저질러 보지 못하면서 저지르는 자가 오로지 부럽다는 말씀을 하는 분들이 혹여 계시다면, 자기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보시라고 부탁드려 본다. 늙어서 병들어 정말 움직일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땅을 치고 말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까?

 

그것은 지금 당장, '사랑한다!'는 편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일에서 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그것은 지금 당장, 마음 속으로 어제 미워했던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어찌 생각하실 것인가.

그것은 그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망설이며 동경만했던 여행지를 지금 당장 찾아 떠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찌 생각하실 것인가?

 

그렇게 실천하며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인생! 아닐까? 그러니 지금 당장 실천하면 어떨까? 내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화사함을 자랑하던 여름 무더위도 어느덧 온데간데 없어지고 -

 

- 배롱나무에는 끝물의 백일홍이 마지막으로 물들어 가면서 가을을 영접하고 있을 즈음에 -

 

- 우리는 길을 나서서 단이와 풍이를 만나러 떠나 왔다! -

 

 

 

 

국립낙안민속휴양림에서 야영하던 첫째 날

 

낙안읍성에는 산림청에서 조성하여 관리하는 국립민속휴양림이 자리하고 있다. 보름 전에 예약한 101번 데크 주변은 평일이라 그런지 아주 한산해 보였다. 아니 우리가 전세를 내서 사용하는 것같은 착각이 들었고, 해름참에 부산에서 올라온 한 가족만이 텐트를 쳐서 그런지 조용한 숲 속의 하룻밤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태풍 다나스가 동해로 빠져나간 뒤끝이었고, 기상대 예보로 비는 안 온다고 했었다. 그런데 웬걸 도착하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새벽에는 세찬 소나기가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꼼꼼하게 쳐둔 스카이라이트 텐트에 더 보태서 티윙이라는 타프까지 쳐 두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잠결 어스름에 새벽비 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워낙 방수대책을 튼튼하게(도합 방수압이 5,000mm 이상) 해 두었기 때문에 그대로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사실은 부산에서 오신 분들의 오토캠핑 텐트가 비가 새는지 시끄러웠기 때문에 잠시 눈을 떴을 뿐이었다.

 

 

- 숲 속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보낸 아름다운 밤이었다 -

 

- 블랙 다이아몬드社의 3인용 스카이라이트 텐트를 치니, 둘이 지내기에는 아주 널널한 미니멀 캠핑이 되었다 -

 

- 찬란한 가을은 정갈한 숲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고 -

 

- 모처럼 마음의 평정을 누리던 모나리자님은 산책으로 분주하시었다 -

 

- 계곡의 맑은 계류가 청정함을 노래하였고 -

 

- 매일 새벽과 저녁에 두시간씩 바치던 명상기도를 그 정갈한 숲에서도 모나리자님은 어김없이 실천하시었다 -

 

- 결실을 맺는 풍요로운 가을은 마침내 우리곁으로 다가왔다 -

 

  - 그리고 풍이는 이제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

 

 

 

 

둘쨋 날은 산청 내원사를 지나 국립지리산휴양림에 여장을 풀었다

 

 

낙안휴양림에서의 하룻밤 숲속 힐링으로 모처럼 맑은 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느낌이겠지만......

 

이렇듯 자연은 감미로운 생동감을 선사해 주곤 하기 때문에 항상 숲으로만 찾아들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는 그렇게 정갈한 소향숲에서 2년동안의 안거기간을 지키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낙안휴양림에서의 미니멀 캠핑은 여유롭고 느긋한 심정을 지니고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전 늦게 짐정리를 마친 우리는, 상사호를 지나 순천 외곽길로 해서 하동을 중간 목표로 삼고서 길을 떠났다. 그렇게 하동의 섬진강을 보고서야 시장기를 느끼게 되어, 읍내의 설렁탕집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 잠시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름은 잘 모르지만 정갈한 육수맛이 인상적이었던 식당으로 기억에 남았다.

 

 

- 가을은 섬진강 상류를 끼고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

 

 

 

 

남명 조식 선생 묘를 참배하다

 

 

-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우리는, 벼르고 벼르던 남명 조식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로 했다 -

 

- 호남에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이 있었다면, 영남에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라는 위대한 스승이 계시었다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남명 조식 [南冥 曺植] :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

 

시기: 1501년(연산군 7) ~ 1572년(선조 5)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신조로 삼으며

 

남명 조식은 삼가현 토동(兎洞)1)의 외가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1469~1526년)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식(植),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 산해선생(山海先生), 산해부자(山海夫子)로 불리기도 했다.

 

조식은 다섯 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고, 일곱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를 가르친 아버지나 동네 서당의 훈장은 의문에 의문으로 이어지는 그의 질문 공세에 질리기도 했다. 조식은 아홉 살 때 큰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다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린 조식은 아픈 것을 참으며, 상심한 어머니를 오히려 위로했다.

 

“어머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소자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반드시 소자에게 부여한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 임무도 다하지 못한 어린 소자의 목숨을 하늘이 거두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열다섯 살 때 조식은 단천군수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단천에 가서 살았다. 이때 조식은 공부의 범위를 유교 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자백가ㆍ천문ㆍ지리ㆍ의학ㆍ수학ㆍ병법 등을 두루 공부하여 안목을 넓혔다. 한편 지방 관아에서 생활하는 동안 불합리한 행정 체제와 아전들의 비리, 백성의 곤궁한 삶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뒷날 그의 「무진봉사 戊辰封事2)」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다. 「무진봉사」 중 ‘서리망국론’은 아전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는 우려와 함께 아전들의 비리실상을 낱낱이 적은 것이다.

 

함경도 단천 시절에 조식은 자기 수양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마련한다. 꿇어앉아서 물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밤을 새우는 일과,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니는 일이 두 가지 자기 수양의 방법이었다. 그릇의 물이 흔들리지 않게 받쳐 들고 밤을 새움으로써 자신의 뜻을 가다듬고, 걸어 다닐 때마다 허리춤에서 나는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의 뜻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는 1518년(중종 13년)에 조식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장의동으로 돌아왔고, 이 장의동 시절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ㆍ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ㆍ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조식이 진사ㆍ생원 초시(初試)와 문과 초시에 급제한 것은 1520년(중종 15년) 스무 살 때의 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또다시 사림 세력이 숙청당한 이듬해의 일이다. 조식은 기묘사화 때 숙부 조언경이 희생되고 부친이 좌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로(仕路)의 험난함을 깨닫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하게 된다.

 

조식의 어머니는 영락한 가문의 중흥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사대부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식의 생각은 달랐다. 반드시 중앙 정부의 벼슬을 해야만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모친의 권유에 따라 진사ㆍ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를 보고 급제를 했지만 조식은 진사ㆍ생원 회시(會試)3)에는 응시를 하지 않고, 문과 회시에만 응시하여 낙방을 한다. 이때부터 조식은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오로지 유학의 본질을 파고드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공자ㆍ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주자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명세하면서 『주역』ㆍ『시경』ㆍ『서경』ㆍ『주례』ㆍ『예기』ㆍ『춘추』 등 육경(六經)과 『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 등 사서(四書), 그리고 주돈이ㆍ정호ㆍ장재(張載)ㆍ주자 등 송대의 주자학자들이 남긴 글을 다시금 새롭게 읽고 연구하고 사색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조식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주역』 곤괘(坤卦)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경’과 ‘의’를 딴 조식은 자신이 차고 다니는 칼에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고 하는 글귀를 새겼고, 옛 성현의 말씀 가운데 경과 의에 관한 글을 뽑아 베껴서 항상 옆에 두고 외우면서 사색했다. 그리고 뒷날 산천재(山天齋)를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 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 자를 써 붙였다.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

 

 

산천재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소재
조식은 만년에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강학할 때, 뜰에는 매화를 심고, 창의 좌우에는 각각 경(敬) 자와 의(義) 자를 써 붙였다.

 

이때 시작한 조식의 ‘경의’에 대한 강의는 그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말도 ‘경의’였다.

“경과 의,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글자의 의미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다. 성현이 남긴 말씀의 귀결처는 모두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는 이들이 이 두 글자의 공부에 익숙해진다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구나.”

죽음에 이르러서도 ‘경의’를 신념화한 조식의 모습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처사(處士)의 삶을 찾다

 

조식은 1530년(중종 25년)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주하였는데, 이것은 처사로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은 데 따르는 생활고와 무관하지 않다. 22세 때 남평 조씨(南平 曺氏) 가문의 사위가 된 조식에게는 상당한 재산가인 처가로부터 분재받은 전답이 김해에 있었다.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친정으로부터 받은 상당한 재산이 김해에 있었던 것이다.

 

생활의 안정을 얻은 조식이 김해 신어산 중턱에 정사(精舍)를 짓고 산해정(山海亭)이라 이름하니, 대곡 성운ㆍ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ㆍ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ㆍ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등 많은 선비가 찾아오고, 뒷날 광해군대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최고의 행정가로 평가받은 동고 이준경은 『심경』을,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는 『대학』을, 대곡 성운의 형인 성우(成遇)는 『동국사략 東國史略』을 보내 온다. 한편 청도 운문산으로 가서 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를 만나는 등 활발한 교유 활동을 한다.

 

 

여성의 가계 계승 권리가 반영된 『안동 권씨 족보』남녀 구분 없이 출생순으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조식이나 이황 등이 혼인을 통해 경제 기반을 얻은 데서 보이듯 조선 전기와 중기의 여성들은 재산 상속에서도 차별을 받지 않았다.

 

 

 

남명 조식이 1533년(중종 28년) 33세의 나이로 향시(鄕試)에 응시한 것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조식의 어머니는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사대부가 되어 영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명은 최종 시험에서 합격을 하지 못함으로써 과거를 통한 출사는 이루지 못하며 영원한 처사로 남게 된다. 남명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라이벌인 퇴계가 과거를 통해 출사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퇴계와 남명은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서로 존중하면서 서신만 주고받은 기이한 인연이 있다.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서신 교환을 통해 상대를 은근히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식은 무엇보다 당시 성리학의 이기 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황이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였다.


1536년(중종 31년) 36세의 조식은 결혼 14년 만에 첫아들 차산(次山)을 얻고 가을에 있은 향시에서 3등을 한다. 1538년(중종 33년) 38세에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543년(중종 38년) 43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언적이 만나기를 원했으나 거절한다. 그 이듬해인 1544년에 조식은 첫아들 차산을 병으로 잃고 연이어 1545년에는 어머니 인천 이씨를 여읜다.

 

남명 조식이 김해에서 삼가현으로 돌아간 것은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산소의 동쪽 언덕에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3년 시묘살이를 한 조식은 삼가현 토동에 강학당인 계부당(鷄伏堂)과 제자 숙소인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정착한다. 이때부터 처사(處士), 곧 재야 지식인인 조식의 활약이 시작된다. 조식이 처사의 길을 택한 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눈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을 진동시킨 사직상소문


1551년(명종 6년) 51세에 정6품직인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1553년 53세에 다시 정6품의 벼슬을 내렸으나 역시 사양을 한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 이황이 편지로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조식은 ‘눈병’을 핑계로 거절한다. 이때 퇴계와 남명이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정과 존경의 정이 자못 절절하다. 퇴계는 ‘유일(遺逸)로 임명한 벼슬이니 몸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며 남명에게 벼슬길에 나오기를 원했고, 남명은 ‘하늘의 북두성처럼 우러러 사모하던 그대의 요청에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에 있다’며 애정과 존경이 넘치는 편지로 거절했다.

 

1555년(명종 10년) 55세의 남명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진다. 삼가현에서 가까운 단성현(경남 산청)의 현감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라는 것도 아니고 이웃 고을의 현감을 하라는 것이니 이번에는 사양하지 못할 거라며 내린 벼슬이었지만 조식은 이른바 「단성소 丹城疏」로서 이 역시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단성소를 『남명집』에는 1555년에 올린 상소문이라 하여 「을묘사직소 乙卯辭職疏」로 기록하고 있다.

 

“(전략)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큰 고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혀서 그 진이 다 말라버렸으니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중략)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중략) 옛날에 우리나라에 신하처럼 복종하던 대마도 왜구를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원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더합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중략)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이황이 조광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고 신정치 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 놓았다면, 조식은 강직한 기상과 강렬한 비판 의식을 가진 재야 사림으로서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남명은 지나치게 투철한 정치 의식 때문에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퇴계와 남명, 두 사람에게는 사회 정의 구현의 이상을 교육에 걸고 새 시대를 준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정탁(鄭琢) 등은 퇴계와 남명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한 퇴계와 남명 두 사람 공동의 제자이다.

 

조식의 대표적 문인들로는 정구ㆍ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ㆍ김우옹ㆍ이제신(李濟臣)ㆍ김효원(金孝元)ㆍ최영경(崔永慶)ㆍ오건(吳健)ㆍ강익(姜翼)ㆍ문익성(文益成)ㆍ박제인(朴濟仁)ㆍ조종도(趙宗道)ㆍ노진(盧禛)ㆍ하항(河沆)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명 문인의 특징으로는 대부분 은둔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는 점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거나 가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재야 지식인으로 은둔해 있다가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직접 창칼을 들고 적군과 맞서 싸움으로써 정신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선비의 기백을 보인 것이다. 남명의 외손녀 사위인 의병장 곽재우에게도 남명이 병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제자들을 배출한 남명의 교수 방법은 자해자득(自解自得)이었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경서를 풀이해 주는 대신 스스로 터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 남명과 퇴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양대 산맥으로서 영남학파의 굳건한 버팀목이었던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은 그 후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며 신정치 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 놓은 퇴계 이황과, 강렬한 비판 의식으로 무장한 말과 행동으로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한 재야사림의 영수 남명 조식. 그들의 성향은 달랐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자신의 안위나 영달보다 사회 개혁 의지를 불태우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시대를 앞장서 이끈 퇴계와 남명은 양당 정치 체제를 준비한 선각이기도 했다. 학파 기반의 이념 정당인 붕당이 그 이후에 성립되고 양당 정치 체제가 확립되었으니, 이념의 바탕 없이 이합 집산하는 오늘날의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명 조식이 만년을 보낸 곳은 지리산 아래 덕산 사륜동이었다. 1561년(명종 16년)에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자신과 제자들의 강학 장소로 삼고 부단히 제자들에게 학문과 기개를 가르쳤다. 1572년(선조 5년) 2월 8일, 석 달 전에 발병한 등창으로 고생하던 남명 조식은 산천재에서 여러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옛 성현의 ‘경의’에 관한 가르침을 외우면서 숨을 거두었다. 산천재 뒷산 임좌향(壬坐向)에 안장된 남명 조식은 대사간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기 때문에 문(文)이요, 도를 곧게 지켜 꺾이지 않기 때문에 정(貞)’이라는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다.

 

도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분발 정진함으로써 도학을 일으켜 세운 학자요, 그에게서 ‘경의’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가 국가 위난의 시대에 의병장이 됨으로써 성공한 교육자로 기록되는 남명 조식의 저서로는 『남명집』, 『남명학기류편 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명 조식 [南冥 曺植] -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12.10, 현암사)

 

 

 

 

조식의 묘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소재
조식의 묘 - 몇 차례 깨어졌다 다시 만들어진 조식의 묘비는 정인홍의 정치적 패배 등 그 문인들이 겪은 정치적 파란을 짐작케 한다.

 

- 선생의 묘소는 배산임수의 수려한 명당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

 

 

 

 

남명 조식 선생이 말하던 경敬과 의義는 과연 무엇이던가.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그러한 대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탈레반 정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교國敎인 이슬람의 유적이 아니라고 해서 무자비하게도 유엔으로부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바미얀 석불'을  종교신념에 가득차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키고 만다. 그들의 독단적 우월주의에 가득찬 이 만행은 공경할 경敬자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필자는외신을 통해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저렇게 무지막지한 만행이 과연 어디에 있겠느냐며 매우 분개했었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인과율에 따라 업장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뒤로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두었던 탈레반 정권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하여 어이없게 붕괴되고 만다. 이는 자업자득의 일환이었으며, 의義를 들먹이며 경敬을 무시하다가 당한 참담한 비극의 일면이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로마의 카톨릭교가 중동의 이슬람교를 경敬으로써 예우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대륙 간의 문명충돌을 일으켰으니 그 원한이 지금까지 내려왔던 것이며, 그 선대의 원한으로 가득차있던 현 시대의 근본주의 이슬람 교도들은 미국에서 9.11 테러를 일으키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대저 자기가 믿는 종교가 옳다면서 우월주의에 빠져들어 타 종교를 업신여기는 행위, 그러니까 경敬으로써 예우하지 않는 편협적 행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더라도 지탄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경敬과 의義를 같은 반열에 올려 두고, 이로써 일생의 좌우명을 살으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만일 탈레반 정권 시절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자기의 경전만을 옳은 의義라 해석하고, 타 종교인 불교를 공경으로써 예우하지 않고 우상화 배격운동의 일환으로 믿으면서 모든 불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하고 실천하였다면 이는 결국 이슬람 경전을 참다운 의義의 잣대로 옳게 해석하지 못한 큰 불찰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항상 의로울 의義! 다시말하거니와 대의大義를 정립함에 있어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는 신중함은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옳지 않는 의義를 의義라 우기는 것은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 십자군의 과거 원한에 대해서 무슬림들이 가지고있던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그 복수심을 교묘히 선동하던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를 일으켰고 결국은 이라크의 붕괴와 그 자신의 죽음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결과를 맞이하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역사의 순환 고리가 참으로 냉혹함을 우리는 숙지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참 의義를 정립하기가 애매할 때에는 우선 경敬을 내세워서 곰곰히 결론을 유도해 보아야만 한다. 자기 종교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타 종교를 가볍게 여기고 비방하고 혹은 '마귀의 집단!'이라고 매도하는 이들은 탈레반 정권이나, 빈 라덴의 생각이나, 십자군의 자가당착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고서 자기 경책의 기회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필자는 어느 광신도가 지하철에서 앞에 앉은 스님을 향하여 맹신적인 강압성으로 '내가 믿는 신이 옳으니, 얼른 회개하여 광명을 찾으라!'라는 자신감에 찬 폭언의 일화를 들으면서, 이것은 결코 의義로써 경敬을 찾는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의義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를 앞세우기 이전에 그보다 훨씬 덕스러운 공경할 경敬을 앞세우며 남을 공경하는 마음을 먼저 가졌다면 과연 어땠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신중하기만 했다면 그가 참스런 의인으로 남을 것은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조식 선생께서 경책의 징표로 평생 <경敬과 의義>를 지니셨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선비의 사표이셨기 때문에, 오늘의 공경스런 참배를 정성으로 할 수 있었음을 필자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것이다.

 

원컨데, 선생이시여!

지금의 나라 작태도 선생께서 말씀하시던 「을묘사직소 乙卯辭職疏」와 하등 다를 바가 없으니, 오늘날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선생의 말씀을 다시 되새길 수 있게끔 하늘에서 굽어 살펴 보아 주소서. 그래서 가난한 이들도 경敬으로써 대하고 원수의 아들도 경敬으로써 맞이할 수 있는 대의大義를 지니고 실천하는 민족이 되게 해 주소서......

 

 

 

 

폭우를 무릅쓰고 내원사를 순례하다 

 

 

-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를 지나면서부터는 비가 점점 더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

 

- 가을비는 무언가 마음을 침잠해 들어가게 해주는 마력을 지녔다 -

 

- 그래 대원사는 포기하고 내원사만 순례하기로 하였다 -

 

- 머슴 부처의 인상적인 모습이 그때의 우리 심정과 똑 닮았다 -

 

- 어이하여 빗님은 우리의 순례길을 막으시는가 -

 

- 십여년 전에도 대원사를 포기하게끄름 만드시더니, 이번에도 그리 하셨으니 말이다 -

 

 

 

 

함양 마천면의 국립지리산휴양림에 찾아 들다

 

 

- 역시 지리산 계곡의 신비를 보여 준다 -

 

- 해발 600고지부터는 단풍이 제법 보이기 시작하였다 -

 

- 힘들게 밤머리재와 산청을 지나 함양군 마천면 소재 국립지리산휴양림을 찾아들 수 있었다 -

 

- 오후 늦게 잠깐 나가본 산책길에서 환희의 풍경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

 

- 아침에는 서둘러 숲으로 향한 명상산책을 실천하기로 했다 -

 

- 다 익어 결실을 노래하는 밤송이도 많이 주웠다 -

 

- 중년의 여심에도 타는 가을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

 

- 정통 애기닢 단풍은 일부분만 물들어 있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

 

- 그 아쉬움은 시원스런 벽소령 계곡의 맑은 물이 채워 주는 듯 하였다 -

 

- 지리산휴양림도 이번 주만 지나면 단풍의 피크를 이룰 성 싶다 -

 

- 물과 수석과 단풍이 펼쳐주는 풍만한 아름다움을 보아라 -

 

- 정말 시원스런 벽소령 계곡 아니시던가 -

 

- 누리장 나무에도 빨간꽃이 피었다 -

 

- 그 아름다운 계곡에서 취하지 않을 자! 그 누가 있으랴! -

 

- 그러나 이곳의 아름다움도 이제는 별리해야 한다 -

 

 

 

 

금대암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굽어 보다

 

 

-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조선 최고의 조망처인 금대암에 도착했다 -

 

- 오른쪽에서 두번째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

 

- 금대암의 대웅전은 참으로 양명했다 -

 

- 부처님들도 양명한 햇살에 졸고 계시었으니 참으로 복받은 분들이시다(영원사 대웅전과 비슷하다) -

 

- 대웅전 위로는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

 

- 그 나한전 위, 도선국사와 보조국사가 좌선하였던 수련터에 잠시 앉아 지리산을 조망해 본다 -

 

- 대한민국 육지의 최고봉이라는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모두들 배알하고 있는 형국! 아니던가! -

 

- 그곳에 앉아 그대! 과연 무슨 명상에 들려 하시는가? -

 

- 부질없는 하세下世의 안녕만을 오로지 빌어 볼거나 -

 

- 산부추꽃 -

 

- 명상을 끝내고 잠시 나한전으로 내려 온다 -

 

- 칠성각 부처께서는 수염을 다 기르셨네 -

 

- 나한존자들이시어 누구를 우러러 보시는가 -

 

- 나한 중의 나한! 독성 중의 독성! 바로 이 분 아니시던가 -

 

- 나한들의 현대회화적인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깊은 친근감을 안겨 주엇다 -

 

- 또 언제 다시 들를 수 있을 것인가 -

 

- 야생화에 해찰하는 그대도 또 언제 이곳을 기약할 수 있을지 아시는가...... -

 

- 부질없는 인생사도 저 맷돌에 갈아 버릴까나...... -

 

- 모나리자님! 3년 전에 상무주암을 참배하고 올랐던 저 삼정산 정상(1225m)을 기억하시는지? -

 

- 금대암을 내려 오면서 잠깐 안국사도 둘러 보았다 -

 

 

 

 

실상사를 지나 달궁계곡에서 단풍을 만나다

 

 

- 안국사와 실상사를 주마간산으로 지나친 우리는 드디어 뱀사골 계곡의 심장인 달궁에 도착하였다 -

 

- 은행잎은 노랗게 변신 중이셨다 -

 

- 뱀사골 물은 예전과 다름이 없고 -

 

- 단풍들은 더 곱게 물들기 시작했다 -

 

- 아름다운 야생화에 잠시 넋이 팔리고 -

 

- 가을을 담는 여심은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

 

- 그 여심으로 물든 단이와 풍이의 조화를 보아라 -

 

- 포도에도 낙엽이 깔리니...... 정녕 가을이로구나 -

 

- 이 아름다움을 시인이여! 노래하시거라! -

 

 

 

 

지리산 노고단의 성삼재에서 노닐다

 

 

- 달궁을 지나서 노고단이 가까워 오자 하늘은 더없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하엿다 -

 

- 노고단 숲에도 정녕 가을이 찾아 왔나부다 -

 

- 장쾌한 반야봉은 그 검은 빛으로 단풍을 감추시었다 -

 

 

 

 

시암재에서 천은사골을 바라 보다 

 

 

- 성삼재를 지나 시암재에 도착하였다 -

 

- 성삼재에 단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

 

- 만복대도 아련히 단풍빛을 감추시었다 -

 

 

 

 

수도선원에서 단이와 풍이를 보듬으다

 

 

- 시암재 밑에 위치한 수도선원의 가을길을 산책해 본다 -

 

- 싱그런 하늘과 밝은 구름은 사이좋게 산수화를 그려 냈다 -

 

- 그 산수화에 어우러진 수도선원 대웅전 -

 

- 굴뚝의 기와는 세월의 더께를 안고 있는데 =

 

- 저 나무들은 누구를 위하여 과연 저렇게 단풍으로 물들었단 말인가 -

 

- 상록수는 결코 간절한 그들의 염원을 모를 것이다 -

 

 

 

 

지리산 순례를 마감하다

 

 

- 삼계절을 준비하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

 

 

 

 

단이님 풍이님

 

 

어서 오시어요

그동안

이쁜 물감으로

단장하시느라 애쓰시었오

 

무슨 말이 하고 싶어

그리 곱게 치장하시고서

단정하게 앉아 계시는지요?

 

삶은 겸허롭게

말은 진솔하게

생각은 맑게

살라고

그리,

이르시는게요?

 

 

      - 權 小 鄕

 

 

 

 

   - 비록 꽃잎 질지라도 준비하던 그 정성을 어찌 잊을 것인가 -

 

- 단풍에 물들어 삼라만상이 환희에 젖으면 그로써 족하지 않겠는가 -

 

- 그 환희심만 보았으면 내 미련이 없으리라 -

 

- 그렇게 완성의 가을은 석양을 데리고서 무심한 세월을 거두고 있었다 -

 

- 그 삼라만상의 이치를 그대!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

 

 

 

 

사계절 내내 평온하게 햇빛 내리는 날만 지속된다면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듯이 온 우주가 환희심에만 젖어들어 있다고 해도 역시 재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일게다.

 

폭설 가득 내린 뒤끝의 풍년이 더욱 찬란하게 무르익음은 말할 나위 없을테고, 태풍이 모질게 흔들고 지나가야만 자연이 더욱더 청청해지듯이, 우리네 인생사도 희노애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서로가 더욱더 귀중한 존재임을 함께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노하는 뒤끝에야 즐거움을 깨닫게 되고, 슬퍼하는 뒤끝에 가서야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대 이미 모든 것을 깨친 바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외에 그대! 더 무엇을 원하겠는가?

 

싯다르타는 생로병사를 보고서야 자신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간절한 수행자였다는 심성을 체득했다.

그러므로 희노애락을 알면 족하다. 그러므로 생로병사를 알면 그로써 족하다. 모든 것은 멸滅해가고 생生해 간다.

알면, 이미 깨친 이와 다름이 없다!

 

떨어진 고엽에도 불성佛性이 있다 하지 않으시던가!

 

 

 

 

 

- 2013년 10월 19일 완성하다 -

 

 

프로필 이미지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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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 사용시, 그 출처를 꼭 명기 바랍니다 >

 

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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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캐시디(Eva Cassidy / 1963-1996)

 

1996년 11월 2일 33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

미국 와싱톤에 있는 Blues Alley 라는 작은 클럽에서 노래하던 이름 없는 무명 가수였던 그녀는 

죽은지 6년이 지난 2001년에 영국의 BBC 방송의 'TOTP 2'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음악과 생애가 소개 되면서부터 영국인들의 가슴을 사로잡아 라디오는 물론

TV에서도 단숨에 팝송 차트 1위로 떠올랐고, 팝 앨범 판매고도 최고를 기록하여 화제가 되었고,

거꾸로 미국에서도 캐시디 선풍이 불어 닥치면서 불세출의 유명 가수로 떠올랐다.

 

 

 

Autumn Leaves

 

The falling leaves
낙엽이 떨어져
drift by the window
창가에 흐느적 거리네요
The autumn leaves of red and gold
가을 낙엽은 붉고 황금빛이네요
I see your lips,
난 당신의 입술을 보아요
the summer kisses
여름의 그 짜릿했던 키스와
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당신의 햇빛에 그을린
손등의 색이예요
Since you went away
당신이 떠난 이후에

the days grow long
많은 날들이 흘렀네요
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
머지 않아 겨울 노래들이 들리겠죠
But I miss you most of all,
하지만 난 당신이 제일 그리워요

my darling
내 사랑이여
When autumn leaves

가을 낙엽들이
start to fall
떨어지기 시작할때면 말이예요

I see your lips,
the summer kisses
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

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
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

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

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출처 : 화순 정토선원
글쓴이 : 梅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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