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2.10 사랑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 끝에 세상을 떠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작가 푸시킨. 그는 38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희곡, 시, 소설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걸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학 세계를 펼쳐 보였다. 러시아의 국민적 작가에서 더 나아가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사랑과 영광과 비극은 어떠했는가?
아내를 탐하는 남자로부터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고 결투를 벌이다
‘장사꾼은 일어나고 행상인은 거리를 지나가고, 마부는 대기소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오흐따에 사는 처녀는 물동이 이고 총총, 발 밑에선 밤새 내린 눈이 뽀드득. …… 정확함을 자랑하는 독일인 빵집 주인, 종이로 만든 고깔모자 쓰고서, 벌써 몇 차례나 쪽문를 열어젖힌다.’ ([예브게니 오네긴] 중에서)
그 날도 페테르부르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오후 4시가 넘어교외 공터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주변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두껍게 눈이 쌓인 러시아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총을 든 두 남자의 눈가에 분노와 긴장이 갈마들어 감돈다. 정적을 깨뜨리며 발사된 총탄. 한 남자가 배를 움켜쥐며 눈밭에 쓰러진다. 눈밭을 적시는 낭자한 선혈. 온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채 겨우 일어난 남자가 소리친다. “브라보!”
남자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12번지에 있는 집으로 급히 옮겨진다. 때는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경. 남자는 이후 이틀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 아내는 남편의 비명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자기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방에 들어왔다. “얼음을 달라!”
아내가 갖다 준 얼음을 이마에 올려 굴리다가 얼음을 먹는 남자. 그가 입을 연다. “잘 있어! 친구들!”
곁을 지키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 느닷없이 친구라니. 그가 부른 친구란 서재에 있는 책들이었다. 남자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에서 책 더미 위로 올라갔어요. 책 더미가 너무 높아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지요.”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모이카 12번지 주변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놀라 명령을 내렸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모스크바에있는 푸쉬킨 동상
결국 남자는 2월 10일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 구력(舊曆) 1월 29일. 신력으로 2월 10일 오후 2시 45분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푸슈킨, 푸쉬킨)이 38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법으로 금지돼 있던 결투를 벌인 푸시킨의 상대는 조르주 단테스.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군 장교로 네덜란드 공사 헤케른의 양자였다. 푸시킨이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단테스는 푸시킨에게 결투를 신청한 터였다.
그들이 결투한 곳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결투를 위해 두 사람이 각각 자리 잡았던 곳이다.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는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렌스키의 운명이 곧 푸시킨의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소설이 하나의 예언이었던가. 꽃다운 16살 소녀 곤차로바를 처음 만나 ‘아!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여인이야!’라며 정열을 불태웠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매혹적인 자태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1831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들을 남겨두고 푸시킨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곤차로바는 1844년 재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과 결혼하기 전부터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던 곤차로바는, 결혼 후 조르주 단테스와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단테스는 끈질기게 푸시킨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했고 이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푸시킨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결투 신청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단테스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더구나 푸시킨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식의 악의에 찬 조롱이었다. 푸시킨은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위와 같은 비극으로 끝났다(그러나 이 결투가 러시아 궁정 내부 세력이 푸시킨을 제거하기 위해 꾀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푸시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평소 시(詩)나 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푸시킨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유명한 시를 접해 본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한다. 서럽고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한 우리의 비루한 삶. 푸시킨은 그런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라 하면서도 미래의 기쁜 날을 향한 소망을 간직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푸시킨 자신의 최후는 사랑이 푸시킨을 속인 끝에 슬프고 노하여 맞이하게 된 셈이라 하겠으니, 이 또한 삶의 아이러니라 할까.
푸시킨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생기다
화가 일리아 레핀이 그린 '차르스코예 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시킨'(191)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 푸시킨. 러시아 황실의 여름 궁전이 있는 이 도시의 본래 이름은 차르스코예 셀로, 즉 ‘황제의 마을’이었다. 18세기 초 표트르 1세가 건설한 도시로,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운 별궁(이후 황실 여름 궁전으로 이용됐다)이 있었던 곳. 1937년에(푸시킨 서거 100주년) 오늘날과 같은 푸시킨 시로 명명된 것은 알렉산드르 1세가 그곳에 세운 학교 리체이에서 푸시킨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푸시킨은 1815년 리체이의 상급반 시험장에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하여 시인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화가 일리야 레핀은 ‘차르스코예 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시킨’(1911)이라는 그림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리체이 시절(1811~1817) 푸시킨은 자유주의적 기풍에 물들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참여했다. 학업을 마치고 외무성에 근무했지만 혁명적 사상가 및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농노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굳혀나갔다.
‘네가 주인이다 / 홀로 살아가라 /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하고 노래했던 푸시킨은 바로 그렇게 자유를 찬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러시아의 낙후된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꾼 데카브리스트 구성원들과 교류하며 그들에 공감했고, 1824년에는 국외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집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에 유폐되어 계속 창작에 몰두했고, 유폐라는 고독하고 불우한 상황이 푸시킨을 예술적, 사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가 괴멸당한 뒤 유폐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러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성찰과 민중에 대한 관심은 푸시킨에게 호흡과도 같았다.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 러시아어의 발전에도 기여
푸시킨의 시적(詩的) 단편 드라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피터 셰이퍼의 [아마데우스]에 영감을 제공했고, 푸시킨 자신이 큰 애착을 갖고 있던 시적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역(英譯)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국민 음악파의 창시자로도 평가 받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는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바탕을 두어 동명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글린카는 ‘국민이 음악을 창조하며 음악가는 그것을 편곡한다’는 생각으로 민중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푸시킨의 문학 세계야말로 음악적 영감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었다. 비단 글린카뿐만이 아니었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마제파] 등도 푸시킨의 작품이 원작이며,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라흐마니노프의 [알레코](푸시킨의 작품 ‘집시들’에 바탕을 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술탄 황제 이야기] 등도 마찬가지다.
푸시킨의 시 [예언자]의 내용을 그려낸 작품(1905년, 알렉산드르 푸시킨 뮤지엄 소장)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의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낭만주의라는 말만으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규정하기는 힘들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 리얼리즘으로 가는 길을 반영한다고 본다. ‘낭만주의적이었으되 낭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푸시킨은 또한 러시아 문학의 발전뿐 아니라 러시아어 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어 표현에서 부족함을 느낄 때 그는 과감하게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내기도 했고, 풍부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문장 표현은 러시아 문학을 푸시킨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할 정도였다. 서유럽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던 19세기 러시아에 푸시킨은 유럽의 모든 문학 장르를 도입시켰다. 서정시, 서사시, 소설, 단편, 에세이, 희곡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창작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푸시킨이 아니었다면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톨스토이 등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내 그대를 사랑했노라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내 영혼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나니
그러나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도 방해하지도 않나니
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니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이야기도 희망도 없이
때로 나의 소심함과 때로 나의 질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조심스레
신의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대를 사랑한 것만큼
곤차로프와 결혼하기 전 안나 올레니나라는 여인을 열렬히 사랑했던 푸시킨이 당시의 심정을 담은 시다. 이룰 길 없어 보이는 사랑에 대한 푸시킨의 애절한 마음. 그 마음은 문학을 향한 열정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