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 - 1551 )

강나루터 2022. 7. 13. 06:31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 - 1551 )◈
 
1. 생애와 일화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서화가. 강릉 출생.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또한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 7세 때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풀·벌레 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어린 시절 어느 날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림 속의 메뚜기를  닭이 와서 쪼아 버렸다고 한다.
 네 아들과 세 딸을 진정한 사랑으로 키웠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엄격한 교육을 하였다. 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 받은 7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모두들 인격과 학식이 뛰어났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닦았다. 그리하여 예술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으로, 또 훌륭한 어머니로서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어 존경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 시  <사친>과  그림 <산수도>, <자리도>, <초충도> 등이 있다.
 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
  "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
 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보겠습니다. "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
 과연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 때는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이다.
 
 2. 출생과 성장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시·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 (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3. 출가후의 생활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4. 자질과 재능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 외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 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화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 그림과 글씨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 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6.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고하고 자기 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그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7.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 생각해 봅시다
 
 '사(師)'는 스승이니 본받는다는 뜻이요, '임(任)'은 옛날 중국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이라는 부인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가 가장 현숙한 부인이었던 태임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사임(師任)'이라고 지은 것 이다. 일찍이 1868년에 강릉 부사였던 연제 윤종의라는 분이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에 새겨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적은 발문 가운데에서도,"……과연 그 필적에 이르러서는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고요하여 더욱 더 부인께서 저 옛날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라고 한 구절이 있고, 또 거기에 이어서 온 유재 윤종섭이라는 분도 시를 지어 사임당을 예찬하였다.
 
. □ 사임당의 삶의 자세는 어떠하였으며, 윗 글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어느 날, 사임당은 남편인 이공과, 10년 동안 서로 헤어져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맺었다. 마침내 이공은 사랑하는 부인을 처가에 남겨 두고 서울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공은 며칠동안 계속 집으로 되돌아 왔다. 사임당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바느질 그릇 에서 가위를 끄집어내어 이공 앞에 놓고, 심각한 목소리로, “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오래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이공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하고 부인과 작별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공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뜻을 이루었다.

 

 

 


초충도-가지와벌

초충도-수박과들쥐

 


초충도-오이와개구리

초충도-양귀비와 도마뱀

초충도-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초충도-원추리와 개구리

초충도-어숭이와 개구리

(설명)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비슷한 구도의 초충이 그려진 여덟 폭의 병풍인데,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다. 그림이 아닌 나머지 두 면에는 {G:신경}과 {G:오세창}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다. 각 폭마다 화면의 중앙에 두 세 가지의 식물을 그린 다음에, 그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풀벌레를 적당히 배치하여 좌우 균형과 변화를 꾀하였다. 이 〈초충도〉는 형태가 단순하고 간결하여 규방(閨房)의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하던 자수(刺繡)를 위한 밑그림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여러 가지 청초한 식물과 풀벌레를 실물에 가깝게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섬세하고 선명한 필선으로 묘사하여 여성 특유의 청초하고 산뜻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屛風)-지방 유형 문화재 제41호 (조선 시대)  강릉시 죽헌동 201 (율곡 기념관)
이 병풍은 당시(唐詩)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초서로 쓴 것으로 강릉시 두산동 최돈길가(家)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1971년에 강릉시가 양수하여 율곡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병풍이 최씨 문중에 있게 된 것은 사임당의 이종 손녀(권처균의 딸로 최대해의 처)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영조 때 이 글씨가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당시 부사 이형규가 되찾아 주고 병풍으로 꾸며 보관하게 하였다.
고종 6년(1869)에 최씨 집에서 불이나 온 집안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당시 안주인(김씨)이 80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불길 속에서 제일 먼저 이 병풍을 끌어 내고 숨졌다 한다. 그 후 부사 윤종의가 이러한 일이 다시 있을까 염려하여 판각(板刻)을 만들었으며 이는 현재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포도도
'포도'는 신사임당(1504-1551)의 회화작품으로 종이에 먹으로 그린 것이다.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진 포도나무의 한 부분을 그린 것으로서 화가의 세밀한 관찰력과 뛰어난 회화적 표현력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성다운 필치에 먹빛도 매우 밝아서 그가 그린 포도 그림들 중에서도 제일 잘된 작품이다.햇가지와 묵은 가지, 잘 익은 알과 아직 선 알 등이 갈라 보이고 포도알들과 잎사귀, 굵은 가지와 감김손 등이 모두 실물을 보는 것이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그림을 이윽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 결에 입 안에는 달면서도 새콤한 침이 고이게 된다.신사임당의 재치 있는 포도 그리기 솜씨를 전하여 주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 잔치집에 간 그는 심부름하던 한 여인이 빌려 입고 온 치마를 어지럽혀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그는 얼룩진 치마를 펴 놓고 붓을 들어 그 위에 포도를 그렸다.
소담한 포도송이와 힘차게 뻗은 줄기, 이슬 맺힌 잎사귀 등을 단숨에 그려 나가는데 신기하게도 얼룩이들이 그 그림 뒤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지러웠던 치마가 순식간에 훌륭한 꽃치마로 변하였으며, 그 값이 당장에 몇 곱절로 올라서 그것을 팔아 새 치마를 사서 돌려 주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기발한 재능과 함께 뜨거운 인간성과 강한 의협심을 전하여 주는 이야기이다.

31.5x21.7cm
비단에 수묵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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