菊花(국화)
菊花(국화)
三月開花綿作城 (삼월개화면작성) 삼월에 꽃을 피워 비단 같은 성을 만들고는
如何秋盡菊生英 (여하추진국생영) 어찌하여 가을이 다 지나고서야 국화는 꽃을 피우나
化工不許霜彫落 (화공불허상조락) 조물주가 서리에 시들어 떨어짐을 허락지 않는 것은
應爲殘年未盡情 (응위잔년미진정) 저물어가는 해의 다하지 못한 정을 위해서겠지?
국화는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고상한 품위는 예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식물이다. 남명 선생이 강론하던 산천재 뜰에는 남명매(南冥梅)라 칭함을 받는 매화나무가 있고, 난초와 국화가 있으며 대나무가 주위를 둘렀다. 춘삼월(春三月)부터 온갖 꽃들이 울긋불긋 다투어 꽃을 피워 비단 같은 성을 이루었다고 작자는 표현했다. 하지만 국화는 그 좋은 시절 다 보내고, 그것도 가을이 다 지나고서야 꽃을 피워 그윽한 향기를 발한다. 그래서 여타 꽃들보다 돋보여 귀히 여기는지도 모른다. 찬바람에 낙엽이 질 즈음 된서리를 맞아도 국화꽃은 쉬 떨어지지 않는다. 조물주의 허락이 없는 된서리를 맞고서도 꽃이 떨어지지 않는 걸로 봐서 “저물어가는 해의 정을 위해서겠지”라고 작자는 아쉬움과 함께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은 외가인 합천 삼가에서 출생했다. 처가가 있던 김해 신어산(神魚山) 자락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18년간 학문을 강론했다. 다시 합천 삼가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다가 회갑 년에 지리산 양단수(兩端水)가 합(合) 하여 덕천강(德川江)을 이루는 곳, 산청군 시천면 덕산(德山)에 이주했다. 눈을 들면 지리산 정상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그곳에다,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덕천서원(德川書院) 인근에 있고 후학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려 건립한 덕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남명 선생의 제자들로는 망우당 곽재우, 김종직 선생 등 훌륭한 인재를 길러냈다. 산수(山水)가 그윽한 덕산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 흡족했는지 그 유명한 시조 두류산 양단수를 남겼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 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