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보는 경제] 추사(秋史)와 이상적의 장무상망(長毋相忘)
- 이준훈 시인, BCT 감사 opinion@etoday.co.kr
조선후기 명문가에서 태어나 중국에까지 이름이 난 학자인 추사도 당쟁을 피할 수 없었다. 나이 54세가 되던 1840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당시 관직은 병조참판, 섬으로의 유배는 종신형이었다. 유배 4년 차인 1843년 철저한 절망 아래 있던 추사에게 이상적이 ‘황조세경문편’이란 책을 멀리 제주도로 보낸다. 120권 79책을 받아 본 추사는 감동했다. 연행(燕行)길에서 어렵게 구했고 힘들게 가져온 것이리라.
1년 후 추사는 그림 한 점을 그린다. 그리고 아래의 글을 덧붙여 이상적에게 보낸다. “지난해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이 말하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는 그러지 않으니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前)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성인이 특히 송백(松柏)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따로 마음에 느낀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과 정당시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이 모였다 흩어지곤 하였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17세 연하인 역관 이상적이 어떻게 추사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이상적은 통역관이었지만 시문에도 밝아 추사의 문하를 자처했고 연경에 문우가 많았다. 왕홍(王鴻)과의 30년 교우가 특히 회자되었다. 말년에는 온양군수를 지냈다.
추사의 그림과 글에 이상적은 곧 답장한다. 그의 답서는 감격과 겸손으로 시종(始終)한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으려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평생 중국을 열두 번 다녀왔다. 1845년 봄 이상적은 연경에 갔다. 세한도(歲寒圖)를 청나라 문사 16인에게 보이고 제찬(題贊)을 받아 왔다. 이후 세한도는 제작과정만큼이나 곡절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長毋相忘은 추사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한나라에서 사용한 흔적이 있고 추사의 절친인 권돈인도 세한도를 그렸으며 長毋相忘이란 낙관을 사용하였다.
長毋相忘, ‘오래도록 그대를 잊지 않겠다’라는 뜻으로 고쳐 읽는다. 청유가 아니라 다짐으로. 바야흐로 시절은 엄동(嚴冬)이고 경제는 설한(雪寒)이다. 송백이야 제 홀로 설한을 견디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엮어 이 엄동을 버틸 수밖에. 그래서 그러므로 長毋相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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