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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연 없는 중생은 별 수 없구나…” - 경허선사

강나루터 2014. 9. 1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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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성우(鏡虛禪師 惺牛) (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큰스님> (법보신문사. 1992).

 

글출처: 부타피아 http://bud.buddhapia.com/person/goseong/kyongh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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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鏡虛集 (1942년, 중앙선원 刊)

 


1942년 비매품으로 간행된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 표지와 이 판본에 수록된 경허선사초상

 

 경허는 1912년 4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채로 북방의 고원에서 입적한다. 일년 뒤 이 소식이 수덕사의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혜월과 만공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였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각 선원은 5원, 각 개인은 50전 이상씩 연조금을 모아 인쇄한 것이다. 이것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鏡虛集?으로 당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다.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歌의 일부만 한글일 뿐 나머지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한용운의 序부터 시작하여 한적본의 면수로 60면, 즉 오늘날의 면수로 120면에 이른다.  

 

글출처:  http://www.gosinga.net/archives/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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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향해 사자후를 포효하다!-경허집 영문판 출간

 

한국근대불교 중흥조, 경허선사의 법문과 선시를 담은 경허집 영문판 출간

한국불교를 되살린 경허 선사의 원력이 세계를 향해 외치다.


조계종 출판사는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경허선사의 법문과 선시를 담은 경허집 영문판을 출간하였습니다. 이번 번역 사업은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있어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며 앞으로 있을 한국사상서 번역사업의 효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번역사업은 문화관광부의 한국문화체험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1년간의 노력을 기울여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경허집 영문판은 통도사 극락선원 명정 스님이 한글로 번역한 「경허집」을 모본으로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영의 명예교수가 번역을 맡고, 미국 미시건대 한국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매티 베게하우프트와 미국 UC버클리 종교학 박사출신으로 현재 해인사 승가대학장 소임을 맡고 있는 법진 스님이 감수를 맡아 진행되었습니다.


혼란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어떤 경계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한 삶을 살았던 경허선사(1846~1912)는 선(禪)을 걸망에 짊어지고 나라 구석구석을 만행하며 깨달음에 목말라 하던 구도자들에게 새로운 길과 희망을 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벌어졌던 선객으로서의 일화, 혹은 수월, 혜월, 만공, 한암 등 제자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허스님의 탁월한 사상과 행장이 지금까지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번 출간을 계기로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본 경허집 영문판The Collected Writings of Gyeongheo」은 각각 250쪽이 넘는 산문집과 시집의 2권 1질로 구성되어 있만? 시집의 경우는, 5언절구, 7언절구 등 다양한 형식의 한시와 오도송, 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산문집은 법문, 서문, 스님들과의 편지, 선사들의 행장 등이 실려 있어 경허스님의 사상과 당시 불교계의 정서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경허집 영문판을 제작한 조계종 출판사는 “전 세계 불교단체와 해외 사찰에 우선 배포될 예정이며, 추후 해외시장의 진출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하며 “이로서  2년 전 번역 출간했던 백운화상의 「직지」(영문명 Jikji), 금년 3월 출간된, 한국불교를 빛낸 25분의 선사행장을 소개한 「선사행장」(영문명 The Great Seon Masters of Korea), 이번에 개정판이 나오는 한국불교 가이드북인 「What is Korean Buddhism?」등을 연속 출간하게 되어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큰 동력을 갖추게 되었다.”며 간화선 대중화와 더불어 한국불교 세계화를 모토로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종단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전법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경허집 영문판 문의: 대한불교조계종 출판사 남원근 팀장 (전화 02-733-6390)

 

글출처:대한불교조계종홈페이지 http://www.buddhism.or.kr/news/board/view.aspboard_type=2&board_seq=13&article_seq=41642&page=1&temp_fl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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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靈鷲叢林 극락선원 석명정 스님의 경허집 한글 번역본 (1990판)

끝 사진의 명정스님의 후기에서 보듯이 한암선사(漢岩禪師)의 육필본 [鏡虛集]을 텍스트로 하였다 한다.

경허선사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으로  되어있다.

 

명정스님은 입적하신 영취총림 경봉선사의 맞상좌로, 한시와 선시에 일가견을 이룬 학승으로 통도사 극락암 원주, 극락선원장을 하셨으며

경봉선사께서 계시던 극락암 삼소굴(三笑窟)을 돌보시며 노화상들의 법문과 말씀을 번역 출간하고 저서를 출간 하기도 하였다.

경허집, 한암집, 경봉집, 경봉스님 말씀 법해 등을 번역 출간 하였으며, 저서로는 茶이야기 禪이야기 등이 있으며,

茶에도 일가견을 이루신 분이다. 

 

 

한용운 선사의 한문 序 

 

한글번역 

 

경허집발간취지서 한문 원문 

 

한글번역 

 

 

만해의 경허스님 약보 한문 원본과 한글번역

 

통도사 극락암 석명정 스님의 후기

 

 

 

경허 큰스님이 서산의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다.

하루는 경허 큰스님의 형이신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이 인근에 사는 갈산 김씨네 49재를 올리기 위해 장을 크게 보아다가 온갖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 당시만 해도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라 동네에 큰 제사나 잔치가 있다고 하면 떡과 과일을 얻어먹기 위해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진설명>경허 스님이 누더기 한 벌로 보임하며 주석했던 천장암.

천장암에서 아무날 아무시 갈산 김씨네 49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장암으로 모여들었다.


산 사람에 공양물 보시

법당 안에 차려진 온갖 떡과 과일, 동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군침부터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49재를 올리기 위해 태허 주지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오고 경허 큰스님도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지극정성으로 49재를 올려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갈산 김씨네 가족들도 엄숙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막 49재를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법당 밖에 구름처럼 몰려와서 법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한바퀴 둘러보고 난 경허 큰스님이 느닷없이 법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시더니 아직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는 법당 밖에 서있던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닥치는 대로 나눠 주는게 아닌가.

주지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아직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나눠줘 버리다니!.”

상주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할말을 잃고 있었다. 이 때 경허 큰스님이 한 말씀하셨다. “제사는 바로 이렇게 지내는 게 제대로 지내는 것입니다. 영가께서 극락 왕생하려면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베풀어야하는 법이거늘, 여기 모인 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과 과일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이 공덕으로 영가께서는 반드시 극락왕생 하실 것이오.”

이 말씀을 듣고 난 상주들은 기쁜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경허 큰스님께 합장 배례했다.

경허 큰스님은 제자 만공을 데리고 탁발을 나가시곤 하였다. 어느 해 여름 두 스님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탁발한 곡식을 걸망에 짊어지고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탁발을 하느라 돌아다녔으니 몸은 고단하고 걸망은 무거웠다. 젊은 만공이 먼저 지쳐 경허 큰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 걸망이 무거워서 더 이상 걸어가기가 힘듭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경허 큰스님이 제자 만공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버려라.”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버리라니요?”
“무겁다는 생각을 버리든지, 아니면 걸망을 버리든지 하란 말이다.”
“에이 참 스님두, 하루 종일 고생해서 탁발한 곡식을 어찌 버리란 말씀이십니까요? 아 그리구 무거운 건 무거운건데 그 생각을 어찌 버립니까요?”

경허 큰스님은 휘적휘적 앞서가기 시작했다. 제자 만공이 허겁지겁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 갔다.

“스님, 정말 숨이 차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저 마을 앞까지만 가면, 내 힘들지 않게 해줄 것이니 어서 따라 오너라.”

제자는 마을 앞까지만 가면 힘들지 않게 해준다는 말에 혹시나 하고 스승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마을 앞에는 우물이 있었고 그 근처 논밭에서는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 아낙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스님들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경허 큰스님이 느닷없이 그 아낙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어 버렸다.


도망칠 적에도 무겁더냐?

에그머니나! 아낙이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가 박살이 났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삽을 들고 괭이를 들고 “저 중놈들 잡아라!” 외치며 달려왔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자 만공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죽어라 뛰었다. 경허 큰스님은 벌써 저만치 앞서서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달렸을까.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저만치 솔밭에서 경허 큰스님이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 너도 용케 붙잡히지 않고 예까지 왔구나.”
“스님, 속인도 해서는 안될 짓을 왜 하셨습니까요?”
“그래, 그건 그대 말이 맞다. 헌데 도망쳐 올적에도 걸망이 무겁더냐?”
“예에?”
그 순간 만공은 깨달았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구나

경허 큰스님이 가야산 해인사의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다. 경허 큰스님은 이미 곡차와 육식을 거리낌없이 들고 계시는 터라 젊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시비가 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북풍한설이 몹시도 몰아치던 날 수건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어느 젊은 아낙이 경허 큰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날부터 경허 큰스님은 그 아낙과 한방을 쓰고, 공양도 그 아낙과 겸상으로 드셨다. 수행자들 사이에 다시 말이 많아졌다. 아무리 도통한 큰스님이시기를 곡차에, 육식에 이제는 여색까지 탐하시다니, 이건 너무 하신게 아닌가!

<사진설명>해인사 퇴설당의 경허 스님 친필 현판.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자 제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승께 읍소했다.

“스님, 제발 그 여자를 그만 내치시옵소서.”
제자들이 하두 이렇게 읍소를 하자, 드디어 방문이 열리고 문제의 그 아낙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낙은 나병에 걸려 코도 없고 얼굴도 문드러진 중환자였다. 그 아낙은 울면서 말했다.

“큰스님께서 따뜻한 방에 재워주시고, 따뜻한 밥 먹여주시고 고름까지 닦아 주셨으니 이제 곧 죽어도 애한이 없사옵니다.”

그러면서 그 아낙은 정처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경허 큰스님도 걸망하나 메고 해인사를 떠나면서 말했다.

“인연 없는 중생은 별 수 없구나…”

 

 

 

 

 

 

경허선사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적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일찍이 부친상을 당해 9세 때 경기도 광주 청계사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4세 때 청계사에 머물렀던 박처사(朴處士)로부터 글을 배우며 재동으로 칭송이 자자하던 중 은사 계허스님이 환속하면서 추천한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만화강백(萬化講伯)을 찾아가 일대시교와 유교경전과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23세 때부터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서 크게 명망을 떨치다가, 31세 때 여름 옛 은사스님인 계허스님을 찾아뵈러 가던 도중 천안 인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닫고 비로소 대발심하여, 동학사에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하며 강원을 철폐하고 영운선사 (靈雲禪師)의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라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중 11월 보름경 한 사미승이 전하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하였다. 이때가 고종 16년 1879년 11월 보름경이었으니, 한국근대선이 개안開眼하는 순간이며 한국불교가 중흥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32세 때 봄에 연암산 천장사 (天藏寺)로 옮겨 보림을 하여 33세 때 일대사를 마치고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이로부터 20여 년간 천장사・ 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하여 호서(湖西)일대에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며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으며, 영호남의 해인사・범어사・송광사 일대에도 유력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를 제접하면서 선을 중흥시켰다. 56세 때 천장암에 돌아온 경허는 만공에게 전법송(傳法頌)으로 후래불법(後來佛法)을 부촉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법회에서 법문하고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를 증명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앎은 적고 이름 높아 어지러운 이 세상에
알 수 없네 그 어디에 이 몸 감추랴
어촌인들 술집인들 어찌 그곳 없으랴만
숨긴이름 더욱 새로워질까 저어할 뿐인 것을.

 

1905년 57세 이후 경허는 삼수(三水)・갑산(甲山)・장진(長津)을 떠돌다가 강계군의 김탁(金鐸)의 집에 머물며 선비 박란주(朴蘭洲) 또는 유발거사 박진사(朴進士)로 훈몽생활(訓蒙生活)을 하기도 하고, 관서와 관북 일대는 물론 만주지방을 비승비속 차림으로 떠돌며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다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법랍 56세, 세수 64세로 입적하였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어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경허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1938년에 중앙선원中央禪院이 발행한 경허집『鏡虛集』과 1970년에 다시 영인발행된경허당법어록『鏡虛堂法語錄』・1981년에 인물연구소人物硏究所가 발행한 경허법어『鏡虛法語』・1990년에 극락선원極樂禪院에서 발행한 경허집『鏡虛集』이 있는데, 이에는 경허가 남긴 법어, 서문, 기문, 서간, 행장, 영찬, 시, 가 法語・序文・記文・書簡・行狀・影贊・詩・歌 등이 실려 있다. 

 

출처 : 逍遙遊(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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