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스크랩] 풍기향교 이야기

강나루터 2014. 9. 12. 14:50

 

 

 

 

 

 

 

 

 

 

 

 

 

 

 

 

 

명 칭 :  풍기향교(豊基鄕校)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 147-1
(원소재지 : 경상북도 영풍군 금계동 임실 마을)
건 축 주 :  조선 왕조
건축시기 :  미상
소 유 자 :  경상북도 향교재단(관리자 : 경상북도 향교재단)
문 화 재 :  시도유형문화재 제211호(영주시), 1985-10-15 지정

건축 배경
풍기향교는 원래 금계동에 있었으나 1542년(중종 37)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그 후 1692년(숙종 18)에 옛터로 다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6·25전쟁 때 동재와 서재, 양심루(養心樓)가 불에 타 없어졌으며, 현재 대성전(大成殿)·명륜당(明倫堂)·동무(東廡)·마마무(摩摩廡)·서무·헌관청(獻官廳)·교직사(校直舍) 등이 남아 있다.

건축 구성
대성전과 명륜당의 축을 서로 달리하고 명륜당의 우측 뒤쪽에 담장으로 경계를 하여 건립된 우묘좌학(右廟左學)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내부를 통간(通間 : 집 안의 칸을 막지 않고 서로 통하여 하나로 된 것)으로 하였다. 동무·서무는 대성전 전면의 안마당에 대향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굴도리 맞배집이며, 내부는 통간의 온돌방으로 꾸몄다.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1출목 익공계 건물이다. 평면구성은 좌측에 2통간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마루방이다. 헌관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전퇴 5량가 굴도리집이다. 평면은 좌측 2통칸 온돌방에 연달아 온돌방 2칸이 놓여 있고, 우측 앞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관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3량가이다.

 

관련인물
- 풍기향교를 정비한 영남 교육의 정초자 주세붕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본관이 상주(尙州)이고, 자가 경유(景遊)이며, 호가 신재(愼齋)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강원도 도사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 군수로 나갔다가 1543년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을 세웠고, 풍기향교를 이건, 정비하였다. 주세붕은 서원과 향교를 통해 사림을 교육하고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 조정의 공인을 받은 교육기관이 되었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 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 관찰사 때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 : 문헌서원)을 세워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재차 대사성·성균관 동지사를 지내고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렀다.
- 교안(校案)

향교의 교생안으로 액내(額內)·업유(業儒)·액외(額外)·동몽(童蒙)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액내는 향교의 정식 학생, 업유는 중서층, 액외는 상천민층, 동몽은 어린 아이로 생각된다. 8개년의 인원이 기록되어 있다.
- 액안(額案)

정식 학생만 기록한 명부이다. 정식 학생 수는 50명이며 9개년의 기록이 남아 있다.
- 교임안(校任案)


원 제목은 확인할 수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교임안임을 짐작할 수 있다. 1683년부터 1752년까지 교임을 맡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에 이름과 자,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으며 뒷부분에는 교임을 수행한 간지가 쓰여 있다.


 

영주 > 풍기권 > 교촌리
- 풍기향교의 학맥을 이어오는 교촌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는 본래 풍기군 서부면 지역이다. 교촌리는 향교말·향교촌·새 향교골 또는 신교촌·신교동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등고동을 병합하여 교촌동이라 하고,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되었다. 교촌동은 동으로 산법리, 서로 금계리와 인접해 있으며 동양대학교와 풍기향교, 풍기공업고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교촌동은 1·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1리는 향교마, 2리는 등두들이다.


등두들은 향교 마을 북쪽 산언덕에 있다고 해서 등두들 또는 등고·등구라고 불렸다. 이곳에는 지난 날 등두들 가운데 동신당이 있어 매년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등두들의 북쪽에는 숯가마가 있었다.


교촌리는 풍기향교의 학맥을 이은 동양대학교가 현재 이곳에서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동양대 맞은편 잠뱅이재 구릉에는 옛날에 와요지가 있었으며, 풍기공업고등학교 자리엔 정림사지가 있었다.


풍기향교는 금계리 임실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2년(중종 37)에 교촌리로 옮겨 놓았다. 1692년(숙종 18) 풍기군수 정승이 금계리로 옮겼으며, 1735년(영조 11) 군수 임추가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동서무·명륜당·동재·서재·양심루 등이 있었으나 6·25 전쟁에 동재·서재와 양심루가 불탔다

출처 : 豊友會
글쓴이 : 시보네/54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