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40년동안 만화일기를 쓴 송광용>
1.‘곱구나’ 생각했던 인생
영월 책 박물관에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동안 나는 줄곧 박물관에서 만났던 한 작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바로 송광용이라는 만화가이다. 그를 만난 후 그의 특이한 인생경력과 쓰라린 삶에 대해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우선은 그를 얘기할 때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안타까움을 조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얘기를 하는 사람은 냉정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스스로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얘기를 끝마칠수 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끝마치고 싶어서 거칠어진 나의 숨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두 달이 지난 지금은 담담하게 그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목소리에는 결코 그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배여 있지 않을 것이다.
8월 12일. 동글이를 데리고 간 영월 책 박물관에서 전시된 책을 보다가 나는 이상한 책이 한 무더기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딘지 촌스럽지만 사람냄새가 나는 책이었다. 갱지를 반으로 접어 A4크기로 제본한 그 책은 표지에 일련 번호가 적혀 있었고 페이지마다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 있었다. 관장님한테 물어보니 그 책이 바로 송광용이란 만화가가 중학교1학년 때부터 4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라고 했다. 권수로는 131권이었고 일기를 쓴 기간은 1952년 5월부터 1992년2월까지였다. 세계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만화책은 그러나 1990년 영월지역홍수 때 30권이 물에 잠겨 소실되어서 현재는 101권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작가는 30권을 잃은 좌절감 때문에 얼마 후 만화일기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끝마쳤다. 그 날이 1992년 2월 9일이었다. 한 사람의 역사를 기록한 만화일기에 마침표가 찍어진 날이었다.
송광용은 193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 밑으로 다섯 살, 두 살 하는 동생들도 엄마를 잃었다. 영월화력발전소에 근무하는 아버지 곁에 새 어머니라는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고 또 새로 들어오곤 했다. 무섭도록 빈곤했던 살림살이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대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보리쌀마져 외상으로 가져다 먹어야 하는 생활이었지만 학급 급장을 놓치지 않았다. 동생들은 ‘빤쓰가 없어서 홑 쓰봉 딱 하나만을 입고’ 다녀야했고 그의 신발은 모두 떨어져서 길을 걸을 때면 절벅절벅 발 안으로 진흙물, 빗물이 그득히 고였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신동헌, 김성환, 김용환 같은 만화가로 이름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1때부터 만화일기를 시작했다. 우연히 빌려 보게 된 『학원』잡지에는 그의 멘토 김성환 화백의 「꺼꾸리군 장다리군」과 「빅토리 조절구」가 연재되고 있었다. 그도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김성환 화백을 능가하는 만화가가 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이곤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미술작품을 그려서 꼭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보내는데도 돈 천 환은 들어야 한다. 우선 내 손에 붓이 있나, 물감이 있나, 충분히 갖추어야 할 물건이 하나도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1956년 5월 18일)
젊은 소년은 ‘욕심이 많았다.’ ‘이름을 날리고 싶고 아버지 말처럼 인기도 끌고 싶었다.’ 그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심심산천에 한 떨기의 장미로 태어나서 그 고운 빛깔을 어느 한 사람에게 보이지도 못한 체, 그대로 시들고 마는 장미꽃’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꽃피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그것은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만화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기 종이를 사가지고 와서 ‘짜르고, 꿰매고, 하느라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간’ 줄도 모를 정도였다.(53년 12월 6일)
비록 친구 (생일)잔치날에 ‘거울쪼각이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야할 터인데 동전 한 푼 없고 또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양말이라도 꿰매신고 간다든가’ 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 갈 수 없었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힘들 때면 유명한 만화가들을 거울 삼아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보면서 견디었다. 미국의 만화가 칙영(Chic Young)의 “블런디” 만화를 따라 그려 보기도 하고, 신동헌, 김성환, 김용환, 김경언, 정한기, 박기정의 만화를 보며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또 ‘미국 만화영화계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위대한 만화가 월트 디즈니’의 생애를 읽으면서 ‘그의 실패! 그의 인내성! 그리고 연구하고 꾸준한 노력’에 대해 배우면서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펜촉 하나 사기 힘든 가난을 오직 만화를 그리겠다는 열망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가난은 용서할 수 있었지만 행여 자신이 조금이라도 만화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면 가차없는 자기비판이 뒤따랐다.
-만화를 그려야 한다. 만화를 그려야 한다예술가를 꿈 꿀 사람이 매일 운동가 모양으로
강에 나가서 잠수를 해야할까. 예술가는 운동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언제나 살결이 대부분이 희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온몸뚱이가 황소빛 같은 것이다.- (1956년 8월 2일)
강에 나가는 것이 취미삼아 낚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물고기를 잡기위한 것이었어도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감을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펜촉이라도 더 닳게 하고 하나의 종이라도 더 소비시켜서 나날이 그리고 발전시켜야 할’ 만화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장편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목은 ‘곱구나’였다. 그는 만화원고를 조선일보사, 학원사 등의 신문과 잡지에 투고해서 상을 받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보낸 원고에 대해 답이 없을 때면 직접 서울에 있는 잡지사를 찾아가서 만화가들을 만나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냉혹해서 실력만으로는 안되는 곳이 서울이라는 것과 만화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차 실망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영장이 나왔다. 남들은 섭섭하게 생각하는 입영이 그는 ‘지방 풍습이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이 그림일기에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뻤다.
훈련소 생활은 ‘밥이 적어서 툭하면 싸움이벌어지는데 두 그릇 먹으려다가 들켜서 얻어 터진 놈, 간을 더 먹으려다가 얻어 터지는 놈’을 비롯해서 ‘훈련병들이 배를 곯아서 솥에 눌러붙은 누룽지를 훔쳐먹다 물벼락맞고 쫓겨나오고 심지어는 코피까지터진 사람들’ 속에 있어야했지만 만화일기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기쓰기에 대한 철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논산훈련소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훈련소에서는 절대 못쓸 것이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침을 한 뒤 밤 한시경이 되어 일어나서 꼭꼭 쓰다시피했다.
-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불침번에게 양해를 얻고 쓰는 것이다. 고된 훈련을 하고 밤중에 일어나 쓰는 그 괴로움이사 오죽 했을라고. 하여튼 나는 값있는 생활을 했다고 본다.(1957년 7월 제34호 서문)
하루 종일 수십번 토해서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할 지경에도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쓰기는 ‘죽어야 못쓰지 살아 있어서는 방법수단을 가리지 않고’(1957년 10월 15일) 썼다.
-공병학교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주머니에 휴지도 못 넣고 다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데서도 썼다. 직접 그림일기를 못 쓰면 수첩에 적어놓았다가 쓴다. 수첩마져 들킬 염려가 있으면 신발 및 뱃속 가랑이속에다 감추는 것이다. -(1957년 9월 36호 서문)
일기장을 지키겠다는 그의 의무감은 대단하다못해 신성하기까지 했다. 특히 일기를 쓰고 일기장을 보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는 ‘두께가 적고 부피가 얼마 안되는 일기장을 배 있는 곳에 붙이고 옷을 입으면 완전하게 감추어서 가지고 나가서 계속 할 수 있었고’, 때로는 ‘내무반에서 내부검열이 심해 목욕탕 썩은 괴짝 속에 감추었다.’ 훈련소 시절에도 쓴 일기는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추워서 얼어 죽는 병사들이 생겨나고 틈만 나면 옷을 벗어 이를 잡아야하는 군대생활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휴가 때 ‘집에 와서 흰 쌀밥에 돼지고기국에 붉은 김치를 얹어 밥을 서너그릇을 먹고 병이 나서 토했다.’ 군대생활은 그야말로 ‘쥐같이 먹고 소같이 일하는’ 배고픈 시간이었다. 그렇게 배가 고픈 이유는 장교들이 사병들이 먹어야 할 쌀을 몰래 빼내는 비리가 연루되어 있어 그는 ‘옳지 않은 장교를 죽이기 위해 실탄 두 발을 보관하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그는 만화작품을 그려 잡지사에 가져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잘 됐건 못됐건 안 받겠다는 것’이었다.
만화협회장을 만나러 갔으나 냉정하게 대했고 나중에는 자리를 피했다. 당시 만화계 상황은 새로운 인재를 키우기보다는 기성작가들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훨씬 더 강했다. 만화 잡지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그는 사령부에서 발간하는 야전신문에 지속적으로 만화작품을 실었다. 군대 생활 후반부에는 작전과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내무반원들이 그의 만화일기를 서로 뺏어서 볼 정도로 그는 행복한 군생활을 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휴가를 받고 나와서 옆집에 살던 여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장면을 만화로 그려서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시간과 사건은 오직 만화일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군복무가 끝나기 전, 아내가 남편 없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화가 나면 문짝을 집어 던지며 욕을 하는 계모 밑에서 나이 어린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내는 못살아도 좋으니 멀리 나가서 살자고 보챘다. 제대를 해서 집에 돌아 와 보니 금방 입을 옷이라곤 한 벌도 없는 가난한 생활이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부양해야 될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여지껏 만화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에게 취직은 쉽지 않았다. 그의 실업자생활이 계속되었다. 계모와 아내의 싸움도 계속되었고 가끔씩 아내가 집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극장 간판을 그려보려고 해도 주어지지 않았다. 영월발전소에서 실업자를 채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봤지만 ‘추천을 받아 왔거나 돈을 쓴’ 사람만이 자격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경향신문과 잡지사에 소설과만화를 보냈지만 번번히 낙선했다. 서울에 있는 평화당 인쇄소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차비만 날렸다. 보리타작하는 밭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팔기도 했지만 ‘어린 아들의 신발은 떨어져서 발가락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 전체가 들여다 보이도록 다 떨어진 신발짝이’ 될 때까지 새 신을 사 줄 수가 없었다. 보리밥도 먹을 형편이 못되어 보리죽을 먹어야 했다. 그런 상황인데도 물고기를 팔기 위해 강에 가서 낚시질을 할 때면 헤밍웨이를 생각했다. ‘그가 낚시질을 즐겼고 소설을 썼고 사냥을 했던 것이 어쩌면 외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낚시질을 해 봐야 겨우 두어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헤밍웨이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그는 천상 예술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이 밉고 한심스러웠다.
-나는 이번같이 그림만을 공부하다시피해서 오늘날 요꼴이 되고 만 것을 천번 만번 뼈아프게 뉘우치는 바이다. 그놈의 구질구질한 문학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등등도 모두 그러하다. 착실하게 학과에 열중해서 공부를 한 아이들은 지금 내무부에서 땅땅거리며 훌륭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크나큰 국영기업체에서 돈을 꽝꽝 벌어들여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1964년 3월 6일)
그런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것저것 하나 되는 일이 없으니’ 그는 드디어 무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일가족이 몰살 자살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죄 없는 두 아이들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의 인생을 옭아매는 족쇄였으며 동시에 그를 살아가게 하는 목숨이었다. 그가 ‘너무나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비극을 맛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이들 때문에 죽음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는 영월을 떠나 동해 옥계로 향했다. 그 곳에서 석회석을 채광하는 횟광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마침내 카바이트 공장에 입사했다. 31살에 처음 갖는 직장이었다. 12시간 노동을 하는 곳이었지만 숱한 어려움을 겪어본 그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는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까, 모든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결심한다.
-이제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죽던 살던 끝까지 해야 한다. 무엇보담도 내가 본래에 바라서 배우고 닦던 것을 못써먹고 이런 노무자길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괴롭고 슬픈 것 따름이다. 목을 놓아 통곡을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고 죽음을 택해 보았던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굶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밖에 나에게 주어진 길 밖에 없으니 어차피 달게 받고 꾸준히 출근하겠음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비를 맞으며 셋방살이 집으로 돌아온다. 비는 끊이지 않고 내리는구나. (1964년 4월 6일)
결심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성격이나 소질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현실이 현실이니만치 우선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자리라도 잡아서 다행일런지 모르지만 어느 한 모퉁이로는 슬픔이 가시지를 않기도 했다.’ 붓을 잡고 만화를 그려야할 사람의 손은 카바이트 원료를 직접 녹이는 전기로에서 밤새 일을 하다가 화상을 입었다. 그렇게 일하고 받은 월급은 장날 시장에 나가 ‘쌀, 좁쌀, 어린애들 양말, 나이롱 수건, 사과 몇 개’를 사고 나면 ‘한 달 번 돈이 하루 아침에 이슬 사라지듯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날만은 온 가족이 즐거울 수 있었다.
그 슬픔을 이겨내는 일은 술을 마시는 것과 만화일기를 계속 쓰는 것이었다. 그의 만화일기는 단양의 충북질소주식회사, 청원의 한국프라스틱, 예미의 태경산업공업주식회사에서 보낸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은 하루가 가고 일 년이 가고 십 년, 이십년이 흘러 정년퇴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아들과 딸은 커서 결혼을 하고 손주가 생겼다. 그는 어느 새 늙은 아내와 앉아 고스톱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20년 만에 다시 영월에 가 보니 예전에 살던 사택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고 처갓집터에는 3층짜리 빌딩이 들어서 있었다. 예전에 ‘지독하고 독하던 계모’는 늙어서인지 순하디 순하게 변해 있었다. 모든 사람과 환경이 변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만화가로 성공하고 싶다던 젊은 날의 열망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그 시간동안 남은 것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만화일기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노력해봐야 만화가로 성공할 가능성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만화일기를 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일기를 쓰는가.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앞으로 20년? 30년? 아니 그 보다도 더 못한 2,3년 아니 내일 모레라도 죽을 지 모르는 게 사람의 생명체이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이 하루하루라는 것은 황금같이 귀한 시간이다...(중략)... 왜 나는 늙는 이야기를 이 일기장에 쓰는 것인가. 그것은 진리이다. 늙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월을, 시간을, 황금같이 아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귀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일기를 하루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것이다. (1986년12월 5일)
그랬다. 처음에는 무작정 만화 그리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만화일기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만화가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 되었다. 만화가로 이름을 날리고 만화가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만화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딴 인생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에게 전혀 엉뚱한 인생이 찾아오더니 이것이 너의 인생이라고 들이밀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손사래쳐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자신의 인생을 어쩔 수 없이 견뎌냈지만 그 과정을 만화일기로 남겨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설령 내가 인정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인생이 남의 인생처럼 펼쳐져버릴 때가 있다. 그러다보면 맨 처음 자신이 소망했던 꿈과 소망이 희미해지게 된다. 아니, 그 꿈이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가 다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은 참 불공평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유를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선심 쓰듯 그 이유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더 잔인한 경우라면 죽고 나서야 후세 사람들을 통해 알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어떤 경우이든 중요한 것은 그 삶을 사는 사람의 자세일 것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자신에게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어떤 조건하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목숨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의 의무일 것이다. 송광용은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숭고하다.
그렇다면 그의 만화일기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의 만화일기는 아주 개인적인 기록이다. 더불어 그가 살았단 시대의 사건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대통령 후보자였던 신익희 선생님의 장사날이 오늘’(56년 5월 23일)이라거나 군에 있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84회 탄생기념일’이라서 휴무였다(1959년 3월 26일)는 사실 등의 국내사정은 물론이고 ‘케네디씨가 암살당했다’는 (63년 11월 23일) 외신이나 이승만대통령의 하야(60년 4월 26일), 윤보선씨 대통령 당선(60년 8월 12일), 5.16 군사혁명(61년 5월 16일), 김일성 사망(86년 11월 17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87년 1월 20일), 노태우씨의 6.29선언(87년 8월 7일) 등 우리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낱낱이 기재되어 있다.
그는 이 역사적인 기록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보내지 못한 엽서를 일기에 첨부한다든가, 군대 생활할 때 사병들이 작업하는 사진을 구해서 ‘사진으로 본 군대생활’이란 코너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은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겠다는 그의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어서 매우 놀랍다. 그것은 송광용 자신이 스스로가 하고 있는 만화일기의 가치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역사적인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일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항상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나는 이 일기의 힘이 얼마나 큰가에 대하여 크게 감탄하는 바이다. 이 일기를 씀으로써 골낼 일도 참아서 명랑할 수 있고 이 일기를 씀으로써 나쁜 일 할 것이 못해지고 만다. 내가 만일 나쁜 일을 했다면 그것은 꼭 여기에 기록해야 되므로 그것을 기록하지 않으려면 좋은 일을 선택해야 될 것이다. 내가 장차 성공의 길에 오른다면 물론 딴 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 일기의 힘이 가장 컸다고 부르짖을 수 있다고 믿는다.”(1956년 5월 25일)-
그가 고2 때 쓴 글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순전히 일기를 잘 쓰기 위해 하루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일기를 쓰는 것이 그만큼 솔직하고 거짓이 없었다는 뜻이다. 만약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미쳐서 날뛰는 미치광이가 되었을 지도’ 모를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만화일기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세월이 변함에 따라 어떻게 변했을까
-“일기를 쓰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고, 일기를 쓰면서 마음에 안정을 쌓고 일기를 쓰면서 살기 힘든 이 세상에 열심히 살아가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생활의 변화를 갖는 것이다.”(1986년7월 10일) -
이런 그의 결심은 일기를 씀으로써 잘 지켜져서 ‘일기 쓰는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일기를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990년 영월 홍수로 목숨처럼 아꼈던 일기책 30권이 소실되자 의욕상실로 절필을 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평생 지탱해 온 신앙과도 같은 중심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는 걸까. 얼마 후 그는 큰 병을 얻게 되었다. 이삼개월 밖에 못 살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이 만화일기를 어떻게 할까 고심했다. 불태워 버릴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영월에 책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101권의 만화일기를 아무런 미련없이 영월책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책을 기증받은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의 주도로 그의 만화일기가 전시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101권의 만화일기는 3권으로 선별하여 “옛날은 우습구나”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만화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원본을 부분발췌하여 엮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각 권에 있는 재미있는 내용 중의 일부를 별도로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따로 묶어서 냈다. 40년을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온 예술가는 죽음 직전에 소원을 풀었다. 그러자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기증 당시 이삼개월 밖에 못 살 것이라던 그가 1년을 넘게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공인된 만화가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누리고 싶었던 만화가의 영예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되었다. 그는 행복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사후 그의 만화일기는 국제만화축제인 ‘2005 이탈리아 나폴리 코미콘 페스티벌’에 ‘한국만화의 대가들과 떠오르는 작가들’ 이란 제목으로 국내 작가들과 함께 소개되었다. 주최측 사무국에서 특별전시를 요청해 와서 이루어지게 된 일이었다. 세계 어느 만화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 작가의 만화에 대한 헌신의 역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평생을 무명으로 살아야 했던 고통이 송광용의 몫이었다면 그 고통을 견뎌준 사람의 생애를 보고 사소한 어려움에도 쉽사리 절망하는 습관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일 것이다.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 그는 101권의 만화일기를 보여주며 말없이 미소짓는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어서 일어서봐요. 일어서기만 하면 다시 걸을 수 있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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