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의 진산 금성산을 바라보면서, 향교옆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성곽과 문이 복원되어 있다.
지금 나주시는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고 있는 듯하다.
남고문. 동점문을 복원한 것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의 일행들은 '나주읍성(羅州邑城 사적 제337호)'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나주읍성(동문 東漸門, 서문 西城門, 남문 南顧門, 北門 北望門) 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다.
전체 성벽의 크기를 복원해 보면 둘레가 3.679m 면적은 974.390㎡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이 훼철되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不彌支國)」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성종2ㆍ983년)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열전 김경손전이고,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 하였다는 기록에서 현문(懸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邑城人保體制)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 등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주목사 김계희(1457.8.11~59.11.21 재임)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된다.
현존하는 성곽의 일부는 민가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단다.
서벽(西壁)의 경우는 교동일대에, 북벽(北壁)의 잔존유구는 산정동 부근과 성북동 33번지 앞에서 나주 중앙초등학교 뒤편까지 약 50m에 걸쳐 성돌이 흩어져 있다.
동벽은 중앙동 천변(128-12번지) 부근에 석축의 일부가 확인되고, 남벽의 경우 현재로는 남아 있는 유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남문(南顧門)을 1993년 12월, 동점문은 2006년 10월 복원하였다.
동점문에서 약200m 정도의 거리에 참 아름다운 석당간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위쪽에 있는 나주경찰서옆 중앙초교 뒷편에 있다는 성곽은 돌아보지는 못하였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관아앞으로 향한다.
나주는 먹거리가 아주 좋다. 인심까지
[자료출처: 나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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