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이야기

[스크랩] 학생과 선생이 갖는 이야기 : 맹자에게서 나오는 호연지기 章

강나루터 2016. 9. 5. 23:00

 

 

 

 공손추가 물어 말하였다: "만약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卿相이라는 최고 자리에 거居하시게 되어 뜻하시는 바 왕도의 정치를 구현하는 포부를 실천하실 수 있다면, 그 포부를 통해 제왕齊王을 패자로 만들든 왕자로 만들든 결국 그것은 선생님의 역량에 의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바가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지위에 계시게 된다면 책임부담도 많을 것이고 또 권세도 많을 것이니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나는 40세에 이미 부동신否動心의 경지에 달했다."

 공손추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경지는 용맹스럽기로 유명했던 제나라의 고대 용사勇士 맹분孟賁의 경지를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으셨습니다그려."

 

 말씀하시었다: "야 이놈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 고자告子선생만 해도 나보다 먼저 부동심 경지에 달하신 분이다(김용옥은 '고자는 맹자보다 윗세대 사람으로 제나라에 있을 동안 고자와 왕래가 많았고 논쟁도 많이 하면서 서로를 계발 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 했다)." 

 

 공손추가 말했다: "부동심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암 있구말구. 우선 북궁유北宮黝가 용기를 기르는 방법들 수 있겠다. 그는 칼이 피부를 잘라도 기가 꺽이지 않고, 눈을 찔려도 눈동자를 반듯이 노려보고 까딱하지 않았다. 털끝만한 작은 일로 사람에게 모욕을 당해도 시장 한복판 대중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생각했다. 아무리 미천微踐한 갈관박褐寬博(느슨한 갈포를 두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맹자 당대에 유행했던 어법이며 비천한인간이라는 뜻이다)이라도 그를 모욕하면 용서치 아니 하며, 아무리 지체 높은 만승의 군주라도 그를 모욕하면 용서치 아니 한다. 만승의 군주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미천한 갈부褐夫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과 똑같이 여기며, 천하에 그가 두려워하는 제후는 한 사람도 없다. 어느 제후든지 그에게 험담을 말하면 반드시 보복하고야 만다. 이것이 북궁유의 용기이다.

 

 다음에 또 제나라 용사 맹시사孟施舍 모냥의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돌진해야 한다. 전술에 능하다는 사람들은 보통 적의 형편을 잘 계산해보고 난 후에야 진격하고,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든 후에야 합전에 임한다. 이것은 삼군과 같은 대군을 만나면 아무리 전술이 탁월해도 반드시 공포에 떨어 깨지고 만다. 나는 이런 비겁을 싫어한다. 어찌 나라고 어느 상황에서든지 필승한다는 법이 있을까보냐? 그러나 나는 어느 상황에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한다. 그것으로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가 생각컨데 맹시사 용기는 증자曾子에 가깝고, 북궁유의 용기는자하子夏에 가깝다(어느 맥락에서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증자는 주관적 성향이 강하고, 자하는 객관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맥락에서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자하를 자로子路의 오자로 보아야 한다는 재미있는 설도 있다). 이 두 사람의 용기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는 판단키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맹시사의 지키는 바가 훨씬 더 요량을 얻고있다.

 

 옛날에 증자께서 자기의 문인門人 자양子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신 적이 있단다: '너는 용기를 좋아하느냐? 나도 우리의 공자 선생님께 대용大勇에 관하여 문의해본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자기 내면을 반성해보아 바르지 못하면 갈관박 앞에서도 벌벌 떨게 되며, 자기 내면을 반성해보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천군만마의 대군이 밀어 닥쳐도 용왕매진勇往邁進할 수 있다고.' 맹시사가 기氣를 지키는 방법은 증자가 자기 내면을 지키는 방법만큼 요령을 얻고 있지 못하다."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또 묻겠습니다만,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의 부동심의 차이에 관하여 들어볼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친절히 대답하여 주신다: "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 그것을 말로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천착하여 내 마음을 괴롭히는 짓을 하지 말라. 남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으로 상심 받아 내 몸의 기를 괴롭혀서는 아니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부동심이 달성된다.' 이 말 중에서 후자인 남의 마음 때문에 내 몸의 기를 괴롭히지 말라는 얘기는 그런대로 옳은 얘기이지만, 전자인 남의 말을 내 마음에 천착하여 무리하게 이해하라고 노력하지 말라는 얘기는 별로 옳지 못하다. 인간의 말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게까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부동심과 별로 관계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부동심의 핵심은 지志의 문제에 있다. 대저 지志는 氣의 통솔자이다. 그리고 기氣는 우리 몸에 꽉 차있는 본원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志가 가는 곳에는 기氣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러므로 지志를 잘 조절하여 기氣가 난폭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공손추가 말했다: "선생님! 방금 '지志가 가는 곳에는 기氣가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고 말씀하시고는 또 새삼 '지志를 잘 조절하여 기氣가 난폭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으음, 참 좋은 질문이다. 내가 말하려 한 뜻은 지와 기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교호작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선 지가 전일하게 잘 콘트롤되면 기를 잘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기가 전일하게 집중되어도 지를 움직일 수 있다. 후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어떤 사람이 달려가다가 넘어졌다고 하자! 이것은 넘어지려는 의지가 작동한 것이 아니고 단지 무의식적 기의 주동적 작동 리듬이 깨져서 생긴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자빠지고 상처가 나면 곧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칠정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동심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공손추는 또 물었다: "대강 알아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히 또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잘하시는 것은 어느 방면의 것들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장기는 지언知言(남의 말을 잘 분석하여 알아듣는 능력)에 있고, 또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선양善養할 줄 안다는 것이다."

 말한다: "감히 묻겠나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호연지기란 과연 무엇입니까?"

 말씀하신다: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기氣됨이 지대至大하고 지강至剛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氣됨이란 항상 義와배합되며 道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정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 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이 돌이켜 볼 때 꺼림직 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 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말하기를 고자告子라는 분이 의義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의를 심외心外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의는 외재적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목적을 당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 노력의 결과를 예기豫期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송宋나라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송나라에 자기 밭에 파종한 싹이 영 빨리 자라나지 않은 것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밭에 가서 싹을 일일이 다 조금씩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 올라오는 것을 일일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 밭으로 달려가보니, 아뿔싸 싹들은 이미 다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가 송나라 사람들의 우화같고 남의 얘기 같지만, 실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를 배양하는 것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도 같다.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조장하는 것은(앞에서 예로 든 북궁유나 맹시사의 용기같은 것), 밭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으로 무익하다고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요,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공손추가 묻는다: "아까 말씀하신 지언知言에 관하여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신다: "1. 치우쳐서 공정하지 못한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무엇에 씌어져 있는 지를 간파할 수 있다. 2. 음란하게 씨부렁거리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간파할 수있다. 3. 사악하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정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4. 교묘하게 피하려고만 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말이 위정자의 마음에서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말에 그치지 아니 하고 그 정치에 해악을 끼치며, 정치 과정중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되면 그것이 말에 그치지 아니 하고 반드시 그 나라의 모든 사업에 해악을 끼친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옛 성인께서 지금 다시 출현하신다해도 이 나의 말은 수긍하실 것이다."

 

 공손추는 또 묻는다. "옛날에 공자의 문하에서 재아와 자공은 변설辨舌에 뛰어났으며, 염우, 민자, 안연은 덕행으로 뛰어났습니다. 공자는 이 양 측면을 다 겸비하신 분이신 것 같은데, 스스로 솔직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하는 데는 별 재주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자 선생님께서는 호연지기의 덕도 쌓으셨고 또 지언의 장기도 갖추셨으니 선생님이야말로 진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신다: "데끼놈! 너 뭔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옛적에 자공이 공자에게 여쭈어 말하였다: "선생님은 성인이시죠?' 공자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어찌 성인을 자처할 수 있으랴! 성인은 나의 능력 밖이니라. 나는 그저 배우는는 데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을 뿐이로다.' 그러자 자공이 말하기를, '배우는 데 싫증내지 아니 함은 지智의 명증이요,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는 것은 인仁의 명증이올습니다. 인仁하고 또 지智하면, 선생님이야말로 이미 성인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나이까?' 대저 성인에 관하여서도 공자께서도 자처하지 않으셨는데, 네가 날보고 성인이라니 뭔 무엄한 말을 하고 있는 게냐?"

 

 공손추는 또 묻는다: "옛적에 제가 들은 바가 있는데, 자하, 자유, 자중은 모두 공자라는 성인의 한 면만을 구현한 사람들이고, 염백우, 민자건, 안연은 성인의 전체를 구현하기는 했는데 조금 미흡하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떠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십니까?"

 말씀하신다: " 야 이놈! 말을 너무 막하는구나! 그런 질문은 좀 삼가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또 묻는다: "그렇다면 백이와 이윤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하신다: "각기 걸어간 길이 다르다.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를 않고, 다스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다스리지를 않고, 천하가 잘 다스려지면 벼슬하고 어지러워지면 은퇴하는 스타일의 인간이 백이였다. 어떠한 임금이라도 섬기며, 어떠한 백성이라도 다스리며, 천하가 잘 다스려져도 벼슬하고 개판이라도 벼슬하는 적극적 스타일의 인간은 이윤이었다. 그러나 출사할 만하다 할때는 출사하고, 은퇴하는 것이 좋을 만하다 할 때는 은퇴하고, 오래 체재할 만하다 할 때는 오래 체재하고, 빨리떠나야 할 만하다 할 때는 지체없이 빨리 떠나는 분이 공자시었다. 이 3인은 모두 옛적의 위대한 성인이시다. 나는 이 세분의 어느 측면도 충실하게 다 실천하지 못하지마는, 내가 소망하는 바는 곧 공자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이다."

 

 공손추는 궁금해서 계속 묻는다: "선생님, 그렇다면 백이와 이윤도 공자와 같은 반열의 성인입니까?"

 말슴하신다: "아니다! 인간이 이 땅위에 생겨난 이래로 공자와 같은 위대한 인간은 있어본 적이 없다."

 묻는다: "그렇지만 세 분 다 옛날의 성인이라고 언명하신 이상에는 뭔가 세 분에게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신다: "암! 그렇구말구. 겨우 사방 백리의 작은 땅을 얻어 임금이 되어도 세 사람 다 사방의 제후들을 조공케하고, 천하를 보유하는 왕업을 성취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의 불의라도 행하여, 하나의 무고한 인민의 생명이라도 죽여 설사 천하를 얻으실 수 있다해도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세 분은 공통이다."

 말한다: "이제 감히 묻겠나이다. 세 분의 다른 점은 무었입니까?'

 맹자께서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씀하셨다: "공자의 문인인 재아, 자공, 유약은 모두 그 지혜가 출중한 사람들로서 성인을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인물됨의 그릇이 조금 작다고는해도 자기가 좋하는 사람에 대하여 아첨하는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은 아니다. 이 세 사람이 공자를 존경하여 평한 말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이들의 말을 통해 공자가 백이와 이윤과는 동급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

 재아는 말했다: '나의 눈으로 공자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공자는 분명 요임금, 순임금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공은 이와 같이 말했다: '한 나라의 예제禮制를 관찰하면 그 나라의 정치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백 세대 이후에 백세대 연간에 등장한 임금들의 정치를 다 관찰한다 해도 그들의 정치는 공자가 세운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공자의 위대함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땅위에 인간이 생겨난 이래 우리 선생님은 같은 분은 없으셨다.' 유약이 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동류라고 말해도, 동류 속에 차등이 있는 것은 비단 인간세계 속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기린은 땅위를 달리는 동물 중에 뛰어난 것이며, 봉황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중에 뛰어난 것이며, 태산은 이 땅위의 언덕 중에서 뛰어난 것이며, 황하나 황해는 흐르는 물 중에서 뛰어난 것이다. 같은 류이지만 그들은 특출난 것이다. 성인과 백성도 또한 같은 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류 속에서 뛰어나고, 또 모든 성인들 중에서 뛰어남이, 이 땅위에 인간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처럼 지극한 성덕盛德을 지닌 유례가 있지 않았다."

 

 

 

 김용옥이 윗글을 번역하고 붙이는 글 :언어에 대한 맹자 생각은 당시 변론을 일삼는 소피스틱한 명가名家의 성향에 대하여 그 정치적 기능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인간의 마음의 윤리성이 더 궁극적인 과제상황이라는 것이다. 공손추 질문의 진지하고 집요한 추적,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맹자의 치열하면서도 여유있는 논리는 고대 문답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호연지기는 이 장에서만 나오고 딴 곳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맹자의 호연지기는 "부동심-흔들리지 않는 마음, 미혹되지 않는 마음" "조장-사람은 누구나 제 표현속에 조장을 갖고 있다. 겸손 또한 조장 일부이다"의 주제와 유기적 일체를 이루며, 특히 여민동락(:군주와 백성이 함께 놈)의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나는 공손추가 제자로서 위치를 적극 활용(충실?)했다고 본다. 그리고 맹자선생님은 더 보태거나 뺄것 없는 제자자체에 대한 애착으로 스스럼 없이 감정을 드러낸다. 전체적 맥락에서 이야기와 더불어 살갑다 할만하다. 그리고 항상 고전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시대에 머무르지않는 다는 것이다. 항상 새롭고 현재와 더불어 움직인다. 신기하다.

 

 

 

 

 

 

 

 

  

 

 

 

출처 : 문화·연예
글쓴이 : 조국통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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