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4월28일)은 이순신(李舜臣) 장군 탄신 4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무한한 애국애족 정신에 새삼 감사드린다.
나라가 유난히 어려운 올해 그를 기리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특히 국난이 그렇다.
임진왜란으로 망국 위기를 겪고도 유비무환 교훈을 무시해 병자호란을 당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며,
그 뒤에도 6·25 남침과 같은 참화를 치렀다.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맞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장군을 이야기할 때 이름 앞에 '충무(忠武)'라는 공신 호(號)를 먼저 부르는데,
다소 문제가 있다. 우리 역사에 충무라는 공신 호를 받은 이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열두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공신은 국가나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결국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므로 왕조 시대의 공신 호를 아직도 쓰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의 공신 제도는 고려 초에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공신을 비롯해 28가지 공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충무는 무신(武臣)에게 내려준 시호다. 그 대표적 장수가 이순신이다.
즉 충무공은 이순신 한 사람만이 아니다.
충무공과 이순신을 같은 호칭으로 여기는 것은 역사 교육이 불충분했던 탓도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장 우성 화백의 표준영정)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고려시대에 셋, 조선시대에 아홉 명 있었다.
최초가 고려 개국 공신이자 강릉 최씨 시조인 최필달(崔必達)이다.
그다음은 평장사를 지낸 박병묵(朴炳默)과 공민왕 때의 명장 지용수(池龍壽)이다.
조선조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조영무(趙英茂)이다.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한 인물이다.
두 번째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인 이준(李浚)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예종 초에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웠다.
세 번째 충무공은 '소년 장수'로 유명한 남이 장군이다.
남이와 이준의 시호가 모두 '충무공'이니 공교롭다.
네 번째가 이순신 장군이다. 다섯 번째는 임란 때 순국한 김시민(金時敏)이다.
진주 목사로서 겨우 민군 3800명을 거느리고 7일 격전 끝에 2만여 왜군을 물리쳤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인 진주대첩이다.
여섯 번째 충무공 이수일(李守一)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고, 이후 여진족을 소탕했다.
일곱 번째 충무공 정충신(鄭忠信)도 임진왜란 때 어린 나이에 참전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웠다.
여덟 번째 충무공 구인후(具仁垕)는 인조의 외사촌 형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아홉 번째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는 광해군 때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장군이다.
참고로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도 충무공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명이므로
'충무공'을 이순신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단독으로 써서는 곤란하다.
'충무공 이순신'이나 '충무공 김시민'처럼 반드시 본명을 붙여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