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 삼대화상 부도탑에 헌다례(獻茶禮)를 마치고 나니......
저녁을 맞이 하다...
회암사 삼대화상 :
***** 인도에서 고려로 오신 지공선사(指空禪師) - 석가모니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
(敎에서는 아난존자, 禪에서는 가섭존자가 수제자임)의 108대 법통을 이어
인도에서 히말리아를 넘어서 티베트, 운남, 원나라 대도(현 북경)를 거쳐 고려
개경로 오신 마지막 인도 전법승.
원황제로 부터 처음에는 환생한 부처님으로 환대를 받았으나 유목민인
몽고족의 육식 위주의 생활과 사찰 내에서 동물희생제를 하는 것은 불교의
불살생 교리에 위배되는 잘못된 관행이라고 반대하다가 원황실과 소원해짐.....
고려로 오신 후 금강산 법기도량에서 원황제로부터 부탁받은 원황실을 위한
기도제를 지낸 후 전국을 주유하며 양산 통도사에서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
계경(국보로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중)>을 지어 원의 풍습을 받아들여 일부의
고려 사찰내에서 행하여지던 라마불교식의 희생제를 상기 무생계경으로 바로잡고
불교 본연의 선풍(禪風)을 바로 세움.
지공선사가 동방으로 오신 후, 인도대륙은 바라문 중심의 힌두교의 재등장과
무굴제국을 기반으로 한 이슬람교의 득세로 불교가 쇠퇴하고 , 동양 최고
지식인들을 배출하고, 동양제국(諸國)의 학문연구와 교류가 활발하던 인도의
나란타대학이 폐쇄된다.
이로서 인도대륙에서는 불교의 명맥이 사라진다.
**** 나옹선사(懶翁禪師) -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 :현 북경)에 유학 중에
지공선사에게 계를 받고, 지공의 제자가 되어 귀국길에 지공선사를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오다.
지공과 나옹은 고려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몽고족 원나라의 영향으로
변질된 불교를 바로 세우다.
스승인 지공선사가 공부하였던 인도의 나란타대학이 있었던 삼산양수처
(三山兩水處)와 가장 닮은 회암사를 지공의 당부대로 크게 중수함.
여기서 삼산은 개성 송악산, 한성 삼각산, 회암사를 품고 있는 천보산(天寶山)을
지칭하는 것이고, 양수(兩水)는 임진강과 한강을 가르키는 말임.
지공선사와 나옹스님이 법회를 열면, 고려 귀족들과 사대부들이 수천
명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무학선사(無學禪師) - 나옹의 수제자로 지공선사의 손자상좌.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왕사. 회암사에 잠시 주석하며 스승인 나옹선사가
중창하다가 대간(臺諫)들이 사부대중의 생업에 지장을 준다며 중단시킨
회암사 중창불사를 태조 이성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문도인 허융진산
(虛融珍山), 함허기화(涵虛己和) 등에게 중창불사의 마무리를 부탁한다.
또한 무학대사의 문도로는 회암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나옹선사가 생전에
못다한 중창불사를 이어서 계속한 절간익륜(絶磵益倫, 고려 우왕 5년),
철호조선(鐵虎祖禪, 태종 2년 경) 스님이 유명하고, 환암혼수(幻庵混修)와
그의 문도인 고암일승(杲庵 日昇), 효운(曉雲), 천보만우(千峰 卍雨,
세종 5년 4월 이전) 등의 스님들이 회암사 주지를 소임할 때에 사세확장에
힘썼다.
태조 이성계의 한양천도 계획 후에는 무학대사는 양주 회암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성의 사찰을 배열하였다. < 봉은사말사지 >에 의하면, 무학이 호국적
목적이나 밀교적(密敎的) 만다라(曼茶羅)에서 한양의 동쪽에 청련사(靑蓮寺),
서쪽에 백련사(白蓮寺), 남쪽에 삼막사(三藐寺), 북쪽에 승가사(僧伽寺)를
배치하고,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삼막사, 사자암, 호압사
(虎壓寺)를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관악산의 화기가 산의 형상이 불꽃을
닮아 풍수학적인 비보책(備補策)으로 화기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보다 근본적인 화기억제 원인으로는 고려왕실에
충절을 지켜나가던 사대부와 무신들의 고려회복운동이라는 뜨거운 열기를
잠재우려는 비보적 사찰 건립을 종교적인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풍수지리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그 일례로 서울대 캠퍼스에서 안양 석수동으로 연결되는 산복도로 옆에
위치한 호압사는 절의 위에 있는 호랑이 형상의 바위의 기운을 잠재우려고
虎壓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으나, 관악산 북쪽 산록에 이 호압사를 세운
근본적인 사유로는 호압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흥동에 고려의 무신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 무신들이 이성계의 한양천도와 법궁인
경복궁의 건립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보기 좋은 위치에다 감시를 겸한 호압사를 건립하였다.
"회암사를 중창하여 불교의 총본산으로 삼고자 한 고승은 여말선초 삼화상 지공, 나옹,
무학이다. 고려 말 선풍을 드높혀 불교계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 1374) 등
세 스님을 묵어서 여말삼사(麗末三師)라고 한다. 여말삼사가 공민왕 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데에 반하여, 지공선현(指空禪賢),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무학자초
( 無學自超 1327~1405) 등 지공선사의 직계인 삼화상은 공민왕대 이후 조선시대 초기까지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조선 후기 불교의식집인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 <범음집(梵音集)
등에서도 삼화상으로 추앙받았으며,<조상경(造像經)>에도 증명법사로 숭앙되었다.
이와같이 여말선초 삼화상의 영험은 가장 신통한 증명법사로 지금까지 한국불교계의
삼화상으로 존숭되고 있다."
- 동국대 황인규 교수의 <한국 최고의 삼화상 도량 회암사> 논문 중에서 발췌.
나옹선사는 남한강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먼저 열반에 들고(세종실록 권85), 무학대사는
직접 지공선사에게서 불법을 배움. 이때, 대대로 원나라의 지방관인 다루가치였던 이성계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무마하기 위하여 성리학 중심의 신진 사대부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친원정책을 폄. 이성계가 친원정책을 펼 때에는 지공선사는 원나라 황제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지금의 내몽고자치주 남부지역에 위치한 상도(上都)로 되돌아가서 원황제를 만난 후
대도로 돌아와서 고려인들이 만든 절인 법원사(法源寺)에서 머무름.
고려인 출신의 기황후가 세력을 잡자 그동안 소원해져 있었던 원황실과 관계가 회복됨.
태조 이성계의 조선조 개국을 보지 못하고 먼저 열반에 드나, 노년에는 어디에 5만명의
병력이 자기의 명을 기다린다는 등의 말을 자주하여 은근히 이성계 군(軍)과의 연대를 자랑함.
지공은 고려를 동방의 흥법(興法)의 나라로 간주하고, 그 가운데서도 인도에서 공부한
나란타대학과 지형지세가 닮아 있고 도읍인 개경과 가까운 회암사를 흥법의 총본산으로
삼고자 고려 불교계에서 명망있는 제자인 나옹에게 회암사의 중수를 당부하였다.
나옹은 원나라에 구법유학할 때 10년간 임제종의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법을
사사받았으나 지공의 대표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그무렵 나옹 뿐만 아니라 려말삼사
(麗末三師)라고 불리어지던 태고보우, 백운경한은 가지산문계 고승으로서 이 당시
원나라 지배하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선승인 석옥청공(石玉淸珙)과 평산처림에게서
법을 사사받고 귀국하였고,사굴산문계 고승이던 나옹은 평산처림에게서 법을 사사
받았으나, 경한과 더불어 지공의 선풍을 수용하고 두 스님 다 지공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불교계를 정치승려인 신돈이 주도하고 있었던 바, 지공의
삼산양수기(三山兩水記)를 받고 나옹이 귀국하여, 회암사 중창불사를 하던 중,
일부 당우를 중수하여 낙성기념 문수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을 보자. 이에 신돈의
사주를 받은 신진사류 중심의 대간(臺諫)들에 의해서, 회암사에서 추방되고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誅殺)한다. 이때 개경의 대표적인 선찰인 연복사(演福寺)의 중창,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능침원찰인 광암사(光庵寺)의 중창 등의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로 국가재정이 고갈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이는 종교시설 확충과 국가재정이라는 면에서 본 문제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사유는 국제정치상황의 변화로 원을 지배하던 몽고족 중심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한족의 국가재건운동의 한 축으로 등장한 홍건적 등의 무리가 서로 결집하여
원을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고 있었던 중원 땅의 지배구조의 이동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반원정책을 펴는 공민왕을 돕고 있던 신돈의 눈에는
원황실과 다시 가까워진 지공선현의 제자 나옹이 그리 곱게 보일 까닭이 없다.
삼산양수기를 제자인 나옹에게 쓰주며 동방 불교 흥기의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던 회암사의 중창불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수제자였던 나옹선사 까지
의문의 죽임을 당하게 되자, 지공은 원나라의 부족장 겸 지방관인 다루가치를
대대로 역임하였던 이성계 장군에게 새로운 기대를 하게되고, 스승인 나옹의
의문사에 대하여 고려왕실과 신돈에게 반감을 품을 수 밖에 없었던 손자상좌인
무학대사를 통하여 이를 실행하게끔 원나라에서 조정한다.
최근에 방영된 역사드라마에서 삼봉 정도전을 조선조 개국의 설계자라고
극작가가 잘못 대본을 썼으나, 실제 조선조 개국의 설계자는 이 지공선사임.
손자 상좌인 무학대사를 통하여 홍건적, 여진족,왜구토벌 등으로 전공을 세운
이성계 장군을 석왕사(釋王寺)의 서까래 세개를 지고나온 꿈의 해몽설화
등으로 원나라 황실과의 교감하에 이를 원격 조종한 분이 지공선사임.
다만 삼봉 정도전은 역활이 조선조의 설계자라기 보다는 설계도를 보고
조선조의 건설을 도운 감리자의 역활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함.
조선조 건설의 시행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주연으로 활약하였고.....
요지음도 그러하듯이 설계자는 시행자에게 해를 당하지 않지만, 감리자는
설계가 잘못되었니, 건설과정이 잘못되었느니, 공정 순서가 뒤바뀌었다느니
하는 머리속의 얄팍한 지식만을 뽐내다가 시행자에게 잘려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슴. 그것도 시행자가 본사에 압력을 넣어서 내린 인사발령 명령서 단 한장으로.......
반원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이 명태조 주원장과 원나라와의 오랜 전투로 무주공산이 된
요동정벌을 명하자 친원파인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함, 이때에 지공은
세상을 떠났으나, 지공의 손자 상좌인 무학대사의 자문이 큰 역활을 함.
중원에서 몽골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명 태조가 된 주원장은 이성계의 친원경향을
알고 원의 잔류세력과 조선의 이성계가 연합하여 원제국의 부활을 획책할까 두려워하여
15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정벌할 것이라고 엄포용 특사를 보냄. 이때에 신생 명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원정군의 병력은 원의 잔류병력들과 제후들의 반란에 대응할 중원 자체방어군을
제외하면 고작 10~20만 여명 규모 밖에는 되지 않았슴.
상도로 천도한 원나라 잔류세력이 자체 내분으로 소멸되자 태조 이성계는 주원장의 이
엄포를 마지 못하여 받아드림. 그러나 명 태조 주원장은 끝까지 태조 이성계의 복속을 믿지
못하여 조선조 국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미룸. 이 후에도 조선에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거나
세자 책봉 등에서도 명왕실은 등극이나 책봉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여러 차례 미루고 원의
잔류세력과 조선과의 연합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함.
가장 큰 이유는 역사상에서 딸을 시집보낸 나라는 항상 아들을 장가들이는 나라보다는
하위 개념임을 명왕실에서 파악하고 있었슴. 식민사관이나 그 이전의 모화사관에 의하여
우리 역사의 기록이 변질되었지만 몽골의 원나라 황제는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고려를
부마국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형제국에서 형의 나라로 우대하고 있었슴.
나라간의 영토다툼의 표현방법에는 란(亂)과 전쟁으로 크게 구분하여 사관들이
기록하고 있슴.
란은 동족이나 형제국 간의 싸움을..... 전쟁은 이민족이나 다른 나라와의 싸움을 의미함.
예를 들어서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등은 같은 민족 내에서 또는 같은
동족이 세운 나라들 간의 다툼이나 싸움을 의미함.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 사관들은 왜가 백제의 담로 중의 하나였고 ,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열도의 동북지방에 할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를
동일민족으로 인정하였고 따라서 임진전쟁, 정유전쟁이 아니라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기록하고 있슴.
마찬가지로 청을 건국한 여진족 중심의 만주족을 고구려와 발해 그 이전의 부여,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었던 먼 형제들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란(亂)>이라
기록하고 있슴.
반면에 고구려와 수, 당과의 싸움은 수당전쟁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은 마치 동학란, 홍경래의 난, 이괄의 난과 같은 의미인 국내의 반란과도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이를 국내에 한정된 내란과 구별하기 위하여 외란(外亂)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강단사학자들이 가르쳐 주지 않고 있음을 한탄하여야 함.
강단 역사학계는 이 ㅂ ㄷ 박사와 그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에 반대되는
학설을 주장하다가는 박물관의 학예사나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함은 물론 재직하고 있던
자리에서도 곧바로 물러나게 된다는 현실이 오늘 따라 더욱 서글프게 느껴짐...........
조선조 초기에 왕실에서 지공과 나옹선사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었는지
이를 상징하는 유물이 있다. 미국 동부의 보스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불2조사
사리기(三佛二祖師 舍利器)이다.
이 사리기는 2009년도에 당시 국회 문화관광상임위원장이였던 정병국 의원과
<문화재 제자리찾기 운동> 관계 봉사자들이 이 보스톤박물관을 방문하여 이 국보급
문화재를 되돌려받기 위하여 협상을 벌인 바 있을 정도로 우리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재이다.
이 사리기는 은제도금 라마탑형 용기안에 다섯 개의 팔작지붕 모양의 소형용기에
다시 구분하여 사리가 보관된 독특한 구조의 사리용기이다. 5개의 소형탑에 각각
타출법(打出法)으로 새긴 명문으로 사리의 주인공과 모셔진 사리의 매수가 명기되어
있다.
이 명문에 의하면 5개의 소형탑은,과거불 2분, 석가모니불, 그리고 14세기의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사리임을 알 수 있고, 대부분의 사리는 부처나 조사 또는
고승 단독으로 보관되어 왔었지만, 이 사리기는 하나의 사리탑 안에 5분의 사리가
함께 모셔져 있어서 세계불교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 3불2조사 사리기는 세계불교사에서 한국불교의 위상과 정통성이 이 사리용기에
보관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이다.
이 사리기에 보관된 사리는 과거불로 정광여래사리5매(定光如來舍利五枚),
가섭여래사리2매(迦葉如來舍利二枚), 석가여래사리5매(釋迦如來舍利五枚), 조사(祖師)로
지공선사사리5매(指空禪師舍利五枚), 나옹선사사리5매(懶翁禪舍舍利五枚)라고
명문(銘文)되어 있으나, 실제 보관 중인 사리들은 과거불인 정광여래와 가섭여래의 사리는
녹색조각으로 석가여래와 지공선사의 사리는 녹진(綠塵)에 둘려 쌓인 백색 옥석(玉石)
1매가, 나옹선사의 사리는 흑색구(黑色球) 2매가 남아 있다. 보통 사리를 세는 단위는
과(果)라는 단위로 세나 이 명문에는 특이하게도 매(枚)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명문을 따른다.
이 사리기의 제일 바깥에 있었던 큰 라마형사리탑은 이 사리기를 보스턴박물관에 판
일본에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사리용기를 매도하였기 때문에 현재 일본 어디엔가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권위 그리고 세계불교사에 한국불교가 갖는 위상을 드높힐 수
있는 소중한 이 문화유산이 하루 빨리 되돌아 와서 제자리를 찾기를 바란다.
회암사 삼대화상에 대한 헌다례(獻茶禮)
지공선사 부도탑과 탑비
나옹선사 부도탑
무학대사 부도탑
- 20131005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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