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선배의 서예전시회에 갔다. 많은 서예작품들이 추상화보다 더 난해하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작품에 시선이 머물렀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고 혼잣말로 읽었다. 행서로 내려쓴 작품을. 예서나 초서는 예술적인 멋은 있을지라도 무슨 글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되레 거리감을 느끼지만, 행서여서 글씨가 알아보기가 쉽고 서민적인 운치까지 있어서 더욱 호감이 갔다. 서체의 미적 감흥보다 휘호의 내용에 마음이 끌렸다. 서예가인 선배의 설명을 들으면서 연방 고개가 끄덕여졌다. “머무르는 곳 마다 주인공이 되라,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돌아와서 원전을 찾아보고 ‘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휘호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임제의현(臨濟義玄)의 설법으로 임제록(臨濟錄) 시중편(示衆編)에 나오는 “如大器者 直要不受人惑 隨處作主 立處皆眞”(여대기자 직요불수인혹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구절의 뒷부분인 것을 확인하였다. 전체 구절을 풀어 옮기면 ‘그릇이 큰사람은 사람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말고 곧을 필요가 있으며, 처해진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최고로 참다운 자리’라는 가르침이었다.
‘주인공’이나 ‘자리’라는 말이 평생직장에서의 기억들을 일깨웠다. 입사 초기 햇병아리 시절에 보직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대충대충 때우다가 상사로부터 혼쭐나게 꾸중을 들었던 일, 그 뒤 거꾸로 잘한다는 평판 때문에 큰 사고 수습임무나 주요과제를 도맡아 오히려 고초를 겪었던 일들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체로 일찍 터득한 것이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일인자가 되어야 성장과 발전이 따른다는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었다. 너무 잘하면 그 자리에 붙박이가 되는 줄 알지만 조직의 생리는 그 반대였다. 자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사람 가운데 크게 성장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리들이 평소 덕담으로 나누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라는 경구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또 다른 말이라고 여겨진다.
정년으로 일방적인 용도폐기를 당하고부터 이따금 ‘나는 내 인생을 살아왔는가?’에 대하여 자문자답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면 ‘나의 삶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살아왔는가?’라는 물음이 더 가까운 말이다. 되돌아보면 삼십여 년을 회사인간으로 살아오면서 그 가운데 ‘나’는 없었다. 우리 조직이 있고, 회사가 있고, 국가가 있었다. 어쩌면 가정도 없었다. 가정의 발전은 회사에서의 나의 성장과 발전에 달렸다고 신앙만큼이나 믿었다. 언제나 회사가 먼저였다. 낮밤 구분 없이 회사 일에 몸과 마음을 묻고 살았다. 휴일은 말할 것도 없이 휴가까지도 회사가 필요로 하면 불평 없이 내놓았다. 회사 때문에 야기되는 가정의 희생을 당연지사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직장의 구성원으로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로의 흉내라도 냈지만 자연인 나로서는 분명 그렇게도 하지 못하였다.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나아가 책임 있는 사회인으로서 주인공이란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살지 못하였다. 직장이란 울타리에 갇힌 축소지향적인 삶이었다. 삶의 방편인 직장생활에 올-인하느라고 정작 더 큰 나의 삶에서 주인공으로 살지 못하였으니 잘못 살아도 엄청 잘못 산 것이 아닌가. 직업과 직장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통하던 세상을 살았다고 자위를 해보지만 실패는 역시 실패일 따름이다. 나의 삶 안에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온전한 나의 삶이요, 완벽하게 살고 확실하게 죽는 나의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금에 와서 직장이 삶의 본업이 아니라 삶의 수단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우치지 못한데 대하여 회한을 보탤 따름이다.
주인공은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결코 서두르거나 쫓기지 않는, 불평불만하지 않는 상태로 참된 자아를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가고 싶거나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갖고 싶은 것이 아닌 지금의 것들에서 만족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존재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 권력, 명예, 신언서판 등등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일어나는 마음작용이 자존심이고, 그런 것에서 초연해서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며 흔들림 없는 인생을 사는 존재감이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랑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자존감이야말로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자존감이 없으면 참된 자아를 갖출 수 없고, 자아를 갖추지 못한 주인공은 한갓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입처개진(立處皆眞)으로 드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자존감을 가진 존재의 주인으로서 참된 자아를 누리고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
(12.6.28 대한문학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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